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호 커버스토리]

지어내는 인간
자연(自然)은 스스로, 저절로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원리로서의 ‘저절로’ 말이다. 토끼풀 뜯어먹기 지겨운데 슬슬 육식 한 번 해볼까 마음먹은 토끼가 있다는 이야기 들어본 바 없고, 배불러 죽겠는데도 내일을 위해 필요 이상 먹이를 잡아다 저장해놓는다는 사자 이야기도 들어본 바 없다. 문명의 고상함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연 세계의 약육강식이 잔인하다 호들갑이지만, 사실 자연은 조화롭게 살기위한 개체수를 ‘자연스럽게’ 조절해가며 필요한 생명 활동을 통해 스스로 존재한다.

또한 자연은, 환경에 자신을 맞춘다. 늘 먹을 만큼만 먹던 곰이 늦가을 우악스럽게 과식을 하는 이유는 먹이를 구하기 힘든 겨울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함이고, 순록이 안락한 보금자리를 떠나는 까닭도 그저 먹을 풀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자연은 거스르고 대항하고 역행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냥 기다리고 순응하고 따라간다.

오직 인간만이, 환경에 적응하지 않고 환경을 자기에게 적응시키는 동물이다. ‘인위적(人爲的)’이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수많은 피조물 중에 오직 인간의 행위만이 남다르다. 추우면 따듯한 곳으로 이동하기보다 불을 피우고 집을 지었고, 먹을 것이 떨어지면 찾아 나서기보다 경작을 하여 잉여생산물을 챙겼다. 인간은 먹고 살 만큼만 생산하지 않았다. 대비할 줄 알고 축적할 줄 알고 심지어 대물릴 줄 알 만큼 영리했다. 문명(文明)은 이래서 가능했다.

글월 문(文)에 밝을 명(明)! 자연에 무늬를 새기고 채색을 하고 옷을 입힘으로써(이것이 글월 ‘문’자의 뜻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살림살이를 밝게 안락하게 편하게 만들었다. 대단하다! 만물의 영장답다!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빚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이 땅의 모든 것들을 다스리라’고 부탁하실 만하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인간중심주의’가 늘 주류 담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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