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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경건한 생각>
[266호 서평] 다윈을 통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법
[266호] 2012년 12월 27일 (목) 14:50:20 이원석 dkdndn2@naver.com

   
극단에서 근본으로

다윈의 경건한(pious) 생각이라. 책의 제목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 혹자는 다윗(David)의 경건한 생각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실은 다윈(Darwin)의 불경한(impious) 생각이라고 해야 맞지 않나. 혹은 데니얼 데넷의 지적대로 위험한 생각이라고 하든지 말이다. 다윈의 생각은 생물학의 영역을 넘어 다른 모든 영역을 부식시키는 궁극의 산(acid)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기괴한 제목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인가. 더욱이 이런 기괴한 책을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슬라보예 지젝이 추천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이는 <다윈의 경건한 생각>이 현대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두 근본주의를 효과적으로 공박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 양자에 있어서 피상(적 수준)에서 배회하는 근본주의를 공격하고, 근본(적 수준)으로 돌아가 대화를 시도한다. 그가 보기에 극단적 다윈주의자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닮았다. 그들은 본질주의를 공유하며, 진실을 바라보는 이러한 입장이 실존을 대하는 방식을 지배해 왔다. 그들은 ‘불경한 동맹’을 맺고 다윈의 이론을 오용하고, 남용하고, 악용한다. 저자는 이들로 인해 확산된 오해들을 바로잡고자 한다.

다윈주의자들 가운데 이 책이 구체적으로 겨냥하는 과녁은 리처드 도킨스 류의 반종교(반기독교)적 진화론이다. 진화론 자체가 아니라 진화론을 차용한 종교(기독교) 공격에 비판의 화살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진화론 자체는 공격의 대상이 아닐뿐더러 외려 대화의 상대로 상정된다. 대화의 전제는 경청이다. 저자는 진화론에 대해 기본부터 차근차근 설명을 해 나간다. 가끔씩 재기에 빛나는 장난을 치면서 말이다(그러므로 뇌의 지식량보다 팔의 근육량을 더 많이 늘려줄 것만 같은, 830여 쪽에 달하는 이 괴물 앞에서 부디 쫄지 마시길).

다윈과 신다윈주의

책은 다윈에서 시작한다. 다윈은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을 다윈주의에 적용했다. 자연선택은 생존 투쟁의 경제에서 승자를 택하고 패자를 버린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손은 기나긴 역사 안에 흔적을 남긴다. 비록 오랜 지질학적 시대 안에서 변화의 과정을 온전히 파악하기에는 우리의 시야가 좁지만, 실재하는 것은 오직 변이(변화) 뿐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형상은 평균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다윈은 본질주의를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변화가 이상적 상태이다.

그러나 변이가 적응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외려 변이된 개체들이 번식할 때에, 종은 비로소 환경에 적응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종은 불세례(자연선택)를 거치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자연에 설계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는 모두 소급적(사후적)인 재구성일 뿐이다. 사건이 발생한 후에야 개념이 생성될 뿐이다. 다윈이 말하는 것은 최고 적자의 생존이 아니라, 비교 적자의 생존이다. 그러므로 생존 투쟁은 상대적이며, 지속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다윈 이론의 후계자들은 다윈이 신다윈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다윈을 몰아세웠다. 다윈주의자들은 환원주의적인 19세기의 원자론적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 많은 이들이 진화를 고정된 사건으로 받아들이지만, 진화 자체도 진화한다. 그리고 자연선택은 결코 통계적 현상이 아니라 창발적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다. 생명체와 생명은 서로를 구성하면서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 현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자론적 사고에 기초하는 환원론적 방법을 포기해야 한다.

정말 요구되는 관점은 창발적이고 시스템적인 것이다. 애초에 그 설명 대상이 생명이기에 다윈의 진화 이론은 존재(Be)의 이론이 아니라 생성(Being)의 이론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의 현상과 이론도 진행의 대상이며, 따라서 변화와 확장을 거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신다윈주의자들은 진화 이론을 정태(靜態)적으로 대한다. 그리고 이에 비추어 인간을 해석하려 한다. 가령 사회다윈주의, 사회생물학,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킨스 류의 진화 심리학이 문제이다.

다윈과 극단적 다윈주의자

코너 커닝햄에 따르면, 극단적 다윈주의는 철저하게 근본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이다. 외려 그들은 진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가령 1970년대의 사회생물학의 확장판인 진화 심리학에 의하면, 우리는 아직도 원시 자연(조상-ancestral- 환경 혹은 진화 적응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원시인의 마음이 살고 있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결정은 본질적으로 원시시대, 특히 홍적세1)에서의 자연(아프리카 사바나)과의 조우로 말미암은 것이다.

도킨스와 그의 동료에 따르면, 당시의 환경 속에서 유전자가 자신의 확대재생산을 위해 택한 전략이 지금까지 작동한다. 원시의 진화 적응 환경에서 특정한 특성이 선택된 후에 비록 환경은 바뀌어도 그 특성은 그대로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를 말한다. 우리는 유전자를 실어 나르는 담지자이며 숙주일 뿐이다. 그런데 DNA는 세상에 무관심하며, 선악을 모른다. 그저 자기 자신(의 확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윤리는 사실상 번식에 기여하도록 배치된 적응에 불과할 따름이다.

여기에는 극단의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으며, 순수하게 자연의 요소만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상정하는 순수한 다윈주의적 세계는 허구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작동하는 순수한 다윈주의)를 고수한다면 우리는 모두 네안데르탈인으로 퇴화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돌도끼를 들고 야생 환경 속에서 ‘우가우가’하고 있어야만 한다(도킨스 식의 만능 다윈주의는 다윈주의 자체를 반박하고, 진화 또한 무효화해 버리고 만다). 진화 서사는 하나의 신화가 되고 말았다.

실상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자연과 문화의 복합체이다. 문화가 없다면 인간은 정상적으로 살 수가 없다. 그렇기에 자연에 기울어진 유전자 결정론도 부당하다(그렇다고 양육의 절대적 영향력을 강조하는 빈 서판 이론이 온당한 것도 아니다). 애초에 생명체만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도 생명체에 적응한다. 또한 환경도 진화하며, 따라서 문화의 출현도 진화의 결과이다. 하지만 극단적 진화주의는 사실상 진화를 부정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파괴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윈과 기독교 근본주의자

저자 커닝햄에 따르면, 과학과 종교의 투쟁은 허구적 설정이다. 그 투쟁은 근본주의적 과학과 근본주의적 종교의 관념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도킨스 등이 상정하는 적은 창조 과학이다. 그러나 창조 과학은 역사 안에서 간막극에 불과할 뿐이다(초대교회의 교부들부터가 우리 시대의 진화에 유사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윈 근본주의자들은 이것이 종교(기독교)의 본질적인 입장인 양 다룬다.

도킨스는 이에 맞서서 종교 역시 과학적 평가의 대상으로 설정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외려 지적설계론자야말로 그들의 라이벌이자 동지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도킨스가 말하는 의심하는 도마를 따르는 종교적 후계자이다. 지적설계론은 신다윈주의의 핵심인 무작위 돌연변이 개념을 반박할 뿐, 과학 지식에 근본적으로 반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목표는 그저 과학 안에 목적과 설계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뿐이다.

지적설계론자들은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등을 통해 그들은 자연선택이 모든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하지만 설혹 그들의 시도가 성공하더라도 이것은 현재 과학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다. 현재의 과학은 언제나 불충분하게 마련이다. 과학 이론의 빈틈에 대한 비판이 지적설계론의 지지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지적설계론은 과학이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과학을 진리 판단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으면서 과학주의의 덫에 걸렸다.

더욱이 지적설계론은 과학적 설명에 공헌하는 바는 없으면서 신학적 관점으로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신 개념을 잠재적으로 제한해 버리기 때문이다. 지적설계의 신, 즉 설계자는 우리의 예배를 받기에 부족하다. 이 신은 그저 ‘자연의’ 신일뿐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보다는 차라리 호메로스의 신에 더 가까울 게다. 오언 깅그리치는 묻는다. “신학자가 감히 설계를 믿어도 될까?” 페일리의 설계자로서의 신 개념이 신학에 유해한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결과적으로 보면, 극단적 다윈주의와 마찬가지로 지적설계론도 틈새의 악마라는 정죄를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양자 모두 과학의 현재를 기반으로 형이상학적 관점을 추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생물계의 미완성된 모습 안에서 신의 부재를 읽어 낸다. 지적설계론자는 현재의 과학이 부족해서 생물계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면서 설계자의 존재로 귀결한다. 악마는 틈새에 서식한다.

다윈과 기독교

“진화는 오늘날 가장 긴급한 사안이다.” 과학은 우리 시대의 종교이며, 진화는 과학의 중심이다. 혹은 과학의 꽃이라 해도 무방하다. 나아가 뜨거운 감자이다. 밖으로는 기존 종교와의 투쟁을, 안으로는 정통과 이단 논쟁을 진행하고 있다. 진화에 대한 이해는 우리 시대의 정신세계 안에서 교회(의 기독 지성인)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과업이다. 과학과 종교 혹은 -좀 더 분명하게 표현하자면- 다윈과 기독교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다윈과 기독교. ‘와/과’라는 병렬 접속사는 얼마든지 다양한 관계를 엮어낼 수 있다. 다윗과 골리앗처럼 대립 관계에도 사용되고, 다윗과 요나단처럼 우정 관계에도 활용된다. 그렇다면 다윈과 기독교일 때에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다윈은 양가적이다. 어떤 기독교인에게는 위험하다. 바로 창조 과학을 믿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믿음은 교회사 안에서 찰나적인 것이다.

우리는 외려 다윈의 생각(진화론)이 얼마나 경건한 생각인지를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다윈 자신이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는 <종의 기원>에서 진화(evolution)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외려 피조물(creation) 혹은 그와 동일한 어원을 가진 단어를 수백 번 기록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지성)은 우주의 궁극 원인으로서의 지성적 존재를 닮았다. 눈먼 우연에서 인간이 탄생했다고 믿지 않는 그는 스스로를 유신론자라고 인정한다.

애초에 다윈 이론은 성서의 가르침을 반박하지 않는다(유신론과 충돌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성서가 우주의 기원과 형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적은 과학적 탐구 결과를 제시하는 데에 있지 않고, 우주와 하나님으로 더불어 어떻게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소개하는 데에 있다. 흥미롭게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에 대한 해석은 분명 진화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해석도 마찬 가지다. 

하지만 초대 교부의 이런 해석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비신자가 우리를 멸시하게 만드는 성서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로 우리를 멸시하는 것을 넘어서 성서에 대한 믿음과 하늘에 대한 소망을 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창조론적 성서 해석은 교회를 멸시의 대상으로 만들고, 복음을 가로막는 심각한 잘못이다. 창조론의 주장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창조와 구속, 그리고 그리스도

기독교는 창조가 아직 종결되지 않고, 지속된다고 말한다. 창조는 그리스도를 향한다. 또한 창조는 구속과 분리될 수 없다(마치 자연과 은총이 분리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자신을 세우려 할 때에, 인간은 없다. 독립적 인간이 존재하지 않듯이 순수한 자연도 없다. 자연은 은총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연과 은총이 만나고, 창조와 구속이 하나 된다. 성례전이 중요한 것은 이것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은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삶의 구원이다. 이는 창조론자의 앙상한 신학과 극단적 다윈주의자의 삭막한 무(無)신학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신비이다. 이들의 세계에는 모든 생명이 참여하는 우주적 예전인 그리스도가 있을 자리가 없다. 그들의 뼈만 남은 앙상한 진리는 무력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다윈의 생각을 통해 이보다 훨씬 좋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이제 세상의 고통과 아름다움 속에서 새롭게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새로운 여정에 나서기를 권한다. 커닝햄의 노작은 이를 위한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이원석 편집위원 dkdndn2@naver.com

이원석 님은 연세대학교에서 석사 과정까지 신학을 공부했고 중앙대에서 문화연구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싸이월드 클럽 ‘원석이의 신학 세상’을 운영해 왔다. 오랫동안 본지 편집위원으로 활약했다.

각주)
1) 플라이스토세. 신생대 제4기의 첫 시기로 인류가 발생하여 진화한 시기이다. 지구가 널리 빙하로 덮여 몹시 추웠고, 매머드 같은 코끼리와 현재의 식물과 같은 것이 생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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