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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에 복음의 능력은 존재하나요?
[243호 청년당 복상, 이십대에게 유효한가] 발행인에게 묻습니다.
[243호] 2010년 12월 22일 (수) 16:34:19 구권효 mastaqu@nate.com

최근 한국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접하다 보면 기독 청년으로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청년 사역을 대표하는 모 목사는 성추행 사건으로 교회의 도덕성을 땅에 떨어뜨렸고, 찬양 인도자 교육을 받는 몇몇 사람들은 무례하고 무분별하게도 절에서 땅 밟기 기도를 해  사회 여론으로부터 몰매를 맞았다. 이밖에도 몇 달 뒤 한반도에 전쟁이 날 것이라는 케냐의 데이비드 오워 목사의 예언, 유행가를 거꾸로 돌리면 음란한 말이 들린다는 어떤 영화 조감독의 강연, 신천지를 옹호한다며 양심 선언한 개신교 목사들의 기자회견 등 올 한해 이슈가 되었던 사건들은 한국 교회에 도덕과 상식이 존재하는가를 의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한 사람의 기독 청년으로서 마땅히 고민해야 할 거리들을 가지고 <복음과상황> 발행인, 김회권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를 만났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 복상 20주년을 맞아 복상 청년당은 '복상이 이십대에게 유효한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진다. 그 전에 한 가지, '복음의 능력이 오늘 한국 교회에 유효한지'물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해 복상 청년기자들이 발행인을 만났다. ⓒ복음과상황 김영준
기독교의 책임

1. 지금 기독교는 일명 ‘개독’이라고 불리며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옥성호 씨도 그의 책에서 “지금 우리가 받는 것은 탄압이 아니라 조롱”이라고 강하게 이야기했는데요. 무엇이 원인이라고 보십니까?

한국 기독교가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대표되기 보다는, 가짜로 입교한 니골라당,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는, 회개의 통과 의례 없는 가짜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기독교를 대표하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한국 교회가 왜 이렇게 가짜 회심을 많이 촉발시켰을까요? 그것은 한국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그 영적 지도자들이 가짜라는 증거는 어디 있습니까? 사회적으로 유력한 자들에게 종교적 권력까지 배분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은 뭡니까? 사회적으로 보수화된 사람입니다. 즉, 어떤 방법을 거쳤든지 현재 돈과 권력을 갖고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회심의 통과의례 없이 교회의 영권까지도 그들에게 할당했기 때문에 세속주의가 그대로 교회로 ‘엄몰’해 왔습니다. 쇄도해 왔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교회와 세상 사이에 구분이 없어진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개신교의 교회 정치와 존립 구조 때문입니다. 개신교는 개 교회 목사가 재정까지 통제해야만 됩니다. 공교회성이 없는 것이 문제의 뿌리입니다. 개신교는 교역자 1인이 건물도 구해야 되고, 금융도 해결해야 되고, 전도도, 상담도 해야 됩니다. 이러한 개 교회의 존립 과정에서 선한 목사들이 타락을 합니다. 개 교회 존립 과정에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은 돈입니다. 건물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돈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영적인 호의가 기울어집니다. 돈을 줄 수 있고, 돈으로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교회의 중심으로 떠오릅니다.

지금 교회는 천국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 위에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 가고 싶은 욕망이 교회를 그릇되게 만듭니다. 그 욕망이 교회의, 성직자의 종교 권력의 핵심입니다. 종교 권력이 뭡니까? 구원 독과점 업체입니다. 때문에 성직자는 아무리 타락해도,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의 윤리적 일탈은 용서됩니다. 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 구원의 문제는 성도덕보다 더 상위 개념입니다. 그래서 특정 목사가 성적으로 좀 문란해도 그런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용납 받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사회에서의 위치, 위상은 원래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의 원래 위상은 건강한 소수파 의식을 가진, 분리된 듯하면서 사회의 맏아들 의식이 많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 말은 곧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뜻입니다. 한 사회를 하나님 앞에서 계속하여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존재가 소금입니다. 사회에 역동적인 삶의 목표를 제시하면서, 사회 구성원들이 어떤 고상한 삶의 목표로 자기 인생으로 경영할 것인가를, 즉 사회 구성원들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를 제시하는 길라잡이 역할, 그것이 빛의 역할입니다. 경제성장에서 풍요를 맛 본 사람들을 나눔이 삶의 목적이 되도록 계도하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천국가려면 지상의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된다는 것을 몸으로 시범하여 보여주는 빛과 소금입니다. 건강한 소수파 의식을 가진 분리된 듯하면서도 통합된 공동체,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게 바로 빛과 소금이고, 산 위에 있는 동네입니다.

   
▲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사건을 필두로 한국 교회 목회자 성윤리 문제는 일반 사회에까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진 제공 뉴스앤조이)
2.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현재 교회에는 적용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최근 기독교계에서 벌어진 ‘봉은사 땅 밟기’, ‘전병욱 목사 성추행’, ‘조용기 목사의 아들과 국민일보의 세력 다툼’ 등은 현재 한국 기독교는 도덕성이 땅에 떨어지고 상식이 없다고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바울의 말이 지금도 유효한 것입니까? 기독교의 하나님이 과연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죄인의 자리에 서기까지, 자기의 마땅한 권리를 포기하고 부조리한 대속적 죽음의 자리를 선택하는 그 용기가 능력입니다. 다시 말해, 희생을 감수하는 능력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나의 이기심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네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첫째, 복음의 능력은 개인의 인생관을 재조정․재구성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내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소스라치게 놀라는 양심으로 깨닫고 ‘아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나의 잘못 조준된 삶의 목적을 재조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복음의 능력은 개인들을 하나님 뜻에 감미로운 복종의 연대 속에서 엮어 주는 것, 일치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회심하고 자기 죄를 인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그 복음을 깨닫고 죄 사함의 은총을 가진 개인들이 한 데 모여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복음의 능력은 이런 하나님의 성령으로 지배를 받고 성령의 감화를 받는 공동체가 세상에 널브러져 있는 죽음의 권세들을 재구성하고 재조정하고, 악한 관습들을 선한 관습으로 대체하고, 악한 법과 제도들을 타파하고, 선한 법과 관습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의 능력은, 이런 문화변혁적 사역, 한 도시의 얼굴을, 한 도시의 내면을 바꾸는 변혁을 통하여 온 생태계 안에, 모든 피조물들 안에 평화의 질서를 창조하는 능력, 즉 인간의 기득권,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이 모든 만물과 피조물의 연대 의식과 가족의식을 향유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그런데 이 유효한 복음의 능력이 왜 눈앞에 보이지 않습니까? 바로 여기에 우리의 폐부와 심장을 테스트하는 하나님의 심판,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복음의 능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상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으로 지배받는 사람들은 그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하시고, 만나게 하시고, 집합하게 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복음의 능력이 발효되고 가루 서 말에 퍼지는 누룩의 변형력을 은닉됨 가운데 일으키시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통치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것이 눈에 안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통치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알아봅니다. 그래서 신령한 것은 신령한 사람이 알아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의 능력이 과시되는 그 현장이 은닉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파편화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0장에 심장과 폐부를 시험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본문이 나옵니다. 예레미야도 그랬습니다. 자기 주변을 돌아보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너무 많았지만, 그 때 예레미야가 시험에 들지 않고 ‘심장과 폐부를 시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통치를 경험할수록 이 세상에 은닉되어있는 하나님 나라 통치의 현장을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책을 통해서도, 방송 뉴스를 통해서도, 신문을 통해서도, 일상생활을 통해서도, 내 친구와 동료와의 만남을 통해서도 나는 하나님의 통치의 현장을, 비밀스럽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 과시를 넌지시 은밀하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과연 호소력이 있겠습니까? 예. 답은 ‘완전히’ 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기독교인이 상상할 수 없는 인류의 복음입니다. 성경이 제시한 하나님은 정말 인류가 바로 알기만 하면, 그 하나님 앞에 경배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입니다. 누가, 어떻게 만민을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누가 거부하겠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이 제시한 하나님을 제대로만 알려 주면 인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달려올 것입니다. 물론 인류 안에 끝까지 죄와 죽음의 권세 안에 속박된 사람들은 저항하겠지만, 인류의 많은 사람들은 알기만 하면 돌아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은 기독교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알면 더 좋아할 하나님입니다. 제대로 전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고, 참된 신학이 공급돼야합니다. 참된 목사님이 필요하고, 참된 교회가 필요합니다.

3. 21세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라고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의심의 해석을 기반으로 모든 것을 해체하여 상대화하고 있습니다. 성경도 그 예외는 아닌데요. 현재 한국 교회가 성경이 절대 진리임을 수호할 힘이 있다고 보십니까?

의심을 통과한 확실성만이 양심의 승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의심은 사유의 가장 심원한 작용입니다. 하나님이 만일 의심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는 진리를 주셨다면 그건 하나님이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해체주의의 의심의 해석학은 미쉬나, 탈무드,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도서, 욥기, 시편 등의 저자들은 의심과 싸우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의심을 인간의 사유작용의 가장 격조 높은 한 양식으로 봅니다. 김교신은 ‘51%의 확신과 49%의 의혹과 싸우는 것이 신앙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시는 사유할 필요도 없는 태만한 안정감으로, 몽롱한 안정감으로 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철학적 사유, 왕성한 사유를 지지하고 옹호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의 국지적 실험을 옹호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 세계관의 범기독교 세계관에 전체주의적인 전일적 지배보다는, 기독교 진리의 파편적, 국지적 실험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독교가 귀납적이고 파편적이고 국지적인 현장에서 진리임을 입증시켜서, 그것들을 합하여 다시 한번 기독교의 진리성을 귀납적으로 옹호해야지, 기독교 세계관의 연역적 엄호를 받으면서 태만한 사고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벌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유의 복잡한 층위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심할수록 우리 하나님의 진리는 수정같이 맑은 확실한 진리로 각인됩니다. 우리 성경의 진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엄청난 의심을 견디고도 살아남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 리처드 도킨슨의 <만들어진 신>, 그보다 훨씬 탁월한 책이 나온다고 해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세계 최고의 진리라고 가르치는 성경을 부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불순종을 초월한다는 진리 아닙니까? 이 모든 피조물의 무질서적 상황과 대파국적인 혼돈을 하나님이 재창조하셔서 하나님 은총의 위대성과 하나님 능력의, 지혜의 전능성을 과시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인데, 이 기독교 앞에 과연 어떤 것들이 도전 세력이 될 수 있을까요? 기독교는 오히려 의심을 정당화합니다.

성경 자체는 그렇지만, 한국 교회가 그것을 수호할 능력이 있을까요?

‘현재’ 한국 교회는 수호할 힘이 없습니다. 교회는 성경이 절대 진리임을 수호할 힘이 있지만 ‘현재’ 한국 교회는, 집단명사로서의 한국 교회는 진리를 수호하는 데 역부족을 느낍니다. 교회는 거룩성과 사도적 일치성, 사도적 정통성, 보편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는 참된 하나님 말씀을 중계하는, 참된 성례전을 실행하는 정통 교회로부터 이탈했기 때문에 역부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안 되지만 교회는 됩니다. 숨어 있는, 은닉된, 고립되어 있는 순전한 한국 교회, 흩어진 12지파 같은 교회는 진리를 수호할 수 있고, 수호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이지 않는 한국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이는 한국 교회는 진리를 수호할 수 없지만, ‘invisible korean church’, 즉 보이지 않는 한국 교회는 진리를 수호할 수 있고, 현재 수호하고 있습니다. 특정 교회에서도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영락교회, 순복음교회, 사랑의교회도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긴장이 있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교회,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를 순종하는, 성령의 통치 아래 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를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를 수호합니다. 아무리 세속적인 교회를 가 봐도, 그 안에는 지고지순한, 순결한 무교병급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교회입니다. 비록 목사님은 잘못된 교리를 전파하고 윤리적으로 애매모호한 교회라 할지라도, 그런 교회마저도 새벽기도에 힘쓰고, 이웃사랑에 힘쓰는 순결한 보이지 않는 교회 소속 교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4. 초대교회는 분명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의미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그래야할 생활 방식이 있었고, 그것은 곧 소유에 욕심 부리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무력에 무력으로 맞서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한국 주류교회와는 거의 정반대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개인적 고백이 아닌 바깥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질서였다면 현재 한국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까?

초대교회는 명실(名實)이 일치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앙고백과 삶의 행동이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서구철학의 진리관 중에서 역동적 상황의 진리관이 있습니다. 명제와 사실이 일치할 때 진리라고 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진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다면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을 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것인데, 지금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앙고백, 예수가 우리의 주라는 고백을 하면서도 예수의 주권을 묵살하고 무시하고 배척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자기배반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이 아니죠.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 자칭 니골라당들,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 그런 자들이 한국교회를 대표하기 때문에 초대교회를 완전히 떠난 것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가 아닙니다. 초대교회로부터 너무 많이 이탈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2000년 교회사에서 가장 질이 나쁜 시대, 그러니까 불순물이 가장 많은 시대, 가라지가 가장 많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개신교는 개혁주의의 후예들인데, 그렇다면 다시한번 개혁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개신교의 개혁교회라는 말은 ‘항상 개혁되는 교회’입니다. 종교개혁교회의 특징은 항상 성령에 의하여 개혁되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개혁되는 교회만이 사회를 개혁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개혁된 사람만이 공동체를 개혁할 수 있고, 개혁된 공동체만이 이 사회를 개혁할 수 있고, 개혁된 인류 공동체만이 온 피조세계를 개혁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성령의 갱신능력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안타까움으로 소리를 칠 수는 있지만, 우리의 오래 묵은 터를, 이 낡은 구조물을 해체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일방적이고 주권적인 은혜 사역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에 쓰임받기 위해서 열망은 할 수 있죠. 열망은 내가 할 수 있지만, 변화는 못 시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열망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한국 사회를 진짜 바꾸고 싶은 열망이 있으면 성령은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열망이 없는 거죠.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입니다.

기독청년의 책임

5. 사회에서는 교회에 대한 비판이 거세고 날카로워지고 있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기독청년들은 점점 더 사회에 관심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 교회와 관련된 큰 사건들(전병욱 목사 성추행 사건, 봉은사 땅 밟기 사건)이 있었음에도 교회에서는 이런 것들에 대한 언급도 별로 없고, 사태의 심각성은 당연히 모르고, 성경적인 대답을 찾으려는 청년들은 더더욱 없습니다. 무엇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항상 어느 시대건 진지한 청년은 일정한 비율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래도 나는 낙심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불가해한 섭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온 인류를 살릴 때 한사람의 순종만 필요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이 인류를 살렸습니다. 소돔 성을 구하는 데 열 명만 있으면 됐습니다. 그러니까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소수가 아닙니다. 소수가 아니라 항상 일정한 비율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소수지만 당신의 뜻에 누적된 순종, 심화된 순종을 바치는 종들을 통해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청년들이 점점 사회에 관심이 없어지는 가장 큰 원인은 인생의 고단한 짐을 개별적으로 지라고 요구하는 시대 문화입니다. 지금은 인생의 고단한 문제인 대학이나 취업, 결혼 등을 개별적으로 해결하라고 요구하는 개별화의 압력 시대입니다. 이것은 부정적 실존주의입니다. 인생은 혼자 살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나쁜 의미의 실존주의입니다. 나쁜 의미의 실존주의가 청년들에게 있기 때문에 사랑, 공동체, 우정 등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인생의 짐은 내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광장으로 나가지 못하고 밀실로 다시 퇴행하는 거죠. 이 밀실적인 퇴행, 밀실로 다시 철수하는 것, 역사의 광장인 아고라나 아크로폴리스로 나가지 못하고 다시 밀실로 돌아와서 나 혼자 내 인생의 고난과 불안과 염려와 고단한 난제들을 돌파하려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별화 압력시대죠. 저는 이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언론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청년 실업 문제도 많이 나오고, 스펙 쌓기 등 언론이 계속 부추기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부정적 실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교회나 유사한 교회들이 공동체적인 협력으로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아있는 시범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기독청년들이 귀농하여 농장을 일궈서 먹고 사는 것, 공동 창업을 하는 것, 다른 공동체를 위해서 십일조 등을 모아 그들에게 실업수당 같은 것을 주면서, 소득의 형평을 기하는 운동, 즉 함께 살아가는 것을 총체적으로 보여 줘야 합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는 것을 총체적으로 보여 주려면 일단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도시형 공동체, 수도원적 공동체, 농촌형 공동체, 노동 공동체, 인쇄업, 가구업, 수예 기타 등등. 아미쉬 마을 같은 곳을 보면 다양한 직업군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공연기획 같은 것도 할 수 있고요. 즉 ‘우정이 밥 먹여 주냐’에 대한 답이 ‘예. 우정이 밥 먹여 줍니다’ 이런 정도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건 아주 상상력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교회를 다닌다는 것 자체는 공동체적 투신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다니면 십일조를 내니까 내가 소득이 얼마인가를 신고하는 셈이 됩니다. 자기가 소득이 얼마인지를 신고할 정도면 그 이상 숨길게 없다는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서 10만 원씩 십일조 하는 사람이 100명만 되면 1000만 원이 되고, 1년이면 1억 2천만 원이 됩니다. 1억 2천만 원이면 창업이 가능합니다. 김밥집, 라면집 가능합니다. 이거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왜 안 됩니까? 나는 교회가 하나 생길 때마다 교회 앞에 청년들 벤처 김밥집 하나 세울 수 있다고 봅니다. 한 300명 정도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라면, 그 앞에 식당 하나 완전히 창업 가능합니다. 왜 안 됩니까? 됩니다. 300명 정도 모이는 교회, 그 300명 교인들의 식사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근교의 농업 공동체도 가능합니다. 300명 되는 교회에 헌금이 쌓이면 한 10명 정도의 농부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돈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농부들은 교회가 제공하는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교회가 관리하는 농사를 짓는 수도원적 농부들 아닙니까? 그러면 농부들에게 일정한 생활비를 주고 우리는 그들의 농산물을 사 먹는 거죠. 가능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교회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사랑과 돌봄의 공동체입니다. 성만찬과 십일조, 이런 것들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는 기가 막힌 제도죠. 내가 예전에 목회하던 교회는 어른 교인 400명인데 예산이 7억입니다. 엄청난 돈 아닙니까? 공동체, 얼마든지 할 수 있죠.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공동체를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매개물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6. 지난 6월, 케냐의 데이비드 오워라는 목서가 방한 중 한 예언이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항간에는 연평도 사건이 이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지난 9월에는 국내의 한 선교사가 유행가 가사를 거꾸로 돌리면(백워드 매스킹) 음란한 말들이 나온다고 설교하여 네티즌들을 황당하게 했습니다. 10월에는 개신교 목사들이 양심선언을 한다고 하면서 신천지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정말 문제는 이런 크고 작은 상황 속에서 무엇이 성경적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능력이 기독청년들에게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구체적인 대안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독교의 건전한 교리에 정통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열매를 보고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신천지는 열매가 나쁘지 않습니까? 신천지는 반사회적 반윤리적, 또 신비주의적 직통계시, 개인을 메시아로 숭배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벌써 상당히 탈선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 자체는 악하니까 성경으로 읽으면 압니다. 데이비드 오워 목사 이야기도 성경 읽으면, 일반적인 성경의 원칙에 맞다면, 다 용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청년들이 다른 것보다도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성경의 중요성은 알겠는데, 무작정 읽는 것이 도움이 됩니까?

무작정이라도 읽어야 합니다. 무작정 읽는 것을 통독이라고 합니다. 통독은 뜻이 깨달아지는 것부터 읽으면 됩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지 말고, 깨달아 지는 것 중심으로 메모하면서, 그렇게 몇 번씩 읽고 나면 다 깨달아 집니다. 저는 성경 통독과 성경 묵상 둘 다 조화롭게 균형 잡힌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창세기부터 읽는 것이 가장 좋지만, 아무데나 읽으십시오. backward도 가능하고 forward도 가능합니다. 뒤를 읽다가 궁금하면 앞으로 가게 됩니다. 나는 창세기가 제일 낫다고 봅니다. 그 다음 마태복음부터. 그러나 문제는 ‘다 깨닫지도 못하는데 읽으면 뭐해?’라는 회의가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 깨닫지 못해도 읽으면 충분히 보상할 만큼의 깨달음은 옵니다. 그 수준에 맞게, 자기 삶의 고민에 맞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히브리서 4장 12~13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난 청년들이 그것을 맛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청년들이 성경을 바로 읽어야 합니다. 특히 방학 때 성경 통독하는 것, 좋다고 봅니다. 성경이 바로 바른 가르침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잘 가르치는 바른 개인, 바른 공동체, 바른 교회가 있다면 금상첨화겠죠.

7. 교회를 다니는 청년들 중에는 위 질문과 같이 사회에 관심 없이 그저 교회 생활 열심히 하는 온실 속에 화초(?)같은 청년들이 대부분입니다. 반면에 사회 문제에 대한 고민 때문에 바르게 정립된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지 않고 무작정 사회 운동을 하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기독청년들의 신앙생활이라는 것도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청년과 사회 문제에 무작정 사회 운동을 시도하는 청년이 있는데, 이 중에서 더 나은 것은 무작정이지만 사회 운동을 해보는 청년이 좀 더 유리합니다. 이런 청년들이 좀 더 진정한 성경적 사회 운동에 접근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온실 속에 화초 같은 청년들은  톨스토이적인 회심이 필요합니다. 톨스토이는 50세 때, 문학적 성공의 정점에서 모스크바 빈민가를 바라보면서 충격을 받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자기 아버지의 대저택의 지하에서 방직물을 직조하던 그 빈민들을 보면서 완전히 회심했습니다. 사회 문제에 회심을 하려면 극단적인 빈민을 만나 보거나, 기아를 경험해 보거나, 그런 어떤 고난의 현장에 가 보고 나면 많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성경적 세계관이 안 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상당히 갖추어져 있는데, 더 자기 확신적으로 하려면 학습이 필요하고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field experience’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결국 청년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겠습니까?

첫째는 성경의 구원사에 정통한 숙지입니다. 둘째는 성경에 나오는 숱한 사회 참여의 사례에 대한 정통한 숙지, 셋째는 교회사에 나타난 사회 참여의 다양한 사례의 숙지,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다양한 사회 참여의 사례의 숙지입니다. 이런 것을 먼저 한 후에 관심 영역에 따라서 촛불 시위에 가볼 수도 있고, 낙동강 상수원 보호 운동에 가볼 수 있고, 단기선교를 갈 수도 있고, 아니면 캠퍼스 미니스트리 간사가 돼 볼 수도 있고, 기아 체험에 가볼 수 있고, 이런 다양한 경험을 통하여 현장 감각을 익히면 세계관이 나옵니다.

8. 2010년을 사는 지금, 한국 기독청년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명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역사의식이 필요합니다. 역사의식은 세 가지 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목적과 성취가 일어나는 현장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이해, 즉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과정에서 역사가 필요하다는 의식입니다. 두 번째 역사는 진보한다. 역사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간다는 의식입니다. 세 번째 역사를 통해 나의 삶에 좌표를 정하는 것,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역사가 나에게 남겨 준 미완의 과업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2010년의 시대를 맞이한 여러분에게는 분단 체제를 해소하라는 과업이 떨어졌습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민족의 독립,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원시적인 목표를 받았습니다. 저의 시대에는 민주화를 이루라는 과업이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대학 4년 내내 민주화의 제단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생태계와 함께 가는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 선진국으로 들어가는 과업들을 받았습니다. 선진국으로 들어가려면 사회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인권이 확립되어야 하고 빈부격차가 해소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나눔의 가치를 구현하는 시대가 바로 여러분의 시대입니다. 그 나눔의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이 바로 통일입니다. 가난한 북한 동포와 우리 삶의 행복을 나누는 것이 바로 통일 아닙니까? 그러니까 통일과 나눔은 같은 겁니다. 우리 세대는 우리나라의 민주화만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미얀마의 민주화, 라오스의 민주화, 동북아시아의 평화,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하는 범국제적인 시대의 과업이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미완의 과업에 대한 부채의식, 책임감, 이런 역사의식이 있어야만 여러분이 쓰임받습니다.

이러한 역사의식의 근거는 출애굽기 3장 6절, 14절, 6장 3절에 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나타났습니다.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400년 전부터 계속된 역사에 대한 부채 의식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미완의 과업에 대한 이해를 갖는 모세에게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지 않습니까? 바로 이 역사의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줍니다. 다윗이 12지파 시대 때, 지리멸렬한 12지파의 상잔과 갈등의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다윗에게 12지파를 통일하는 역사의식이 나왔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36절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윗 시대 때 미완의 과업에 눈뜨고 예리하게 깨어있는 사람에게 그 다음 역사를 창조하는 과업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분단 문제와 생태계 문제, 경제 성장을 넘어서 풍요를 넘어서 나눔의 문제, 공생의 문제, 전지구적, 범지구적, 아시아적 평화 문제를 고민해야만 모세 같은 지도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기독청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까?

수도원적 경건과 축제적 여흥이 조화된 삶이 좋다고 봅니다. 즉 즐거운 삶과 수도원적 절제가 같이 가는 삶,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진지한 성경공부 좋아요. 예배 좋습니다. 그 다음 또 친구들과의 교제 좋아요. 연애도 좋아요. 다 해야 합니다. 연애가 왜 필요합니까? 연애는 내 안에 있는 욕정을 다스리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 욕정이 한 사람의 사랑으로 열매를 맺으면 책임감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20대 때 애인이 없고, 성숙할만한 사랑이 없으면 계속 정욕이 차오르지만, 해결할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정욕을 다스릴 방법은 뭡니까? 책임 있는 사랑과 연애를 해야 합니다. 다수의 욕정의 사랑이 아니라 고도의 책임감으로 승화된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니까 연애를 해야 합니다. 연애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시간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연애해야 될 사람이 하루 종일 성경만 공부하고 찬송가만 부르면 안 되겠죠. 조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세상 친구들과도 어울릴 수 있어야겠죠. 수도사적 자기 경건과 함께, 자기 생활도 하고, 여유있게 남들과 친교도 해야 합니다.

9.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이 너무 위대하시고 사랑이 많으셔서 우리 인간의 죄와 연약성과 실패를 이기신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 성경과 기독교 신앙입니다. 다른 어떤 책도 이런 책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질서의 선함을 인정하면서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의 운명에 이토록 관심을 갖는 책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과 성경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말고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은 온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종교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성경은 기독교를 훨씬 넘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주 초라하게 대표하는 현실이 우리 기독교입니다. 성경과 하나님은 우리 기독교보다 훨씬 넓은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100% represent, identify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옹졸한 이해보다 훨씬 크십니다. 만약 기독교가 하나님 자체와 동일시된다면, 그 말의 의미는 ‘내가 깨달은 하나님이 다다’라는 오만한 주장과 같습니다. 참된 기독교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부분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고린도전서 13장 바울과 같은 태도입니다. 내가 부분적으로 안다. 그러나 나는 부분적으로 알지만, 사랑의 최고 가치를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데 내 일생을 바치겠다. 이것이 기독교의 태도 아닙니까?

나는 이렇게 멋진 기독교 외에는 다른 기독교를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멋진 하나님,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 내가 경배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하나님을 나는 상상을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늘 감격 속에서 예배하며 삽니다. 하나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기독교 신앙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기독교 신앙의 확실성에 이르기까지 의심의 불모지를 지난다고 해도 나는 정죄하지 않고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글 구권효 청년기자 mastaqu@nate.com
사진 김영준 청년기자 zilzoo8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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