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호 거꾸로 읽는 성경]

대립되는 구절의 역설적 묘미
성경의 같은 책에서 가끔 의미상 상반되는 말씀을 접할 때 당혹스러워진다. 가령 마태복음이라는 동일한 책에서 예수는 산상설교를 통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5:9)고 가르치더니 파송설교에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10:34)고 이전의 가르침을 뒤집는 듯한 말씀을 한다. 이런 경우 흔히 그 구절의 ‘맥락’을 잘 짚어 의미를 풀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 맥락이란 것도 추론하는 사람들마다 제 논에 물대듯 자기 정당화로 흐르다 보니 자주 헛갈리는 게 사실이다.

비록 같은 복음서는 아니지만 이런 어록도 가끔 대립적 의미의 구절로 거론된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바알세불 논쟁의 결론구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12:30)고 배타적인 어조로 말한 바 있다. 반면 마가복음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서 따로 활동하는 자들을 가리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9:40)고 얼핏 굉장히 포용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상반되는 듯한 구절을 접하면 문자적 형식논리에 얽매일 게 아니라 그 논리 이면과 너머의 메시지를 포착해야 한다고 타이르지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자가당착 같아 딱 부러진 걸 좋아하는 성미로는 참아내기 어렵다.

이런 구절을 해석하면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성서의 진리가 역설과 아이러니를 그 문학적인 기법으로 자주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아’를 염두에 두고 ‘어’를 말하는 경우가 있고, ‘어’를 말했지만 사실 그 ‘어’ 속에 ‘아’를 품고 있는 경우가 있더라는 것이다. 또 다른 맥락에서 어떤 상반 구절은 그 말의 이면에 담긴 역사적 삶의 자리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천해나간 흔적을 머금고 있기에 외면상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겉으로 분명 두 어록은 예수의 입에서 발화된 말씀이지만 저자는 그 말씀들로 자신이 몸담은 동시대 신앙공동체의 관점에서 과거를 회고하면서 또한 현재의 방향을 설정하는 중첩된 의도를 드러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루게 될 두 어록이 바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그 해석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마태복음 10:5~6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그 선교 반경을 다음과 같이 설정해주었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그러나 부활 사건 이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분부하신 예수의 말씀은 이와 다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이방인)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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