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호 커버스토리]

먼저 ‘낭만’에 대하여
가끔씩 일제식민지 유산이 망령처럼 일상에 출몰할 때가 있다. ‘와사비’ 더 주세요, ‘다대기’ 더 없나요, ‘나시’ 팔아요, ‘와리바시’가 없어요, 이거 ‘야매’야, ‘야끼’만두 먹고 싶다, 여기가 내 ‘나와바리’야…. 속칭 ‘노가다’판에서는 상황이 더 심각하단다. 현장용어들이 일본말 일색인 데다가 하다못해 공구(工具)용어까지 일본말로 도배되어 있단다.

일제강점기 때 태어난 것도 아닌데, 아니 도대체 해방된 게 언젠데 아직도 이러나, 툴툴거리다가도 ‘아, 이래서 개인사와 민족사는 서로 동떨어진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아무리 민족이니 역사니 무겁고 버거운 단어가 싫다고 멀리 도망치려 해도 그것은 어느새 나보다 먼저 내 안에 시나브로 똬리를 틀고 앉아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쓰려고 하는 글감인 ‘낭만’도 예외가 아니다. 한자로는 ‘물결 낭(浪)’에 ‘흩어질 만(漫)’을 써서 도통 그 의미가 아리송한데, 왜 그런가를 추적하니 프랑스어 ‘로망’(roman)을 일본식 발음에 맞춰 음역했기 때문이란다. 아, 또 일본이다. 일본이 미국말 ‘사이언스’(science)를 ‘과학’으로 번역해놓은 통에, 그리고 우리 학계가 그 번역을 아직까지 꾸역꾸역 사용하는 통에 불편하고 참담한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없던 터에 이런 단어까지 일제의 잔재라니, 그야말로 오호통재라! 국권은 회복했는지 몰라도, 언어주권은 아직 멀었구나.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데, 우리말이 이렇게 왜색을 입고 있는 한, 우리 존재의 탈식민지화도 요원한 얘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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