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호 백투더클래식] 《베네딕트 규칙서》와 규칙의 재발견

규칙, 영성과 공동체의 교차로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한 요즘, ‘영성’ 또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영성에 대한 관심의 배경에는 개인과 교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에서 나온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고, 공동체에 대한 관심의 배경에는 자본주의 가치관에 교회가 무기력하게 휩쓸리게 된 원인이 공동체성의 상실에 있다고 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영성과 공동체의 교차로에 ‘규칙’(rule)이 자리하고 있다.

규칙의 관점에서 볼 때, 현대 한국 개신교회들은 역사상 가장 규칙이 없는 교회들이며, 설사 교회가 세운 규칙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가장 규칙을 지키지 않는 교회들이다. 현재 있는 규칙들도 철 지난 것이 많다. 한마디로 한국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규칙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위해 규칙을 세우지도 않고, 스스로도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 규칙을 세운 동기 자체가 의심 받고 있어서 규칙을 강조해도 성도들은 잘 설득되지 않는다. 또한, 좋은 규칙이 있더라도 포스트모더니즘 성향을 보이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규칙이란 단어에 오해를 갖고 있어서 거부감을 일으킨다. 규칙과 자유를 상호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하며 어떤 것이든지 규칙에 얽매이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그러나 영성과 공동체의 교차로에 존재하는 규칙을 도외시하고서는 나와 교회 공동체가 새로워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규칙이란 무엇인가?

영성 생활 규칙, 그 뿌리와 기능
브리태니커 사전에 의하면 규칙이란 “다 함께 지키기로 정한 사항이나 법칙”을 말한다. 무릇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라면 구성원들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함께 식사하는 시각,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는 시각 등 최소한 몇 개의 규칙이 있게 마련이다. 영적인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영적 공동체는 그 지향하는 가치관을 형성하기 위한 규칙들이 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영성 생활을 위한 규칙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구약성경에는 매년(유월절·초막절·수장절·속죄일 등), 매월(월삭), 매주(안식일·금식) 그리고 매일(아침과 저녁 제사) 단위로 반복해서 지켜야 하는 절기들과 규칙들이 있다. 신약성경에도 예전(禮典)과 관련해서는 주일과 성만찬에 대한 언급이 있고, 매일 기도와 매주 두 차례의 금식과 관련된 규칙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초대교회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관련해서 일 년 단위로 반복해서 지키는 절기들(대림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오순절 등)이 새롭게 확립되었고, 세례와 성만찬을 비롯한 성례전에 대한 규칙들이 더욱 정교해졌다.

다음으로 영성사를 살펴보면 영성 생활에서 ‘규칙’이 참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영성 고전에는 규칙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 한다. 《파코미우스의 규칙》(The Rule of Pachomius),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The Rule of Augustinus), 《베네딕트의 규칙》(The Rule of Benedict), 《프란치스코의 규칙》(The Rule of Francis) 등 수많은 규칙서가 수도원 운동의 뼈대로 기능했다.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는 수도원 규칙들은 물론 로마 가톨릭의 교회법과 같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명문화된 규칙들은 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성 생활에서 규칙의 긍정적 기능 자체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개신교 영성 운동의 중요한 한 흐름이었던 청교도는 가정을 수도원화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청교도 가정에서는 영성 생활 규칙들이 가부장인 아버지의 엄격한 감독 아래에 준수되었다. 가정에서 행해진 하루 세 번의 기도와 성경 읽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규칙서들이 영성 고전으로서 가치 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현대인이 그 규칙을 영성 생활에 적용하기에는 엄격한 내용들이 너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또한 규칙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극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는 두려움이 들기도 한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파의 율법주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율법주의 경향은 규칙을 강조하던 수도원 운동에서도 수시로 나타났고, 가장 가깝게는 현대 개신교 근본주의에서도 발견된다. 그렇다면 규칙의 과도한 엄격성과 율법주의를 경계하면서도 영성 생활에서의 순기능을 회복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로렌스 커닝햄(Lawrence Cunningham)에 따르면 규칙은 훈련(training)의 필수요소로, 적용되는 대상에게 내면화되면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에게 “잠을 자기 전에 반드시 양치질을 해야 한다”고 거듭해서 이야기하면 자녀들은 싫든 좋든 부모의 지시를 따라 양치질을 하게 되고, 그것은 곧 습관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양치질을 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부모가 세운 양치질 규칙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양치질 규칙’의 목적은 자녀가 건강한 치아를 평생 유지해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영성 생활에서 규칙도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영성 생활의 목적은 다양하게 표현되어 왔지만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성 생활 규칙은 그런 성품을 형성하기 위해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는 ‘삶의 원칙과 방식’이다. 규칙 준수 자체가 삶의 목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형성이 목적임을 망각하면 안 된다. 규칙이 목적에 위배되거나 목적을 이루는 데에 효과가 없다고 경험적으로 밝혀진다면, 그 규칙은 언제든지 공동체의 합의로 폐기되거나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

베네딕트의 규칙 맛보기
이제 영성 고전 중 하나를 선택해서 ‘규칙의 재발견’을 시도해보자. 영성사에 나오는 규칙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었던 규칙서는 6세기의 《베네딕트 규칙》이다. 이 규칙서는 수도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기 위한 ‘학교’(schola)”로 이해하고 있으며, 수도원에 소속되어 수도원장의 지도 아래에 있는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547)는 서론과 총 75장으로 구성된 규칙서에서, 수도원장을 비롯한 각종 직무들의 역할, 성무일도, 노동, 입회 절차 등 수도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것들을 성경의 원칙을 바탕으로 자세하게 기술했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영성이 이 규칙서에 모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진 특징은 기도와 노동의 균형 잡힌 생활인데, “기도하며 노동하라”(ora et labora)는 베네딕트회의 모토에 잘 담겨져 있다. 이 모토를 포함해서 규칙서의 내용들은 교단을 막론하고 공동체를 세우려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지혜와 영감을 제공해준다. 지면 관계상 두 가지 규칙만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자 한자. 먼저 “제7장 겸손”에는 ‘겸손의 사다리 12단계’가 기술되어 있다. 이 단계들은 자신의 겸손이 어느 수준에 와 있는가를 알게 해주는 지표들이다. 그 중 몇 가지 지표들은 다음과 같다.

겸손의 첫 번째 단계는 인간이 “그의 눈앞에 하나님을 경외함을 두고”, 이를 결코 잊지 않는 것이다. … 겸손의 두 번째 단계는 인간이 자신의 뜻을 좋아하지도 않고,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는 것을 기뻐하지도 않는 것이다. … 겸손의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상급자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 겸손의 네 번째 단계는 이와 같이 순종할 때에 그것이 어렵고 [자신이 원하는 것과] 반대의 일이라 할지라도, 또는 심지어 어떤 종류의 피해를 입는다고 해도 마음으로 잠잠히 고통을 품고, 약해지거나 도망치려고 하지 않고 그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 겸손의 다섯 번째 단계는 마음속에 들어온 어떠한 악한 생각이나, 남모르게 지은 잘못까지도 수도원장에게 겸손하게 고백함으로써 숨기지 않는 것이다.
- 《베네딕트의 규칙서》(KIATS, 39~44쪽)

위의 단계들 가운데 첫 번째 단계인 ‘하나님 경외함을 잊지 않음’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인들이 공감하고 실천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부터는 적용하기가 정말 어렵다. 우리는 현대 심리학에 따라 먼저 자신의 뜻과 욕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존중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더 유익하다고 주장하는 시대에 산다. 또한 자신이 속한 교회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를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순종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더욱이 자기 마음의 악한 생각이나 남모르게 지은 잘못을 영적 지도자에게 고백하는 일 역시 쉽지 않다. 겸손의 단계들을 실천하는 것이 베네딕트 당시에도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현대 사회는 더욱 힘든 상황이 되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닮으려는 목표를 가지고 한 마음으로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면 겸손의 단계들은 적용하기가 어렵다. 그런 환경이 마련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겸손의 훈련이라면서 순종을 강요하는 영적 지도자가 있다면 그것은 폭력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는 겸손의 열두 단계 규칙들을 내면화한 이후에 오는 경험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겸손의 모든 단계를 거친 후에 수도사는 재빠르게 모든 두려움을 내쫓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통해서만 이제 그는 자신이 한때 두려움으로 행했던 모든 것을 아무 노력 없이, 즉 자연적으로, 습관인 것처럼 준수하기 시작할 것이다. 곧, 더 이상 지옥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선한 습관과 덕을 즐거워함으로 인해 그것들을 준수할 것이다. 주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이제 죄와 악으로부터 정결하게 된 그분의 일꾼 안에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은혜롭게 나타내실 것이다.
- 《베네딕트의 규칙서》 47쪽.

베네딕트에 따르면, 수도자가 겸손의 힘든 단계들을 거치는 이유는 “모든 두려움을 내쫓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요일 4:18)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 때문이다. 그 결과 “두려움으로 행했던 모든 것을 아무 노력 없이, 즉 자연적으로, 습관인 것처럼 준수”할 수 있게 되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 말해서 이 경험에 이르면 더 이상 규칙은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평생에 걸쳐서 규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사랑에 이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규칙은 ‘성무일도’(聖務日禱)에 관한 것이다. 성무일도는 거룩한 직무로서 기독교인들이 매일 공동체적으로 참여하는 ‘하나님의 일’을 일컫는다. 구체적으로 시편을 중심으로 한 성경 본문, 기도문 낭송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네딕트가 주장하는 성무일도의 취지는 제16장에 잘 나타나 있다.

선지자는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시 119:164)라고 고백했다. 만일 우리가 새벽기도, 제1시 기도, 제3시 기도, 제6시 기도, 제9시 기도, 저녁기도, 그리고 마지막 기도의 의무를 이행한다면, 우리는 일곱이라는 거룩한 수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라고 말한 주간의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그 선지자가 야간기도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주를 찬양하기 위해 밤중에 일어났나이다”(시 119:62).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때에, 즉 새벽기도, 제1시 기도, 제3시 기도, 제6시 기도, 제9시 기도, 저녁기도, 그리고 마지막 기도 시간에 “그분의 의로운 심판”으로 인해 우리의 창조주를 찬양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분을 찬양하기 위해서 밤중에 일어나자.”
 - 《베네딕트의 규칙서》 56쪽.

베네딕트를 비롯하여 과거의 수도원 설립자들이 시편 기자의 말씀에 얼마나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을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래서 베네딕트는 성무일도 규칙에서 수도자들이 하루 일곱 번 또는 여덟 번에 걸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것을 요구한다.

매일 아침 새벽예배를 가거나 큐티를 하는 것조차 힘들어 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일곱 번 또는 여덟 번, 즉 3시간마다 한 번씩 예배를 드리라고 하는 아이디어는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고 머물러 사는 정주(定住) 수도회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이후에 등장한 탁발(托鉢) 수도회는 도시 안에서 돌아다니면서 활동했기에 성무일도 규칙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현대 목회자들과 직장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무일도 규칙은 비현실 그 자체이다. 하루 종일 말씀을 묵상하고 예배드리는 삶을 사모하는 기독교인은 많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현대인의 생존은 녹록치 않다. 그렇다면 과연 《베네딕트 규칙》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비현실성을 넘어서서 어떤 의미를 던져줄 수 있는 것일까?

‘규칙의 재발견’을 위하여
영성 생활 규칙을 담고 있는 영성 고전을 읽고 감동을 받기는 쉽지만 적용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므로 읽기의 감동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려면 그런 영적 열망을 공유하고, 규칙들을 적용할 공동체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 사막 은수자(隱修者)의 개인주의적 영성의 성공률은 지극히 낮다는 것이 존경받는 영성가들의 판단이다. 그러므로 다시 공동체가 중요하다. 공동체가 희망이다.

영성 생활 규칙을 적용할 때 부딪히는 한계를 돌파하는 또 하나의 현대적 아이디어는 규칙을 리듬(rhythm)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마조리 톰슨(Marjorie Thompson)에 의하면, 영성 생활 규칙 또는 리듬이란 “거룩함에 있어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구조와 방향을 제공해주는 개인적이거나 공동체적인 영성 훈련들의 패턴(pattern)이다.” 여기에서 리듬 그리고 패턴이라는 낱말에 주목하면 규칙이란 낱말이 주는 거부감을 넘어설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상은 결국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떤 반복되는 리듬을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영성 생활 규칙이란 그 일상의 리듬 어딘가에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움직임을 몇 개 더 끼워 넣는 것이다. 시편 119편의 기자와 베네딕트는 하루에 일곱 번 성경 말씀을 낭송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움직임을 아주 굵은 리듬으로 만들었다면, 현대 기독교인과 교회는 비록 분주한 일상이지만, 형편에 맞게 좀 더 가는 리듬을 적절하게 만들어서 일상에 삽입하면 될 일이다. 그러면서 다양한 개인 삶의 차이를 존중해서 다양한 리듬의 조화가 가능하도록 배려해주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인의 필수 아이템인 스마트폰과 클라우드는 현대 기독교인이 영성 생활 규칙을 리듬으로 만드는 데 정말 효과적인 도구라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스마트폰은 SNS 서비스를 언제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게 해주어서 일상의 여백을 잠식해버린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긴 하지만, 영성 생활에 대한 열망이 있는 사람들은 이 문명의 이기를 긍정적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스마트폰에 담긴 성경 앱을 사용해서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의지만 있으면 말씀을 읽고 묵상할 수 있다. 클라우드 서비스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깨닫고 느낀 것들을 언제나 어디서나 영성 일기로 기록하고 공유할 수 있게 도와준다.

결국 영성 생활에 대한 열망이 관건이다. 열망이 있다면, 우리는 영성 고전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통찰들을 현대의 문화와 사회 안에서 자신과 공동체의 일상생활의 리듬에 잘 적용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될 것이다.


이강학
기독교 영성고전학당 ‘산책길’ 대표연구원이며, 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 실천신학(기독교 영성)과 조교수이다. 미국 Graduate Theological Union(GTU)에서 기독교 영성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영성 지도, 영성 훈련, 영적 분별 등을 주제로 연구하고, 강의하며, 실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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