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호 메시아 예수의 복음 26] 마가복음 14장 43절 ~15장 15절

체포되시는 예수 (14:43~52)

마가복음 14장 43절~15장 15절은 예수께서 대제사장에게 심문당하시고 로마 총독에게 재판받으신 내용을 담고 있다. 마가복음 14장 43~72절은 예수께서 대제사장이 인도하는 공의회의 심문에서 하나님을 모독하였으므로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죄받은 내용을 전하며, 15장 1~15절은 로마 총독의 재판에서 십자가형을 선고받는 과정을 기록한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를 체포하러 왔을 때, 예수께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시고 성경 말씀이 성취되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체포에 협조하신다(14:49).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달아난다(14:50). 한 청년이 예수를 따라갔지만, 잡히자 벗은 몸으로 도망한다(14:52).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 속에서 제자들과 함께 사역하셨지만, 고난의 길을 갈 때에는 혼자 외롭게 가셔야 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면 이처럼 외롭게 고난을 겪을 각오를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의 칭찬과 격려 속에서 영웅처럼 고난당하는 게 아니라 가까운 동료까지 버리고 떠난 가운데 혼자 남아서 쓸쓸하게 고난을 겪을 수 있다. 배신당하고 고독하게 겪는 고난은 더욱더 견디기 어렵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먼저 그 길을 가셨다. 이 외로운 길은 아무도 없는 길이 아니라 예수가 계신 길이다.

심문받으시는 예수 (14:53~65)

대제사장은 자기 집에서 공회원들을 불러 놓고 예수를 심문한다. 그러나 정죄할 증언을 얻지 못하자 예수께 직접 질문한다.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14:61) ‘찬송받을 이’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으려고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은 유대인들이 사용한 메시아 칭호로서 ‘그리스도’와 같은 뜻이다. 쿰란 문헌 4Q246은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말한다. 대제사장은 예수께 메시아냐고 질문했다. 대제사장이 이러한 질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1세기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가 오면 성전을 다시 세운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예수께서 성전을 짓는다고 말씀하셨다는 증언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예수께서는 긍정하시는 답변을 하신다. “내가 그니라”(62절). 예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시인하신다.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예수의 대답을 듣고 신성을 모독했다고 결론 내린다(64절). 그러나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발언일 수 없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단지 사람 중의 하나라고 간주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말은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이다(62절).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다니엘 7장 13~14절에 나오는 하늘 구름을 타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존재로서의 메시아로 소개한다. 다니엘 7장 13~14절은 다음과 같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여기서 언급된 인자(사람) 같은 이는 사람처럼 보일 뿐이며 사실 신적인 존재이다. 이렇게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높이는 언사를 신성모독에 해당한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한 듯하다.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은 시편 110편 1절을 연상하게 한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여기에서 ‘주’는 예수께서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하셨다(막 12:35~37). 그러므로 예수께서 권능자의 우편에 앉는다고 말씀하실 때 자신이 메시아로서 다윗의 주이며,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다고 보신다. 대제사장은 예수께서 스스로 하나님의 우편까지 높였다고 생각하고 이것도 신성모독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예수께서 시편 110편 1절을 자신에게 적용하였다면 예수의 원수들은 이 말씀에 따라 예수의 발판이 된다. 지금 대제사장은 예수의 원수로서 예수를 심문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예수의 발판이 되도록 심판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이란 표현으로 이러한 암시를 주고 있음을 알고 대제사장은 화가 났다. 대제사장은 옷을 찢는다. 유대인들의 문헌인 <미쉬나>에 의하면 이것은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들었을 때 보여야 하는 반응이다. 이어서 공회원들이 신성모독에 해당한다고 동의한다. 레위기 24장 16절에 의하면 신성모독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므로 공회원들은 예수를 사형에 처할 자로 정죄한다. 그리하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할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이 성취된다(막 8:31; 10:33 참조).

예수께서는 메시아라고 시인하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신성모독으로 정죄될 위험을 감수하시며 자신을 다니엘서에 언급된 인자로 신적인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우편에 앉을 신적인 존재라고 주장하셨다. 이렇게 주장하시지 않았다면 공의회가 예수를 정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의회의 정죄가 없었다면 예수께서 로마인들에 의해 처형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로마군의 손에 넘겨져 처형당하셨다. 예수께서 자신을 신적인 메시아라고 고백했기 때문에 발생한 실제 사건이다. 이러한 신앙 고백이 예수의 주장 없이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도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 (14:66~72)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지만, 베드로는 멀찍이서 예수를 따라갔다(14:54). 그는 대제사장의 집 아랫 뜰에서 불을 쬐고 있다가 그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는 여종에게 예수를 부인하는 말을 한다(14:68). 앞뜰에서도 그 여종이 다시 베드로를 보고 예수의 도당이라고 말하자 또 부인한다(14:70). 조금 후에 곁에 있는 사람이 베드로에게 그가 갈릴리 사람이기에 예수의 도당이라고 말하자, 또다시 강력하게 부인한다(14:71). 닭이 두 번째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통곡하였다.

베드로의 모습은 예수를 따르다가 실패하는 우리의 모습과 같다. 연약한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한 후에 통곡했다. 우리도 예수 따르기에 실패할 때 최소한 슬피 통곡함이 있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 은혜만 강조하고 자기 십자가 지기를 거부하면서 애통함이나 통곡함이 없다면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보다 실패하는 자리에 빠지는 것이다.

빌라도의 재판 (15:1~15)

대제사장들은 새벽에 공의회를 연다. <미쉬나(m. Sanh. 4:1)>에 의하면 명절에는 재판할 수 없었고, 하루 만에 사형 판결을 내릴 수도 없었다. 또한 대제사장 집에서 재판을 열 수도 없었다. 만일 예수 시대에 이러한 규범이 적용되고 있었다면, 새벽에 다시 공의회를 소집한 이유는 좀 더 공식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공식적인 재판이 아니라 빌라도에게 넘기기 위해 고소하기로 하는 정도의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쉬나>에 의하면 하루 만에 사형 판결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재판을 맡은 빌라도가 예수께 질문한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질문은 공의회가 예수의 죄목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정하여 고소했음을 암시한다. “유대인의 왕”은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로마법에 따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할 수 있는 죄목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간접 통치하에 놓여 있었고, ‘유대인의 왕’은 유대인들의 반로마 독립운동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용어였기 때문이다. 요세푸스는 반로마 폭도의 지도자를 대개 ‘왕’이라 불렀음을 언급한다(Antiquity 17.285). 이러한 인물은 반로마 역도로서 정치범에 해당하므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 있었다. 대제사장과 예루살렘 공의회가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소한 이유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 반로마 독립운동을 이끈 적은 없다. 그렇다면 대제사장은 무슨 근거로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소했을까? 심문 과정에서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시인한 사실에 토대하여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란 군사적 메시아이며, 군사적 메시아란 마땅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면 유대인을 지배하는 로마에 대항해서 군사력을 사용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인물을 로마 사람인 빌라도가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한 호칭이 바로 “유대인의 왕”이다.

사도행전 4:1~22; 5:17~42; 7:55이하; 26:10~11 등을 볼 때, 공의회에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있었다. 그런데 왜 대제사장은 예수를 신성모독죄를 범한 종교범으로 몰아 돌로 치는 대신 반로마 정치범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자 했을까? 대제사장의 입장에서 이스라엘 회복을 위한 지도자를 로마 총독에게 고소해서 죽이는 행위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스스로 친로마파이며 식민통치의 앞잡이임을 고백하는 행동이다. 차라리 종교지도자로서 신성모독죄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편이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무리가 두려웠을지 모른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예수를 종교범으로 처형하고 나면 반발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로마 총독의 손을 빌려 예수를 죽이는 길을 택했다. 자기들의 메시아를 고발하여 죽이는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십자가형은 죄수를 나무에 달아 죽이는 형벌이었기에, 나무에 달린 자는 율법(신 21:23)에 의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므로 예수를 저주받은 자라고 선언할 수 있는 처형 방법이었다. 그는 이렇게 하여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좌절시키고 예수 운동을 소멸시키고자 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쉬 레게이스”, 즉 “네가 말하고 있다”라고 대답하신다. “네가 말하고 있다”는 말은 문맥상 긍정으로 볼 수 없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대제사장들이 집요하게 고발하였기 때문이다(3절). 만일 예수께서 로마 총독이 생각하는 대로 군사적인 유대인의 왕임을 시인하셨다면, 대제사장들이 더 이상 집요하게 고발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죄목을 시인한 이상 빌라도도 더 이상 심문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쉬 레게이스”는 “너는 그렇게 말하고 있으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용어에 군사적 의미를 담아서 말하지만, 예수께서는 메시아로서 분명히 유대인의 왕이지만 군사적 의미의 유대인의 왕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의 고소를 믿지 않았다. 그는 대제사장들이 시기 때문에 예수를 고소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10절). 그는 예수께서 반로마 무장투쟁을 한 적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13~14절). 그럼에도 그는 예수의 무죄를 선언하지 않는다. 대신 바라바와 예수 중 한 명을 선택하도록 하여 석방하려 한다. 왜 그랬을까? 그가 예수를 무죄 판결하면, 전례에 따라 죄수 바라바를 석방해야 하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바라바를 풀어 주기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와 바라바 중에서 한 명을 택하도록 했고, 인기가 더 높은 예수를 무리가 택하리라고 예측했을 것이다. 하지만 빌라도는 이러한 정치적 꼼수를 부리다가 결국 무죄한 예수를 죽이는 잘못을 범했다. 당일 아침에 모인 무리는 바라바를 지지하는 자들이었고(7~8절), 더구나 대제사장들이 바라바를 택하도록 충동질하였으므로 결국 무리는 바라바를 택하였다. 빌라도는 바라바를 죽이려는 정치적 꼼수에 실패하자 무리의 요구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는 정치적 행동을 한다. 그는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잘못을 범했다. 그가 고려한 바는 예수를 죽여 반로마 폭동의 위험을 없애거나, 무리를 만족시켜서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지 않는 일뿐이었다.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유대인들의 최고 종교지도자인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이 죽였다. 그 직접적인 책임은 대제사장에게 있고, 로마 총독은 자신의 정치적 술수를 따라 행동하다가 대제사장의 뜻대로 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누가 예수를 죽이고 있는가? 역시 교회의 최고지도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그 대표회장이 세속 정권과 결탁하여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고 예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나님보다는 권력을 택하기 때문이다. 좀 더 권력을 누리고자 금권선거를 통해서라도 대표회장직을 차지하고 세속 권력과 야합하여 특권을 누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의 머리인 예수를 교회로부터 몰아내고 자기들이 교회의 대표이며 머리인 양 행세해 왔다. 교권도 부족하여 정권까지 움직여 특권을 향유하려고 하는 한기총의 종교 지도자들이야말로 빌라도와 정권을 이용하여 예수를 죽인 어용 종교지도자였던 대제사장과 너무도 흡사하다. 심판의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 돌이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성전을 심판하셨듯이 한기총도 심판하실 것이다.

구독안내

이 기사는 유료회원만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 온라인구독 회원은 로그인을 해주시고 인증 절차를 거치면 유료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월 1만 원 이상), 온라인구독(1년 5만 원) 회원이 아니시면 이번 기회에 〈복음과상황〉을 후원, 구독 해보세요.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