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호 권서, 첫 사랑을 메고 떠난 사람들]

#어느 탕자의 귀향
“오랜 세월을 허송하였지요. 사십 줄을 넘어 예수님을 믿은 뒤에야 철이 들었습니다.”

권서로 추천을 받아 새 삶을 시작한 정수창은 여러 권서들 앞에서 지나온 자신의 세월을 고백했다. 박씨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었다.

“노름판을 전전했어요. 돈을 따거나 잃으면 술집을 기웃거리고, 술에 취하면 자주 멱살잡이를 했습니다. 처자식 있는 놈이 밤낮을 그렇게 돌아다녔지요. 아버지의 재산을 하나둘 팔았고, 그렇게 몇 해 지나고 나니 안사람이 품팔이를 해야만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다 못난 내 책임이다 생각하니 나 자신을 용서할 수도 없고…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 처자식 데리고 고향을 떠났어요. 마음잡고 살 참이었는데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언젠가부터 다시 노름판에 끼어 허랑방탕하고 있었습니다.”

정수창은 예수 믿기 이전의 삶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그는 집안을 아예 거덜 낼 기세로 값이 나가는 물건이면 닥치는 대로 팔아서 노름 판돈을 만들었다. 아내도 남편을 없는 사람인 양 여겼다. 그 무렵 그는 박씨를 만났다. 박씨가 자신의 집을 방문했을 때, 정수창은 박씨에게 하룻밤 유하기를 청했다. 그날 밤 박씨는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이슥해지자 박씨의 이야기도 깊어졌다. 그럴수록 정수창은 더욱 더 귀를 기울여 경청하였다.
“사람은 악한 것이어서 그 안에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 성경을 보십시오.”
박씨는 로마서를 펼쳤다.
“의인은 없나니 곧 한 사람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곧 하나도 없느니라, 하셨어요. 그런데 사람의 본성이 이처럼 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선을 사모할 뿐 아니라 선을 좇으려고 갈급해 하는 존재입니다.”
박씨는 다시 시편을 열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으려고 갈급한 것처럼 내 영혼이 당신을 찾으려고 갈급하나이다. 그러니까 선을 연모하는 사람의 마음이,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과 매한가지라는 것이지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 두 마음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내 안에 이 두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출발합니다. 악한 본성을 깨달은 사람은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할까?’ 하고 탄식하지요. 이 슬픔의 자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간절한 구원의 소원이 생깁니다. 그 소원이 목숨처럼 갈급한 사람은 한쪽 눈을 잃고서라도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법이지요.”
박씨의 이야기를 듣던 정수창은 자신이 살아온 지난 세월을 풀어놓았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 때로는 눈물을 흘렸는데, 마르고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자신이 흘린 눈물을 닦아냈다. 소처럼 큰 동작 때문에 오히려 여린 여인의 눈물보다 더 가여워 보였다. 살아온 과거를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회개를 바라볼 때마다 박씨는 그 마음의 떨림에 공명하였다. 언젠가부터 하나님의 마음도 사람의 마음에 그렇게 공명할 것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권서 정수창은 이 날 밤에 관한 기억을 나중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는 그 밤을 잊지 못합니다. 지난 세월이 후회스럽고, 못난 남편과 애비 곁에서 마음고생에 몸고생까지 해온 안사람과 아들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만 사람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마지막 끈을 붙잡으려는 심정이랄까요? 저는 노름판을 기웃거리는 내 손목을 잘라버리고 나서라도 예수의 도를 따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박씨는 이튿날 아침 정수창의 집에서 나올 때 한문 성경 한 권을 건네주었다. 남은 한글 성경이 없었다. 그러면서 경성으로 갔다가 빠른 시일 안에 돌아와 한글 성경을 전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그 지역에 의병들의 봉기가 있었으므로 오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 달 쯤 지나서야 겨우 다른 권서 한 사람과 동행하여 그곳에 도착했을 때, 정수창은 형제를 보듯 반가워하며 박씨 일행을 맞았다. 두 달 사이에 정수창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더 이상 노름판을 전전하지 않았고 술을 끊었다. 아내의 농사일을 도우며 비로소 가장의 책임을 다하려 몸부림치는 중이었다. 그의 아내와 마을 사람들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저렇게 바뀔 수 있는가 싶어 의아해 하였고, 그를 딴사람이 되게 한 박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하던 중이었다.
박씨는 정수창의 집에 사흘을 머물며 그 마을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 정수창이 박씨를 소개하면 마을 사람들은 ‘아하’ 하며 박씨를 아는 듯 반색하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꽤 많은 성경을 팔았다. 박씨는 정수창에게 “큰일을 하시었소” 하고 감사했다. 그때 정수창이 박씨에게 이런 말을 했다.
“선생처럼 언젠가 나도 좋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정수창은 그 마음을 간직하였고, 결국 권서로 등짐을 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 그가 박씨도 알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
“권서 두 분이 제 집에 머물 때 밤마다 나무 아래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저는 그분들이 중얼거리며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기도의 말이 어찌나 착하고 간절하던지요. 두 분이 떠나간 뒤 저는 말씀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밤이면 그 나무 아래로 가서 그분들이 드리던 기도를 이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들은 그분들의 기도 내용을 반복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예수를 알고 구원에 이르도록, 마을에 교회가 생겨서 대대로 이 마을에 살아갈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좋은 하나님의 일꾼을 보내주셔서 사람들마다 복을 누리도록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하다보니 제 마음의 간구할 바도 아뢰게 되었고, 어느 새 저의 마음을 가득 채운 기쁨과 평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의 영혼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려는 간절한 바람도 생겼지요.”
박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수창이라는 사람의 인생 깊은 데까지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어쩌면 그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에 등이 서늘해졌다.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인생에 개입한다는 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런데 정수창의 신앙생활을 지켜보던 아내가 그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노름쟁이 남편은 받아들일망정 예수쟁이 남편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평생 처자식에게 못할 짓 하더니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서 예수쟁이가 되어? 귀신에 씌어서 마누라가 죽는 꼴이라도 보겠다는 심보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이요? 하이고, 잠시 사람구실 하나 싶더니 내 평생에 무슨 사내 복이 있나 했소. 서양 귀신 들여서 처자식 팔자 망치느니 차라리 예전처럼 노름판이나 돌아다니는 편이 낫겠소.”
아내는 남편 밥상을 차리지 않았고, 자식들과 마주하지도 못하게 막았다. 정수창은 아내로부터 타박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기도했고, 새벽부터 일어나 농사일을 하고 집안 이곳저곳을 손댔다. 이웃의 부탁에도 자기 일처럼 나섰고, 때로는 자신이 깨달은 복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수창은 그렇게 1년 쯤 지내고 났더니 어느새 가정 제단에 아내와 자식들이 함께 앉아 있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권서들이 함께 웃었다.
박씨는 그의 부탁을 받아 그 마을에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는데 언젠가 그가 박씨에게 교회를 세우는 일을 제안했다. 박씨도 생각하던 터였으나 그의 입에서 먼저 그 말이 나와 반갑고 고마웠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수창이 마을에 집을 한 채 사게 되었으니 예배당을 세우자고 말하는 게 아닌가. 기도모임을 하던 사람들이 헌금하고 정수창이 더 많이 헌금하여 집 살 돈을 마련한 것이었다.
권서 정수창은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을 믿고서 저는 큰 복을 누리고 삽니다. 무엇보다 큰 복은 이것입니다. 제 인생이, 그러니까 그 악하고 못난 세월이 조금 쓸모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끝 모를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릴 때 제 인생이 얼마나 추하고 보잘것없는지를 깨달았으니까요. 그런 악한 인간에게 예수님은 구원의 끈 한 자락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 끈을 붙잡고 싶은 간절함을 불러일으켜주신 것이지요. 나중에서야 저는 그 부질없는 세월조차 부질 있게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박씨는 정수창의 그 고백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분 안에서는 모든 인생이 쓸모 있을 테니 말이다. 하늘 아래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이 고백해야 할 말 같았다. 그러면서 박씨는 생각했다. ‘내 인생의 고백도 그러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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