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한국의 유명한 부흥사가 도쿄에 와서 설교를 했다. "일본은 죄를 많이 지은 나라니까, 여러분들은 헌금을 많이 하시오. 그러면 한국은 그 돈으로 선교사를 파견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한국은 최근 독도, 군인위안부, 교과서 문제 등으로 온 국민과 대통령까지 떠들썩한데 반해 일본의 매스컴과 국민은 조용하기만 하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이 목사의 곡해(曲解)가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독도, 군인위안부, 교과서 문제 등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꼴로 진행되어 가는 일본의 우익을 보면 신물이 난다. 어떤 이가 "지진이 나서 망해 버려야 할 나라"라고 말하는데, 도쿄에 내 잠자리가 있으면서도 그 분노를 이해하고는 한다.

이런 지경이니 새학기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내 마음은 무겁다. 실은 독도를 아는 일본인 학생은 극히 드물다. 대학생 가운데 독도 문제를 알고 있다면 대단한 시사 상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독도 문제가 절정에 달했던 지난 3월 말, 일본 텔레비전에서는 독도 문제에 대해 거의 방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는 한국에 있다가 일본에 왔는데, 비행기로 단 2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나라가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한국에서는 온 국민과 대통령까지 분노하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신문 구석에 두 단이나 세 단 정도로 짧은 해설만 있고, 텔레비전에서는 한류다 뭐다 하면서 일본어로 더빙된 드라마 <천국의 계단>과 <대장금>만 하고 있었다.

일본, 독도 분쟁 거의 방송 안해

사실 일본의 우익과 매스컴은 상대국이 흥분하기를 바라고 있다. 냉정하고 구체적인 대처를 이들은 제일 두려워한다(사실 우리에게 냉정한 대처가 있기는 한가. 독도를 깊게 연구한 한국인 역사학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독도에 대해 우리는 영어와 일본어로 된 전문 서적을 몇 권이나 냈는가?).

가령, 오늘(2005년 4월4일 현재)의 뉴스를 생각해보자. 텔레비전에서는 반일 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는 중국 현지를 보여주고, 앵커는 베이징에 있는 일본 백화점의 간판을 부수는 중국인들의 행태를 소개한다. 이들이 흥분하는 태도를 부각시키고 슬로우 비디오로 각인시킨다. 그리고 해설자의 멘트가 기가 막히다. "중국인들이 흥분하여 현지에 체류하고 있는 일본인이 다친다면 전적으로 중국 정부의 책임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군인위안부 문제와 난징 학살을 왜곡시킨 일본 교과서 때문에 중국인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은 스쳐 지나간다. 그러니 텔레비전을 보는 시청자는 '중국인은 그저 흥분이나 하는 야만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폭력적인 이웃 국가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위대를 강하게 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자긍심이 가득 찬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우익의 주장이 일본 국민의 가슴에 파고든다. 바로 이때 기막힌 장면이 이어진다. 대만 여당 지도자 몇 사람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는 속 터지는 장면을 곧이어 방송한다. 흥분해 있는 ‘야만적인’ 중국인과 정중하게 신사에 참배하는 '지성적인' 중국인을 비교시키는 매스컴의 기교는 탁월하기까지 하다.

나는 일본인이 정직하다는 고정관념을 오래전부터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본이라는 '국가'는 만들어진 고대사와 근세사 그리고 거짓 천황관으로 이루어진 정직하지 않은 '국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국(國)' 아래 '개(個)'가 질서대로 살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나라일 뿐이다. 매스컴과 교육을 통한 국가적 제재가 없다면 일본인은 한국인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

매스컴, 그 조작의 힘

요즘 벌어지는 일본 매스컴의 방법은 1923년 관동대진재 때 조선인을 학살했던 방법과 비슷하다. 그때 일본 정부는 교과서나 매스컴에 4년 전에 일어난 3·1운동을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테러로 거짓 부각시켰다(<민족문학사연구> 中 '1923년 9월1일, 도쿄', 2001년 12월). 그리고 요코하마와 오사카의 덴뿌라 공장 등지로 들어와 일본인의 밥그릇을 빼앗고 있는 조선인 불법 노동자들을 부각시켜, 조선인에 대한 경계와 증오심을 부추겼다. 당시 일본인에게 조선인은 돼지떼 정도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단 3일 만에 6천여 명을 죽창과 곤봉으로 죽일 수 있었을까. 80년 전의 '정치 조작'(Political manipulation)이 지금의 그것과 너무 흡사하여 혀가 내둘러진다.

다시 목사 설교로 돌아가자. 그 목사의 설교가 끝난 뒤, 일본에 있는 한국인 선교사들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는 이 목사를 초청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원죄로 말하자면 한국인도 죄가 있는 것이요, 전쟁 책임은 엄격히 말해 당시 군부 정치 체제에 있는 것이다. 일본인 백성도 한국인 백성처럼 '제국(帝國)'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가 피해자였다. 이 목사가 했던 설교의 맹점(盲點)은 '국가'와 '개인'을 구별하지 않고, 국가의 책임을 개인에게 뒤집어씌운 점이다. 우습게도 그것은 국가의 책임을 개인에게 부가시켰던 제국주의적 방법과 닮아 있다.

2차대전이 일어났을 때 시골의 순박한 농부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죽창을 들고 미군을 찔러 죽였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비슷한 면도 있다. 현재 아시아의 나라들이 일본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알고 있는 일본인은 드물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크며, 큰 만큼 크나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 청년도 드물다. 그러기에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는 일본인은 매우 귀한 것이다.

양심적 일본인이 주는 위안

그러나 일본 내에 교과서 문제, 군인위안부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선전(善戰)하는 양심적인 세력이 있다. 마치 우치무라 간조가 천황주의에 반대하여 단호히 직장에서 퇴직하고 거리의 선교사가 되었듯이,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의 곡선미를 발견하고 3·1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정부에 항의하는 글을 <요미우리>에 연재했듯이, 1920년 초 오스기 사카에가 박헌영 등을 만나 제국의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연대운동을 벌이려 했듯이, 쓰보이 시게지가 1923년 조선인 학살을 고발하는 장시를 발표했듯이(<민족문학사연구> 中 '15엔 50전―쓰보이 시게지 시(詩) 연구', 2005년 4월), 지금도 여기에는 우익 세계로 후퇴하고 있는 일본을 통탄하는 주부 학생 교사 지식인 들이 있다. 찾아보면 적지 않다. 이들에게 힘을 주고 교류해야 한다.

   
▲김응교 교수. ⓒ뉴스앤조이 신철민
내 교실에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이러한 사람의 삶을 가르치고 있다. 만세일계니, 천황이니, 거대한 거짓말에 교육받은 순하디 순한 일본인들에게 객관적인 정보를 전하고 싶다. 교실에서 교과서 문제를 토론하고, 학생들과 함께 도쿄 군인위안부 법정에도 참여해본다. 매년 학생들을 인솔하여 한국 답사 여행도 한다. 이로써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늪과 같은 땅에서 살고 있는 내 삶은 존재 의미를 얻고 있는지 모르겠다. 독도가 나에게 주는 문제는 이렇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숙제로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김응교 / 시인·와세다대학 문학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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