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호 백투더클래식] 안토니우스와 '긍휼'의 영성

고통하는 이웃
“환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미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내 강철 같은 신경이 싫고 창피스럽다. 그러나 미치기 위한 노력도 안 하고 어떻게 맑은 정신으로 긴긴 하루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스물여섯 살의 젊은 의사였던 아들을 잃고서 자신의 피 끓는 심경을 토해놓은 소설가 고 박완서의 에세이 《한 말씀만 하소서》의 한 구절이다. 참척(慘慽)을 당한 어미의 깊고도 깊은 절망과 좌절감이 뼛속 깊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던 시기는, 필자의 둘째 딸이 치명적인 병으로 인해 두 번째 골수이식을 마칠 즈음이었다. 이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들 중의 하나가 “하나님께서 더 크게 쓰시기 위해서” 딸에게 고통을 주셨다는 말이었다. 위로 차원에서 건넨 말이었음에도 위로보다는 오히려 기분이 언짢아짐을 경험했다. 더 큰(?) 신앙의 인물로 쓰시기 위해 내 자식을 5년이 넘도록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서 눈물과 가슴 졸임으로 지내게 하는 하나님을 믿고 싶지도, 또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런 분이실까?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크게’ 쓰이지 않아도 좋으니, 사랑하는 딸이 죽음의 늪에서 하루 빨리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난 4월의 세월호 사건을 통해 참척을 당한 유족들의 눈물과 절규가 누구보다도 더 고통스럽게 다가와 일상의 삶이 완전히 정지될 정도였다. 그즈음 어느 초대형교회 목사가 설교강단에서 “하나님이 공연히 [세월호를] 이렇게 침몰시킨 게 아니다.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한 설교를 들었을 때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이와 유사한 발언들이 공공연히 한국교회에서 회자되었던 것을 가슴 아프게 기억한다. 신정론이란 신학의 이해 폭을 제쳐두고서라도, 박완서가 “주변 사람들의 아무리 사려 깊은 위로일지라도 그것이 모진 고문이요, 견디기 어려운 수모”라고 토로할 만큼 극한의 고통과 좌절감 속에 있는 부모들의 심정에 조금이라도 공감을 했다면 이런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음하는 이웃들의 고통을 공감하기 전 졸렬한 신학이 먼저 그들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조금 비약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잡아 먹어버려 공감 능력이 상실된 것이다. 교회 강단에서 성육신과 십자가라는 예수의 타자를 향한 사랑의 정신은 실존적으로 거부를 당한 것이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이 《삶과 거룩함》(Life and Holiness)이란 책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꾸며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 대목이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공감’(empathy)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주장이나 감정 그리고 생각 따위에 찬성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의 고통과 필요에 대해 지녀야 할 신앙의 태도가 단지 공감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공감과 더불어 긍휼(compassion)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안토니우스와 긍휼의 삶
긍휼이란 이웃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에서 출발해서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심지어 이웃을 위하여 스스로 위험까지 감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은 긍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서 긍휼이 시작된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게 됨으로써 마음이 요동하고, 마침내 그들을 도와줄 방도를 찾아 움직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긍휼은 단순히 인식된 상태만을 의미하는 공감과는 구분된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수많은 신앙의 영웅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감’(imitatio Christi)이란 덕 안에서 긍휼의 삶을 살았음을 보게 된다. ‘수도자들의 아버지’라고 일컬음을 받으며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던 안토니우스(Antonius of Egypt, 251?-356?)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비록 수도생활을 위해 이웃들을 등지고 사막으로 들어갔지만, 그는 사회와 단절되지 않았고 긍휼이 넘치는 삶을 살았음을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가 기록한 책 《안토니우스의 생애》(The Life of Antony)가 증거해주고 있다. 그 한 예가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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