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에서 또 다른 죄악 싹터

"굴절된 우리 민족(교회)의 역사를 고백하고 바로 잡자"는 말을 할 때마다 가장 득세하는 논리가 있다. "누군들 죄가 없겠느냐? 그렇게 비판하는 너는 죄가 없어서 그들을 비판하느냐? 판단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니, 우리는 그저 기도하며 사랑하자"라는 것이다. 은혜 된다.  매우 긍정적 사고방식이며 감동적인 것 같으나, 이는 매우 의도적인 성경왜곡이며 책임회피다. 나는 백주 대낮에 그것도 교회를 무대로 횡행하는 이 엄청난 오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성경은 진정한 회개와 회개한 척 하는 것을 엄격히 구분한다는 점이다. 오해 구절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를 생각해 보자(요 8:1~11). 따지고 보면 그 여인이라고 왜 변명거리가 없겠는가마는, 그녀는 자기의 죄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도망가려 하지도 않았다(9, 10절). 예수님은 이미 그녀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계셨다. 이미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있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입술로 고백을 했어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정죄하던 사람들이 다 도망가 버린 것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일부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10절)고 물으신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반드시 기억해야 했고, 그리고 나서 죄사함의 선언은 따랐다. 이미 예수님은 그녀를 용서하셨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분명히 이렇게 덧붙이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절).

공적인 참회는 절차가 있다  
 
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용서받은 베드로의 경우(요 21:15~17)를 생각해 보자. 분명히 베드로는 무조건적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의 절차를 행하셨다. 이미 베드로의 죄과를 다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아주 의도적으로 질문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말이다. 이미 주님을 부인한 것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있을 베드로에게 이 질문은 "너는 참 나쁜 놈이다. 어쩌면 네가 나를 배반할 수 있느냐?"는 책망보다 더 가슴 저미는 질문 아닌가?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용서의 선언에 앞서 베드로가 자신의 인간적 무능과 죄성에 직면하여 철저히 참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신다. 더 이상 인간적인 열정과 종교적 감정에만 의존하는 삶이 아닌 철저한 주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베드로는 다시 한번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주님 앞에서 솔직히 인정해야만 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17절).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주님의 용서와 더불어 사명의 은총이 주어진다(17~19).

다시 말하지만 주님의 용서에는 분명한 회개가 전제된다. 그저 입으로만, 그리고 그저 시인하지 않음으로 생길 수 있는 더 큰 파문이 두려워 마지못해 인정하는, 일본 천황들의 '정치적 유감표명' 같은 것이 아니다. 삶의 근본적 변화와 회심에 이르지 않고 죄책만 피하려는 우리들의 속셈에 대해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마 3:7~9).

더구나 그것이 공적으로 저질러진 죄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사실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분명히 나 자신이 먼저 부담스러운 일이다. 나 자신도 얼렁뚱땅 용서받고 싶은 유혹에 언제나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 마음의 부담을 덜기 위해 있지도 않은 거짓 위안을 받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과거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와 정치적인 권력 야합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듣는 판에 박힌 변명이 있다.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이다" 그러나 명백한 한국 교회의 아픈 과거를 참회하자는 말은 정죄할 권한이 우리 사람들에게 있음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런 사람들과는 다르다'라고 자신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는 자기 멋대로 '이 사람은 진실한 회개를 했다' '그렇지 않다'고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공적인 참회와 회개, 용서에는 일정한 절차와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전혀 그렇지를 못했다. 모든 교회가 다 알고 있는 명백한 죄를 짓고서도 혼자 알아서 회개하고, 혼자 알아서 근신하고, 해벌이 되기도 전에 또 다시 예전의 자리에 앉아 권력을 행사하는 잘못을 반복했다. 그로 인해 오늘날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신앙 양심이 일반인들의 도덕성만도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 아닌가.

예수님의 진심은 한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여 낙인을 찍으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벗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데 온 관심을 기울이셨다. 그러나 새 사람 되게 하시려는 주님의 간절한 소망을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장벽은 바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이런 저런 종교적 합리화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패거리의식  

흔히 죄인이라고 일컫던 세리나 매춘부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에 주님을 만났을 때 복음을 볼 수 있었다. 반면, 의인이라고 일컬어지던 바리새인·사두개인들은 종교적 외피에 만족하여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기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보아도 그 앞에 무릎 꿇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흔히 죄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에게는 관대한 모습으로 보였던 반면 종교적 자긍심에 깊이 빠져 있던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화 있을진저'라고 불같은 모습을 보이셨다(마 23장, 눅 6장).

그러나 오늘 우리는 자주 이런 예수님의 마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모습으로 살고 있다. 종교적·사회적 기득권을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노골적이고 의도적인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만 아신다'며 매우 관대하다. 그러나 삶에 지쳐 술에 절어 살아가는 노숙자에게는 '술 마시고는 교회에 나타나지도 말라'고 윽박지른다. 또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일용직 잡부에게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다'고 책망하면서도, 사업이 바빠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사장님께는 '사업이 더 번창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해 달라'고 기도해 준다. 우리는 이제 달라져야 한다.

두 번째 무조건 감싸주기의 문제점은 이러한 논리가 상당히 많은 경우 일부러 죄를 지어놓고 무마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주 악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만 돌 던지라'는 말만큼 죄 지은 사람이 도망가기 좋은 구멍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교회헌법 안에 명백히 나와 있는 권징조례는 무엇 때문에 만들었고, 잘못했다고 교도소에 가는 사람은 왜 있는가. 우리는 잘 몰라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지를 방패삼아 잘못을 가리려는 완악한 마음들도 우리 속에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적어도 주님의 귀한 아가페 사랑이 엉뚱하게도 죄를 의도적으로 가리는 면죄부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논리가 사회적인 문제에 적용될 때는 기독교인들의 제 편 일방적으로 감싸주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난 옷 로비 의혹 사건의 관계자들을 위해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정치적 희생양' 운운하며 그들을 석방해 달라는 서명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또 요즘 한창 문제가 되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해서는 군대 가기 싫은 놈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면서도, 아름다운 기독청년으로 알려졌던 가수 유승준의 병역 기피에 대해서는 애써 무관심하거나, 적극 변호하고 나서는 분들도 적지 않다. 그 사건 이후 무심코 기독교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이 문제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내놓은 의견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전 유승준 군이 이번 결정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뇌하고, 힘들어했는지를 직접 옆에서 보며 함께 기도했습니다. 승준군이 이런 결정을 내려야 했던 그 배경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누가 승준군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요?…승준군을 비난하고 있는 그 어떤 사람도, 만일 승준군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승준군과 똑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어느 목사님). "…즉 누구도 그를 욕할 수 없다는 것이죠.…어느 크리스천이 자신 있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며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죠?…더구나 군이라면 누구든 가기 싫어하고…미국시민권이라면 누구든 따고 싶은 현실 아닙니까?…좀더 솔직했음 좋겠고…."

나는 그런 글들을 보며 우리들 때문에 아직도 주님이 욕을 많이 얻어 드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답답했다. 그 글에서 자주 나오는 '형제' '지체' '사랑' '중보기도'라는 말들이 그토록 가볍게 쓰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결국 이런 식이라면 기독교인들의 형제애, 지체의식이라는 것이 의리로 똘똘 뭉친 조직사회의 자기편 밀어주기와 뭐가 다른가? 나는 이 패거리정신이야말로 주님을 욕 먹이고, 기독교를 이기주의집단으로 비치게 만드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죄성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아가페의 무조건적 사랑과 희생은 얼렁뚱땅 죄를 뒤엎어 버리려는 우리의 사악한 마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독도는 떠들고, 현대사는 침묵하고

교계 역시 부담 없고 만만한 독도만 붙들고 야단하기는 마찬가지다. 교계신문들은 일제히 일본 교회협의회 인사들이 '독도가 한국 땅이다'라고 말했다는 걸 엄청난 사건인 양 떠들어 대지만 실제 일제시대 부끄러운 한국 현대사의 굴절은 여전히 입에 담으려 하지 않는다. 이번 부활주일연합예배 때에는 기상천외한 독도수호결의대회까지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굴절된 역사는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제 당시 한국교회는 국권침탈을 전후하여 개인적·단체적으로 친일행적에 동참하던 것이 1938년 장로교를 필두로 모든 교단이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이후 많은 교회와 지도자들은 소극적인 친일을 벗어나 적극적으로 일본에 협조하거나 일본의 입맛에 맞는 기독교 개조에 적극 협력한다. 오경이나 계시록 같이 민족의식과 종말론, 심판을 담은 내용은 일본의 패망을 연상케 할 수 있다는 면에서 가르칠 수 없게 되었고, 지도자들은 일본을 위한 전쟁에 앞장서서 복을 빌어주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거나 일본정책에 반대한 교회지도자들은 동료이던 목회자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단죄되어 추방되거나 투옥, 처벌을 받았다.

흔히 과거청산·일제청산을 말하면 일제시대의 그 험악한 세월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사람들이 선배들의 과거를 원천 부정하는 무리한 주문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들 선배들의 어려움을 원천부정하거나 잘못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인가. 정말 중요한 것은 공식적인 죄악이 공식적인 참회의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고 오히려 확대, 재생산되었다는 점이다. 상황은 해방 후에 이러한 왜곡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더 꼬여버렸다.

말끝마다 "숭고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외쳤지만 주기철 목사의 일제시대때 적극적이고, 공식적인 직위를 갖고 앞장섰던 교계 인사들에게 일정 정도의 참회의 기간을 갖게 하고, 그 후 교인들의 결의에 따라 계속 시무 여부를 결정짓자는 최소한의 요구가 당사자인 교권주의자들에 의해서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순교자의 후예들은 한국 교회에서 분파주의자로 밀려나 버렸고, 부일과 친일협력에 앞장섰던 자들은 교권을 장악하여 해방 후에도 한국 교회의 주역으로 자리를 굳혔다. 한국 교회의 주류는 정통성과 도덕성의 기반 위에 서지 못한 채 교권을 다시 틀어쥐었고, 이들은 장로 대통령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독재 권력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로 득세했으며, 잇따른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도 정권의 논리를 가장 강력하게 후원하는 역할을 자임하며 교세를 확장해 왔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주류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호전성을 단죄하고 극복할만한 정신적·실제적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이들은 독도수호니 일본망언 규탄이니 말은 많지만 실제적으로는 추상적인 공염불 이상 민족과 역사에 대한 어떠한 의미 있는 처방도 내놓을 수 없다.

긍정적 사고방식이 복음은 아니다

이제 와서 어쩔 것인가. 지금이라도 한국 교회는 전면적이고 공식적으로 참회의 고백을 해야 한다. 무슨 때만 되면 의례적이고 추상적으로 '한국교회의 죄악을 회개합니다'는 식의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한국교회가 일제시대, 한국 현대사의 주요한 고비마다 어떠한 굴절을 겪어왔는지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과 민족 앞에 진정으로 참회한다는 고백을 해야 한다.

부활절을 생각할 때 우리는 베드로가 평생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며 마음을 바로 잡았을 것이라는 말을 한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베드로는 평생 주님을 부인했던 자신의 행적을 결코 잊지 않았을 것이며, 그것이 평생 베드로를 더욱 사심 없이 헌신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지금 그런 베드로의 참회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약함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에서 또 다른 죄악이 싹틀 수 있음을 명심하고 한국 교회의 전면적이고, 공개적인 참회의 대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최소한 예수님을 방패삼아 자기 죄악을 가리지는 말자. 남들은 다 모르고 자기만 알고 있는 죄를 스스로 고백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것까지 고백하자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만백성이 다 알고 있는데도 다만 체면(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자기만 인정하지 않는 죄는 더 이상 범치 말자.

1956년 5월7일 <기독공보>에는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한의 백만 성도는 이 두 분을 세우자"는 타이틀 아래 '장로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권사 이기붕 선생을 부통령으로'라는 광고가 실려 있다. 이 광고는 '정·부통령선거추진 기독교도중앙위원회'라는 단체가 낸 것인데, 이 단체의 회장인 전필순 목사는 일제시대 조선 장로교회 부총무를 지내며 "미국은 동양이나 우리 일본에 대해서 온갖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괴롭힘으로써 일종의 쾌감을 느끼고 우월감을 갖고 싶어하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우리는 이 성전(聖戰)의 목적 관철을 위해 전심전력을 바쳐서 싸울 때입니다"(이선교, 앞의 책)라는 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는 해방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까지 역임하며, 정치적으로는 반미주의자에서 친미반공 투사로 돌변하였다. 긍정적(적극적) 사고방식과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착각하지 말자. 긍정적(적극적) 사고방식으로도 충분히 은혜를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건 복음은 아니다.

무조건적 사랑에 얼렁뚱땅 덮어주기?

"독도는 우리 땅! 대마도도 우리 땅!" 요즘 벌어진 국제축구대회 운동장에 커다랗게 붙여진 현수막이다. 일본에서 엄청난 한류열풍을 일으켰던 배용준의 입에서도 기어코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멘트를 받아내 1면에 대서특필하고야 마는 스포츠신문의 헤드라인을 본다. 정치인들도 독도에 몰려가 독도경비대원들과 두 주먹 불끈 쥐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솔직히 좀 역겹다. '이건 아닌데' 싶다. 본질이 바뀌었다.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가 한 일본 우익 잡지와에 기고한 글에서 "극악한 러시아에의 합병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일본이 우리를 식민지 지배한 것은 차라리 고마운 일이다"라고 해서 파문을 일으켰지만, 그러한 생각이 결코 '웬 미친놈의 헛소리'만이 아님을 이 땅의 우익 지식인들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조갑제 월간조선 사장, 군사평론가 지만원씨, 임광규 자유시민연대 공동대표도 소신 있게 지원 발언을 이어갔다.

   
▲구교형 목사. ⓒ뉴스앤조이 신철민

이런 판국에 일본이 언제나 그랬듯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한국에 유익한 측면도 많다"라고 하거나 일본 시마네현에서 다케시마(독도)의 날을 제정했다고 해서 그게 뭐가 그리 이상한가. 과거사청산법 제정은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좌익적 시각으로 단죄하는 것이기에 반대한다는 판국에 일본더러만 정신 차리라고 외친다고 무슨 대수가 있나 말이다.

사실 우리 스스로가 일제 잔재에 대한 더욱 분명한 단절의 의지를 보여 왔다면, 일본이 연례행사처럼 "일제의 한반도 지배가 발전을 도왔다"는 식의 망언을 늘어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구교형 /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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