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신학에서 보는 구원론 / 사회 안에서 평화 · 정의 실현하는 것

역사상 기독교 구원관의 발전 과정에서 치명적인 맹점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기독교가 헬라적 사유와 만나면서 구원의 정신화(spiritualization)가 심화했다는 점이다. 구원이란 현실 세계 너머의 문제로 간주되었다. 국가는 '세속적(secular)'인 구원 문제를 담당하고, 그리스도는 단지 ‘영혼의 구원자’라는 두 왕국적 분업이 이루어짐으로써 기독교의 구원은 세속사(世俗事)와 무관한 영신적 차원으로 축소되었다.

   
▲ 김동춘 교수는 구원과 정의 문제를 더욱 본격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회정의의 함의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기독교 구원관의 또 다른 문제점은 종교개혁의 모토인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의 왜곡이다. 이는 루터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구원과 행위를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행위 없는 구원’을 합리화하는 역기능적인 맥락으로 전용되었다. 본 회퍼가 제자도의 대가를 치르지 않은 채 단지 천국 티켓을 거머쥐려는 이른바 구원이기주의를 ‘값싼 은총’이라고 질타한 것은 루터교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역사적 차원에서 구원의 의미 해석

현대 구원론은 이 점에 대한 응답적인 성격이 강하다. 우선 현대 신학자들은 구원을 개인이나 교회 차원을 넘어 역사 차원에서 해석하려고 했다. 그 가운데 불트만은 구원을 실존론적 역사 측면에서 해석함으로써 도리어 구원의 사사화(私事化)로 뒷걸음쳤다면,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세계 고난의 역사를 향해 내달렸다. 판넨베르그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편 역사의 지평으로 더욱 확대, 해석하였다.

그런 점에서 ‘칭의와 성화’는 현대 신학의 구원론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아니다. 사실 이 용어에는 ‘그 백성들’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교회 중심적인 구원 사고가 깔려 있다. 성화 개념에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실재가 여전히 인격주의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을 보다 역사화해야 한다. 물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고백이라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구원의 개인화와 내면주의라는 발목에서 벗어나려면, 그리하여 교회 담장 너머로까지 구원 영역이 뻗어나가려면 ‘역사 안에서의 구원’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구원 그 이후’가 성화라면, 그것은 개인적·인격적 성화만이 아니라 ‘사회적 성화’ ‘구조악의 성화’까지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현대 신학의 구원에 대한 주된 관심은 ‘구원과 사회 정의’로 압축된다. 조직신학자는 아니지만 현대 에큐메니칼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호켄다이크는 선교를 샬롬의 수립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선교는 단지 교회 이식(移植)이나 교회화(churchfication)가 아니라 피조물 전체의 구속을 목표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결코 영혼이나 개인 구원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평화와 정의의 실현이라고 본 것이다. 이제 에큐메니칼 차원의 구원 개념은 인간화와 복지, 사회 정의와 평화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대된다. 이처럼 정의를 포함하는 구원 이해는 복음의 정치적 해석을 꾀했던 정치신학이나 가난한 자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강조한 해방신학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정의가 구원은 아니나, 구원은 정의 포함

   
▲ 3월7일 '구원 그 이후: 성화의 은혜'라는 주제로 남포교회 20주년 기념 학술 축제가 열렸다. ⓒ뉴스앤조이 자료사진

특별히 해방신학의 ‘구원과 해방’은 사실상 구원과 사회 정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불의하고 가난한 세계에서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구원이 반드시 역사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해방 과정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거나 은총의 현존이다. 왜냐하면 성육신을 통한 구원적인 은총은 언제나 인간적·사회적·생물학적인 차원, 즉 인간의 하부구조적 차원을 취함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역사상 해방이 ‘죄로부터의 해방’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차원의 죄로부터 ‘총체적 해방’을 가져오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불의로부터의 해방은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부분적 해방’인 것이다. 따라서 역사상 해방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회적 불의로부터 해방이 일어나는 ‘거기서’ 그리스도 구원의 역사적 차원이 현실화된다.

우리는 해방신학이 씨름하고자 했던 구원과 해방의 관계가 사실은 현대복음주의운동에서 마찬가지로 고민했던 핵심 주제임을 확인하게 된다. 복음주의 선교운동의 전환점이었던 로잔언약(1974)은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인간과의 화해가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사회 행동이 복음 전도는 아니며, 정치적 해방이 구원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가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주장한다." 이 선언서는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형태의 소외와 압박과 차별에 대한 메시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른바 ‘창조-타락-구속’의 기독교 세계관은 구원과 정의를 어떻게 연결하 고 있을까? 이 점에 대해 코넬리우스 플랜틴가(Cornelius Plantinga Jr.)는 불의한 사회 구조까지 구속되어야 한다고 진술한다. “하나님께서는 사회·경제 구조도 구원하시기를 원한다. 경영이나 노동 구조가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면 그것도 구속함을 받아야 한다. 국민건강 관리 체계가 돈 있는 사람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면 그것 역시 구속함을 받아야 한다.”

죄로 인해 만물이 타락하였다면 만물이 구속함을 받아야 하는데, 그 안에는 불의한 사회 구조마저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리챠드 마우(Richard Mouw)에 따르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믿음을 통한 개인적 칭의와 회개이면서 동시에 ‘죄의 왜곡된 권세로부터 모든 창조 질서의 구원’임을 표방한다. 마우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은 칭의, 중생, 죄의 용서 같은 인격주의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현존하는 정치 구조와 문화마저 변혁하는 새창조의 구속이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메커니즘 논란

그러나 구원과 정의의 문제를 더욱 본격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종교개혁 신학에서 도출된 칭의 개념의 사회정의적인 함의를 도출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이해된 칭의는 단지 하나님 앞에서의 의(義), 즉 신인 관계의 올바름으로 이해함으로써 칭의를 종교적 차원에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위르겐 몰트만은 죄인을 위한 칭의론을 억압당한 사람들을 위한 정의와 연결시켜야 한다고 역설한다. 다시 말해 바울이 말하는 죄인의 칭의(디카오쉬네)와 구약의 사회적 약자를 위한 권리인 정의(체다카)를 분리시킨 것이 오늘의 ‘정의 부재의 칭의론’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최근 논란되고 있는 르네 지라르(Rene Girard)의 희생양 논의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를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희생(sacrifice)은 다름 아닌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불의한 사회구조 아래 죽어가는 폭력의 희생물(victim)과 동일한 분이라는 사실이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행동은 그 자체가 세계 정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되는 것이다.

김동춘 / 천안대학교 · 현대기독교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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