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스스로를 민중신학의 아웃사이더라며 자리 매김하고 있는 진보진영의 한 신학자를 만나 제법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기독교 진보진영의 사회운동이 무너져가는 것을 무척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순수성의 상실에 있다고 보았다. 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시대의 변화와 함께 누리게 된 기득권에 안주하다 사회운동이 전반적으로 매력을 잃어가자 중심인물이 자리를 떴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복음주의권에서 사회참여 의식이 강화되고 활발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복음주의자들은 어떤 신학적 작업을 해오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정작 복음주의권에 몸을 담아온 나는 그럴수록 오히려 더욱 부끄러울 뿐이다. 물론 복음주의권에 대한 그의 기대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복음과 상황>이 태동할 때부터 꾸준히 강조해왔던,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아우르는 총체적 혹은 통전적 복음을 신봉하는 이들이 꾸준히 늘어왔다.

좀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각종 운동에 뛰어 드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복음주의권 전체를 바라보면 이러한 움직임은 아직도 매우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특히 지난 2년 동안 복음주의 혹은 보수주의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시청 앞 기도회 혹은 기독당 창당을 통해 보인 수구적 정치 행보는 복음주의권 전체에 큰 수치와 불명예를 안겨다 주었다.

나를 부끄럽게 한 어느 민중신학자

이렇게 부끄러운 복음주의권에 진보진영의 한 명석한 신학자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시대 상황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웅변해준다. 거대한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보라! 세계 12~13위의 경제 규모를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통령도 공공연히 시장이 무섭다고 말하지 않는가? 시장이 무서운 것은 분명히 누군가 부당한 피해를 당하고 있지만 특정 가해자를 찾아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억울한 피해자라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무언가 확실히 잘못되긴 했는데 싸울 수가 없다.

지난 2월 16일 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국민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9명은 한국사회의 빈부격차가 심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은 자신들이 자유 경쟁에서 실패한 무능한 존재이거나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게으른 존재라는 자책감에 시달릴 뿐이다. 소수의 성공담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정당화하는데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원래 시장이란 가지지 못한 자에겐 바늘구멍만한 성공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에 그런 성공담에 감동을 받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난 사람들 중 대다수의 경우 자괴감만 더 깊어갈 뿐이다.

복음주의 양심의 스캔들을 넘어서자

시장을 통해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가 온전할 리 없다. 사람의 가치도 돈과 구매력으로 평가된다. 돈만 있으면 이젠 잠자리를 제외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남편과 아내도 인터넷을 통해 구매할 수 있는 세상이 되고 있다. 각급 교육기관과 교회에 이르기까지 냉정한 경제 논리가 파상공세를 퍼붓고 있다.

이런 맘몬의 거센 공격 앞에 흔들거리는 이 시대를 무엇이 변화시켜나갈 수 있을까? 복음의 힘밖에 없다. 최근 한 출판사로부터 단평을 부탁 받아, 곧 출간될 로날드 사이더의 책을 읽었다. 제목을 직역하면「복음주의 양심의 스캔들」이다. 그는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도덕성과 사회 문제의식이 일반 시민들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스캔들임을 눈물로 개탄하면서 복음에는 시대를 변화시켜나갈 힘이 있음을 역설한다.

그렇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엔 이 시대를 맘몬의 유혹과 억압에서 건져냄으로써,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회복시켜 줄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다. 복음의 사람은 더는 절망과 냉소의 자리에 머무는 사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들에게 희망은 당위다. 복음의 깃발을 높이 들고 어두운 시대를 향해 강력한 도전장을 던져야 한다. <복음과 상황>의 새 출발이 그 신호탄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박득훈 목사 / 언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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