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호 거꾸로 읽는 성경]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영적인 것’ 전성시대

기독교신앙, 특히 한국의 기독교신앙생활에서 항간에 만병통치로 통하는 어휘가 몇 가지 있다. 그중에 ‘은혜’ ‘구원’ ‘말씀’ 같은 것도 있지만 여기에 빠지지 않은 게 ‘영적’이란 말이다. 이 말은 대체로 인간의 이해와 감각으로 닿을 수 없는 신비롭고 영험한 무엇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그러나 신앙 체험의 영역으로 적용되면 이 말이 동반하는 현상은 다분히 감정의 열광적인 도가니에 맹목적으로 몰입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성경의 말씀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영적으로’라는 부사어가 신비의 연막을 칠 때 자주 사용되는데, 그 연막을 걷어내고 차분히 성찰해보면 고중세의 ‘비유적인’(allegorical) 관점을 선회하는 것이 고작이다.

문자적으로 그 뿌리를 캐보면 ‘영적’이라는 말은 ‘영’ ‘성령’에 해당되는 희랍어 ‘프뉴마’(pneuma)의 형용사형 ‘프뉴마티코스’(pneumatikos)의 번역어이다. ‘프뉴마’는 히브리어 ‘루아흐’(ruah)의 상응어로 ‘바람’ ‘호흡’ ‘숨결’ 등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 불어넣은 생명의 숨결을 지칭하면서 동시에 예언자들의 활동 가운데 작용한 하나님의 신령한 초월적 에너지로 그 함의를 넓혀왔다. 이 말이 신약성서에서 ‘프뉴마’로 쓰이면서 신과 인간 사이에 분할되는 조짐을 보인다.

먼저 이 말은 하나님의 실체적 본질을 드러내는 거룩한 영으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제약을 넘어 그의 초월적 인격과 신학적 유산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그리스도의 영이거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보혜사’의 영으로, 나중에는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 당당히 그 입지를 확장, 심화해나갔다. 한편 인간론적 맥락에서 이 ‘프뉴마’는 인간에게 부여된 신령한 기관으로 하나님의 영과 소통하는 초월적인 코드를 가리키는 어휘다. 이 말은 특히 바울 신학의 맥락에서 인간의 육체를 가리키는 ‘사르크스’(sarx), ‘생명’ ‘이성’ ‘혼’으로 번역되는 인간의 정신적 구성분자인 ‘프슈케’(psychē) 등과 구별하여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어원론적 맥락에서 ‘영적’이라는 말을 정의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론적 본질을 규정하는 초월적인 권능과 에너지 또는 신비한 생명력,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드러난 초인적인 미덕과 신령한 구원론적 특징이다. 나아가 이 모든 것에 반향하며 응답하려는 인간의 소통 지향적 기질과 영감적 인식의 역량 등을 총괄한다. 그러니 이 말은 좋은 것이고 매우 풍성하고 생산적인 개념인 셈이다. 다만 이 말을 편협하게 쓰거나 왜곡해온 우리의 미흡한 해석 능력과 자의적인 적용이 문제일 뿐이다. ‘영적’이라는 말이 풍미하는 전성시대에 그 능력은 왜 그리도 둔탁하게 이 땅의 현실에 체감되는지 통탄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이 말의 거품을 걷어내고 그 허장성세의 빈껍데기 속에 제대로 된 알맹이를 채워야 한다.
 
합리적인 영, 영적인 합리성
신약성서에는 ‘프뉴마티코스’가 아닌데 ‘영적인’으로 번역된 또 다른 단어가 있다. 바로 앞의 로마서 본문에 사용된 ‘로기케’(logikē)가 그것이다. 이 단어는 남성형인 ‘로기코스’의 여성형인데, 수식하는 명사 ‘라트레이아’(latreia)가 여성명사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로고스’(logos)의 형용사형이다. ‘로고스’는 유명한 요한복음 1장 1절에 사용되어 ‘말씀’ ‘단어’라는 뜻으로 풀이되지만, 기실 당시 스토아철학에서는 ‘이성’이란 뜻으로 소통된 개념이었다. 그밖에 ‘로고스’에는 ‘말’과 상합하는 ‘연설’ ‘보고’ ‘신조’ 등의 뜻이 내포되어 있고 ‘사물’ ‘이유’ 등의 사뭇 다른 뜻과 함께 비즈니스 세계에서 통용되던 ‘회계’(account)라는 함의가 담겨 있기도 하다. 이 복잡한 내용을 형용사로 우려낸 것이 바로 ‘로기코스’인데, 일차적으로 언어적인 이성이 작동하는 ‘합리적인’(rational, reasonable)이란 뜻과 함께 그 결과로 ‘지각 가능한’(intelligible)이란 의미로 번역된다. 이와 함께 파생된 ‘영적인’(spiritual)이라는 번역어가 덩달아 등장하는데, 서로 어원이 다른 ‘영적’이라는 번역어의 개념이 어떻게 동승 가능했는지 의아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21세기 우리 시대의 과학적 인식론과 1세기 고대, 특히 헬레니즘과 유대교가 만나던 그 시대의 문화적·지성사적 맥락에서 유통되던 영감적 인식론의 차이를 짚어봐야 한다. 오늘날 지성사의 풍조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종교와 과학적 합리주의가 결별한 이래, 신령한 것과 합리적인 것은 대립되거나 서로 긴장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농후하다. 물론 실리콘밸리에서도 시적인 영감이 학적인 창의력과 생산성 제고에 끼치는 영향이 인정되어 인문주의의 밑천이 중시되는 분위기이지만, 그 인문주의의 자장 안에서도 신학과 성서적 영감의 흔적은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이거나 아예 자취를 찾기조차 힘든 형편이다.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사정은 더 열악하다. 인간의 이성, 특히 언어적 이성이 핍진(逼眞)한 현실에서 합리적인 것이 영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이 합리적인 것이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정 시공을 초월하여 난해한 개념을 깨친 탁월한 선각자이거나 엉뚱한 미치광이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1세기의 지성사적 맥락에서 실제로 ‘영적인 것’(to pneumatikos)은 ‘합리적인 것’(to logikos)이었고, 그 역도 진실이었다. 당대 헬레니즘계통의 유대교 진영에서 최고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필론(Philo)의 담론이 예증하듯, 이 두 단어는 호환 가능하게 사용되었고 당대의 ‘영감적 인식론’의 틀 안에서 친밀하게 이웃하며 교통할 수 있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영적’이란 말을 세탁하여 본문의 ‘로기케’(logikē)와 결부시켜보면 로마서의 매우 중요한 위 구절은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영적 예배’라기보다 ‘합리적인 종교’ 또는 ‘합리적인 섬김(의 예법)’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재탄생된다. 이제 차근차근히 해당 말씀의 전후좌우 맥점을 짚어 그 속뜻을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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