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자기 희생적인 세족의 제자도를 보여주다

1. 크리스천에게 못 박히다

<세 왕 이야기>의 저자, 진 에드워드는 <크리스천에게 못 박히다>에서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 처형을 부당하게 가하는 경우,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묻는다. 역사는 동일한 이념과 이상을 추구하는 이들이 그 이념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비극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상처와 아픔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 안에서 생겨난다.
앞의 세 복음서의 제자도를 간단히 요약하면, 마가는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와 임박한 종말관에 의해 철저한 순종의 제자도를 보여주었다. 마태는 구약의 정신을 계승하고 완성하는 새이스라엘인 교회는 원수마저도 용서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공동체의 제자도의 맛을 선보인다. 누가는 지금 여기서 주가 맡긴 시간과 재물의 청지기로 한없는 나눔의 삶을 사는 제자도를 요청한다. 그렇다면 요한은? 서로 사랑의 공동체, 자기 희생적인 세족의 제자도가 요한복음의 제자상이다.

2. 요한의 기독론, 하나님 아들 예수

요한은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강력한 동일성을 묘사한다. 요한은 예수의 정체를 단연코 아들이라고 규정한다. 시간조차도 존재하지 않던 아득한 역사 이전에 선재하는 로고스인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밖에는 달리 규정할 방도가 없다. 그는 태초부터 존재했기에 그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으니 생명의 원천이요, 우리처럼 창조되지 않았기에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으니 하나님인 분이다. 하나님과 하나인 분이다. 그렇다, 예수는 하나님이다.

이런 선언의 첫 번째 증거는 ‘표적’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으로부터 죽은 나사로를 살린 예수의 대표적인 일곱 가지 표적은 그가 생명의 주요, 창조자라는 것을 증거한다. 어떻게 인간이이 그리고 자연이 자연 법칙과 공식을 스스로 깨트리고 물이 포도주가 될 수 있으며, 5000명을 먹일 수 있으며, 물 위를 저벅 저벅 걸을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아담 이래 그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 죽음의 권세를 비웃고 무덤 속의 나사로를 불러내신단 말인가.

적어도 예수를 믿지 못하더라도 그가 한 일은 믿어야 하며, 그가 한 일을 믿는다면 자명하게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표적의 역할은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물질과 영혼의 강력한 이원론은 해체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이다. 우리의 사랑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이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육화하신 것처럼.

또 다른 증거는 예수의 ‘자기 선언’이다. 예수는 직접적이고도 명백하게 자기의 정체성을 공개한다. 대표적으로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등과 같은 숱한 “나는~이다”는 진술은 출애굽기 3장 14절의 하나님의 이름 “야훼”를 반영한다. 야훼는 다름 아닌 “나는 나다”라는 말이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비교하거나 자신을 입증해줄 보다 높은 공신력 있는 권위에 의지함으로 자신을 설명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누구에 견주며, 누구의 권위에 호소할건가. 그래서 야훼는 “나는 나다”라고 밖에는 달리 자시의 신성을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기 입증이 다른 피조물에 의존한다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지 않는가. 요한은 지구 한 구석이 아닌 우주 전체를 떨쳐 울리는 큰 소리로 외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3. 요한의 제자도, 서로 사랑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신앙 공동체는 반사한다. 예수를 추종하는 신자들은 그 하나 됨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신자는 자신의 이름을 구별하여 부르는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며, 자신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의 사랑을 안다. 그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는 영락없는 가지이다. 예수는 참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다. 예수 안에 우리가, 우리 안에 그분이 산다.

이렇게 요한은 신자와 예수를 강력하게 동일시한다. 예수의 고난마저 동일시된다. 하나님 예수마저도 미워하는 세상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그의 제자를 모질게 대한다. 우리의 사명도 예수의 것과 동일하다.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고, 예수는 성령을 주시며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한다. 우리는 보혜사로 인해 하나님의 계속적인 임재를 체험하며, 그분의 가르침을 통해 제자의 삶을 창조적으로 적용한다.

예수와 신자의 동일시는 사랑이다. 하나님과 예수가 그렇게도 사랑했듯이 말이다. 서로 사랑은 참 제자의 표지로 주어진다. 사랑은 마태의 원수 사랑이 아니다. 공동체 내부의 사랑이다. 요한 공동체는 기성 공동체인 유대교의 회당으로부터 저주(7:49)받고 출회(9:22)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죽임(16:2)을 당하는 자들이다.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고, 경제적으로 박탈당하고, 가족, 친구의 관계는 상실하고, 종교적 정체성은 혼돈을 거듭하고 있다. 게다가 내부의 이단 사설로 분열의 조짐마저 보인다. 외우내환에 싸인 교회를 향해 요한은 긴급하게 호소한다. 서로 사랑하라! 친구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사실 원수 사랑과 서로 사랑은 같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6) 그만큼 사랑하고 가까운 사이가 어는 순간 돌변하여 원수가 되는 것이다. 나와 관계가 먼 사람은 원수 될 가능성은 거의 제로이다. 그러니 매일 부대끼는 교회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요일 4:20). 그 사랑은 세족식에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나타나듯이 자기 희생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은 복음서와 바울서신의 십자가의 제자도와 맥을 같이한다. 자기 부인과 섬김만이 참 제자의 표지이다.

하지만 이 사랑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사랑은 오로지 내부만을 향하는 감상적인 자기 만족적 사랑은 아니다. 단연코 우리끼리의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세상을 향한 증거에 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5) 예수가 들리는 것이 온 세상을 향한 사랑이듯이, 신자의 사랑도 자기를 배척한 세상을 위한 것이다. 사랑 없는 세상에 서로 사랑한다는 그것만으로도 교회는 반문화 공동체가 되고, 세상을 심판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사랑받고 사랑할 때, 존재의 이유를 경험한다. 마음의 빗장을 잠그고 미워하는 그 순간, 그는 이미 종말의 심판을 받는다. 예수는 그 누구도 심판하지 않는다. 다만 제 스스로 화를 자초할 따름이다. 예수와 연합한 자가 누리는 종말의 충만한 생명은 그 자체가 세상에 대한 심판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내의 사랑의 강화는 세상과의 경계선과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내적으로는 공동체의 자기 보전 행위이며, 외적으로는 세상에 대한 선지자적 저항이다.

4. 평등과 연대를 향해

이 사랑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나님과의 강력한 연대의 구축과 평등한 교제의 확보이다. 전자는 예수의 아들 됨을 반영한다면, 후자는 친구 됨을 투영한다. 지면상 언급하지 않았던 예수 모습은 ‘친구’이다.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동일시와 함께 친밀한 관계의 동일시를 친구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읽을 수 있다. 예수를 따르는 모든 신자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이다. 상호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공동체에는 위계적 구조가 없는 평등이 두드러진다. 세족은 선생과 제자, 상전과 종의 관계는 역전되고 평등해진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계속 곪아가는 공동체를 치유하는 책이 요한복음이다. 보혜사 성령의 인도 하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다른 지체를 자기와 동일시하여 사랑하고, 친구처럼 평등한 교제를 나누게 될 때, 그분이 그토록 갈망해 마지않던 사랑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로 거듭나게 된다. 이제 우리가 그분의 꿈을 이루어드리자. 그 꿈의 실체를 우리 교회에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제자의 소명이자 소망이 아니겠는가.

김기현 / 부산 수정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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