위대한 기독교 사상가들이 본 성화...어거스틴, 깔뱅, 조나단 에드워즈

   
▲ 남포교회에서 열린 '구원 그 이후'를 주제로 열린 신학세미나 전경 ⓒ뉴스앤조이 주재일
‘구원, 그 이후’ 세미나에서 박영실 교수(총신대)는 ‘어거스틴의 구원과 성화’, 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는 ‘깔뱅에 있어서의 구원과 성화’를, 오덕교 교수(합동신학대학원)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원과 성화’를 발표했다. 이들의 발표를 요약하면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들은 구원과 성화란 ‘구분은 되지만 분리는 되지 않는’ 것으로 그려냈다. 한국 교회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들 사상가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지나칠 정도로 단회적 구원 경험에 함몰된 것은 정작 이들의 가르침과는 배치되는 것임이 강하게 부각된다.

박영실 교수에 따르면, 어거스틴의 성화(santification) 이해는 칭의(justification)의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즉 칭의는 하나의 사건임과 동시에 계속적으로 의롭게 되는 과정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성화 과정의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 혹은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성육하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신의 인성에 참여시킴으로써 신성을 부여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진행하고,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어거스틴, ‘겸손한 사랑’ 강조

어거스틴은 성화를 이루는 도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인데, 대표적으로 교회에 참여하는 것과 성례전(성찬과 세례)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 성경이 이 두 영역 모두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 영역이 성령이 일하는 장이며, 말씀이 선포되고, 죄가 용서받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보았다. 그것이 인간이 성화되는 가장 중요한 자리라고 본 것이다.

어거스틴은 원죄를, 특히 원죄의 본질을, 자유의지의 남용이나 교만함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성화 과정에서도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 바로 ‘겸손’이다. ‘우리가 타락한 것이 교만에 의해서였기에 오직 겸손에 의해서만 다시 회복될 수 있다’고 한다. 겸손을 통해 교만함으로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인간들이 치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통해 확연히 나타났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진’ 그리스도가 성화의 모범으로 제시된다.

어거스틴에서 중요하게 강조되는 또 다른 덕목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인 인간은 창조주를 향해 나아가는 경향을 갖게 되어 있다. 이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을 카리타스(caritas)라고 했는데, 유명한 어거스틴의 ‘두 도성(都城)이야기’에서 이 내용이 극명히 드러난다. ‘두 사랑이 두 도성을 창조했는데, 자기를 경멸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천상의 도성을 창조했고, 하나님을 경멸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지상의 도성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자기가 가야할 길을 제대로 찾은 것이며, 종착역인 성화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할 때까지는 쉬지 못한다’는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어거스틴에 있어서 성화란 칭의에서 시작되는 점진적 완성의 과정이며 교회와 성례전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되, 내용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겸손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도권을 갖고 진행된다고 보았다.

깔뱅, 칭의와 성화는 은혜 안에서

이수영 목사는 한국 교회의 구원론이 ‘오직 믿음으로’와 ‘오직 말씀으로’라는 개신교 신학 원리에서 이상하게 이탈해서 ‘오직 말뿐으로’라는 양태로 발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값싼 은혜, 실천 없는 신앙으로 잘못 나간 것을 회복하려면 구원에 있어 ‘칭의의 은혜’와 ‘성화의 은혜’ 둘 다 중시하며 균형점을 찾아가는 쟝 깔뱅(John Calvin)의 통찰을 통해 보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깔뱅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중의 은혜가 주어진다고 했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그분을 사랑의 아버지로 모시게 하는 은혜(칭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화됨으로써 흠 없고 순결한 삶을 살 수 있는 은혜(성화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믿음은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성령으로 인한 성화까지 이해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충분히 알 수 없다…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기초로 삼는다…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해 성화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는 것이 깔뱅의 입장이다.

‘나는 회개를 한마디로 중생이라고 해석하는데 회개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지고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시키는 것이다…이 회복은 한순간이나 하루나 한 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평생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선택받은 사람들 속에서 육의 부패를 씻어버리며, 그들의 죄책을 깨끗이 없애며, 그들을 성전으로 주께 바치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온 마음을 새롭게 하여 진정한 순결에 이르게 하시며, 그들이 평생을 통하여 회개를 실천하며 이 싸움은 죽음이 와야만 끝난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기독교강요 III.iii.9)

그렇기에 깔뱅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은 ‘자기 부정(self-denial)’에 있다고 보았다. 소유욕과 권력욕과 명예욕을 마음에서 씻어내는 것, 일생을 통해 하나님을 상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의 자세를 확정하는 것,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결정과 판단에 맡기는 것, 끊임없이 자기 허물을 돌아보며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 등을 말하고 있다. 

에드워즈, 광신주의․합리주의와의 투쟁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1703~1758)는 미국의 대각성운동 시기에 주도적 설교자이자 목회자로, 운동가이자 신학자로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미국 역사에서는 손꼽히는 지성인의 반열에 들기도 한다. 그는 최근 국내에도 번역된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 designtimesp=2550>(부흥과개혁사 펴냄)이라는 책을 통해 당시 대부흥운동에 나타난 여러 오류를 지적했다. 오덕교 교수는 그가 당시에 만났던 양 극단, 즉 광신주의와 합리주의 문제를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신앙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였다고 보았다.

에드워즈는 1730년대 중반 미국의 노샘턴(Northhampton) 부흥을 직접 경험하였고, 1740년대 초반에는 대각성운동을 이끌었다. 1730년대 그의 교구에서 일어난 부흥을 통해 6개월 만에 300명 이상이 회심을 체험했고, 생동감 있는 예배 경험과 사람들의 영적 도덕적 각성이 급격히 일어났다. 174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영국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1714~1770)와 더불어 대각성운동을 이끌었는데, 각 도시를 순회하며 행한 설교에는 수천 명씩 사람들이 몰려들어 언론이 떠들썩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당시 뉴잉글랜드의 인구 30만 가운데 25만 명이 회심을 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에드워즈는 사람들 사이에 광신적 신앙 행위가 나타나고 있음을 감지했고, 반대로 이런 부흥에 저항감을 느끼는 합리주의적 대중이 있다는 것도 알아챘다. 그는 이 두 대상을 향해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일에 심각한 노력을 기울였다.

에드워즈는 성화란 성령의 사역으로 성령이 성도 안에 거하면서 새로운 본성의 원리, 생명의 샘으로 역사한다고 했다. 동시에 성화는 성도들이 성령의 도움 가운데 ‘끝없이 전개되는 죄와의 투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택한 자의 죄를 깨끗케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인생의 경주를 하도록 도우며, 성도들은 옛사람과 새사람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투쟁하게 한다. 성화란 ‘단순히 과거 한때 그리스도 안에 거한 것이 아닌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간과되고 있는 성화의 삶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신앙 현실은, 과거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들의 주된 강조점에 비추어 살펴볼 때,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화의 삶을 지나치게 간략하게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사상가들이 평생의 삶을 통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으로 그리고 있는 성화의 삶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거의 전적으로 누락되고 있거나, 상실되고 만 것은 아닌지 의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신앙의 전통과 믿음의 고전을 되살리는 일은 이런 면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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