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리의 축제만 즐기고 구체적인 일상에서는 십자가를 외면하는 우리가 도대체 세상을 어떻게 바꾼단 말인가. ⓒ뉴스앤조이 자료사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 12:24)

아침 묵상을 위해 「매일성경」을 읽다가 나는 위에 적은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을 받았다. 이 말씀은 1977년 아홉 살 나이로 심장병을 앓다가 하늘나라로 간 첫 딸을 장례 지내고 그 유골을 내가 사역하던 신촌의 캠퍼스에 뿌릴 때 읽고 또 읽은 구절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받을 때면 언제나 등골이 서늘해지는 충격이 있다. '구속의 십자가'를 기뻐하는 것으로 만족하다가 이 말씀 앞에서 나는 다시 '제자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된다.

최춘선 목사가 되살려준 기억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회개를 요청하신다. 얼마전 나는 학생선교단체 신입간사 연합수련회에서 '맨발천사 최춘선 목사'에 관한 영상물을 보았다. 집에 돌아와 김우현 감독이 그를 만나게 된 과정을 책을 통해 읽으며, 나는 오랫만에 소리를 내며 한참 동안 울었다.

주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그분의 올곧은 신앙자세를 보며, 또한 고난을 싫어하는 나의 타락한 모습을 보며 가슴 아프게 울고 또 울었다. 그는 30년 세월을 한결같이 남이 듣든 말든, "예수 천당 날마다 천당"의 복음을 전하셨다.

"Why two Korea?" 외치면서, 통일이 되면 신겠다며 영하의 길을 맨발로 걸으셨다. 귀걸이하고 성형수술하고 사치하는 청년이 예쁘고 멋진 것이 아니라, 유관순님이 진짜 미스 코리아요, 안중근, 김구님이 진짜 미스터 코리아가 아니겠느냐는 메시지를 그의 방법으로 전하셨다.

그는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다하시다가 사명인의 고된 삶을 마치셨다. 천국에서 우리 주님께서 그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품에 안아주실 것이다. 나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도저히 그 어른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른이 천국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 진리로 뒤틀린 우리 상황을 바꾸기까지 어떤 수치나 고난도 감당하겠다는 복음 정신을 배우라고 이 영상물을 주신 것이 아닐까. 아마 이 영상을 본 대부분의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주께서 친히 21세기를 사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을 깨우는 경고의 선물로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복음으로 상황을 바꾸고 싶다!"는 명제를 안고 주를 따르는 복상 독자들에게 우리의 사명이 무엇이고 어떤 자세로 이를 감당해야할 것인가를 깨우쳐 주는 듯하다.

복음으로 상황을 바꾸자?

어린 시절 보았던, 전쟁으로 제주 서귀포까지 피난 온 주의 종들 가운데서는 바로 그 어른 같은 복음 정신이 느껴지는 분들이 계셨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목숨을 내 놓을 준비가 된 사람처럼 느껴지는 분들.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영혼들을 위해 얼마든지 자기를 희생할 수 있고 동족이 피흘려 싸우는 '동족상잔'의 상황이 미치도록 고통스러워 민족의 구원을 위해 울부짖으며 기도하던 주의 종들.

하지만 이 시대는 너무 편한 시대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바울은 외쳤으나, 이 땅의 교회는 어떻게 해야 좀더 물질이 풍요한 이 시대에 남들보다 더 앞서 갈 수 있는지에만 관심을 두는 듯 하다. 주의 종들은 좀더 세련된 목회 테크닉을 배우기에만 관심 있는 성공지상주의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짐 패커가 지적했듯이, 평신도들은 '중산층의 안일주의병'에 걸려 주님 따르되 요령 부리며 적당히 자기가 편한대로 종교향락주의자들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이미 예수는 부활하셨으니까, 우리는 승리의 축제 예배만 즐기고, 구체적인 일상에서는 십자가를 외면하려는 "승리주의자"(triumphalist)로 만족하려는 것은 아닐까.

이런 교회가, 이런 주의 종들이, 이런 평신도들이 도대체 세상을 어떻게 바꾼단 말인가?

부활의 전제는 죽음 아니던가

해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계절이 왔다. 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처럼 해마다 기간을 정해놓고 사순절, 고난 주간이라는 영적 수도 기간을 지켰을까?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동일하지만, 우리가 늘 변하기 때문이 아닌가.

신앙 연륜은 쌓여가지만 오히려 젊은 시절보다 주님의 십자가를 더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가슴 아파한다. 슬프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기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보다 자기 영광을 더 구하기 쉬운 자다. 육신의 안일을 좋아하고, 타락의 가능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지난해보다 예수님을 더 닮아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내 속에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누룩이 더 퍼져있다.

   
▲ 이승장 목사. ⓒ뉴스앤조이 신철민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보다는 세상을 더 사랑할 가능성이 많다. 도저히 십자가를 지고 주님 따르기 힘든 체질을 타고 났다는 생각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타락의 가능성이 너무 많은 자다.

하지만 이렇게 타락한 자리에서 다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오직 주의 은혜라고 다시 고백한다. 그러나 앞으로가 더 문제다. 악한 이 시대에 진실하게 주님 섬기기가 더 힘들어졌다. 캠퍼스는 더욱 어두워졌고, 한국사회의 형편과 한반도의 상황은 더욱 병들고 절망적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에 다시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다. 내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부활의 전제는 십자가의 죽음 아니던가.

이승장 목사/ 학원복음화협의회 상임대표

구독안내

이 기사는 유료회원만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 온라인구독 회원은 로그인을 해주시고 인증 절차를 거치면 유료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월 1만 원 이상), 온라인구독(1년 5만 원) 회원이 아니시면 이번 기회에 〈복음과상황〉을 후원, 구독 해보세요.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