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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 탐욕에서 혁명적 단식으로
[290호 커버스토리] 어느 50대 중년의 '비움'과 '부활'
[290호] 2014년 12월 26일 (금) 15:22:19 오세훈 씨알재단 운영위원 goscon@goscon.co.kr

2015년 을미년 새해가 떴다. 50대 중반을 통과하는 나의 친구들은 금년을 나머지 50년의 성패를 가름할 특별한 시간이 되도록 하려고 각오들이 대단하다. 송구영신의 인사말들 가운데 유독 돋보이는 선언, 권유, 제안들은 우선 술과 담배 끊자, 안 하겠다, 줄이려 한다, 단식에 도전해볼까 등이었다.

욕망의 바벨탑
나는 대학 1학년(실은 고2) 때부터 본격적으로 했으니 스무 살 전후에 이미 알코올과 니코틴에 빠져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또래의 인물들이란 대부분 나처럼 고교 시절 술과 담배를 시작해서 대학 들어가서는 소위 ‘주당’이 되거나 그 ‘거인’들의 흉내라도 내면서 산 사람들을 일컫는다. 30년도 훨씬 더 지났건만, 세상은 여전히 젊은이들에게 지나치게 술을 권하고, 습관적으로 거대담론을 하게 한다.

술과 담배, 특히 술이 없었다면 지난 세월을 어떻게 살았을까. 그 질문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없다. 사이다, 콜라, 생수 같은 액체를 ‘통음’(痛飮, 매우 많이 마심)하며 나라 사랑과 민족(통일)과 사해동포주의, 반전반핵과 평화를 논할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술을 스피릿(spirit)이라고도 불렀던 것 아닐까. 그들도 술을 정신 또는 영혼을 크고 높고 깊게, 그리고 선하게 고양 진작시키는 특별한 물질로 보았던 것이다. 술은 사람과 태초부터 지금까지 함께 진화해온 것이다. 

‘신방과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서 홍보담당 업무를 맡아 젊은 날을 10년, 20년씩 보냈다’는 말은, 언제 죽을 줄도 모른 채 법인카드를 마구 쓰면서, 마치 오너의 아들인 듯 착각한 채로 세상을 속이는 저질 인생을 살았다는 고백이다. 그 마법의 플라스틱이 ‘킬러’임을 깨달은 것은 몸이 망가진 후다. 후배 여럿이 나의 전철을 밟고 산다. 그 친구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측은하기 그지없다.

경영 전략의 중요한 일부로서 고객과 세상이 오너와 회사와 제품을 가능하면 더 좋게, 적어도 나쁘지 않게 보도록 만드는 일은 실은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회장의 인품과 윤리의식이 높지 않으면 홍보담당자들은 열 배 더 힘들어진다. 드물게 예외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은 죄인을 성자로 거짓 설득하고 왜곡하여 세상을 속이는 불쌍한 노동자들이다. 천민자본주의의 수도인 한국의 대기업 대외업무 담당들은 그렇게 천하게 몸을 팔아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노예들이다.

일이 그토록 더럽기에 그들은 매일 밤 치사량의 술을 부단히 마셔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술은 그러니까 그치지 않는 슬픔이 액화된 것이 분명하다. 실로 찐한 눈물인 것이다. 그들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 지난(至難)한 미션을 맨정신으로 수행할 수 있겠는가. 건강하고 격조 있는 사회라면 있을 수 없는 인생들이다.  

그 자리는 대개 치사한 아부와 지나친 비굴함, 내키지 않는 과잉행동으로 가득하다. 몸에 해로울 것이 분명한 기름진 음식, 가짜일 가능성이 높은 비싼 양주를 미희(美姬)들이 입에 넣어주고 부어주는, 참으로 해괴하고 고역스러운 현장이다. 술값은 보통 공장 노동자의 한 달 월급 이상인데, 그 생각을 하면 늘 마음이 아팠다. 

그 ‘구슬픈 만찬’은 1년에 300일 동안 이어졌다. 하룻밤에 폭탄주 열 잔에서 스무 잔을 1년 내내 마시고서 20대 청년이 30을 넘겨 40대, 50대까지 죽지 않고 그 일을 지속할 수 있다면, 그건 21세기의 몇 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오늘 밤도 수천 명의 허울 좋은 명함들이 부자와 권력자들의 거대한 탐욕을 채워주는 대가로 받는 땅콩만한 봉급을 황송해하며 처참하게 무너진다. 가족은 가장들이 받는 모욕과 자해로 먹고 산다.

나는 그 나쁜 미션을 온 몸으로 감당하며 10년 이상을 보냈다. 언젠가는 사흘 간 혈변을 보다가 빈혈증세가 있어 응급실에 갔는데, 위장에 가득 고였던 피가 역류하여 응급실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목구멍에서 위장으로 넘어가는 지점에 ‘빵꾸’가 난 것이었다. 그리고 자전거 튜브 구멍 때우듯 관을 보수하고 며칠 만에 퇴원한 그날 곧바로 다시 전사가 되어 지하로 스며들었다. 30대 중반의 어느 대기업 ‘최고 엘리뜨’(사장은 물론 임원들도 나를 그렇게 불렀다)가 겨우 그 모양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응급상황은 연례행사처럼 반복되었다. 

탐욕의 종말
그처럼 심한 과음과 폭연으로 필름 끊기는 일(black-out)이 빈번했던 한 사내가 그렇게 겁도 없고 거칠 것도 없이 20대를 지나 질풍노도의 자신감에 넘쳐 30대의 한 고비를 넘어가던 어느 날, 회사가 부도났다는 뉴스를 들었다. 믿기지 않아서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치 다른 회사의 부도 소식처럼 나와 무관한 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런데 잠시 후 ‘이게 뭐지?’ 하며 별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청천벽력이었다. 가장 먼저 경영진에게 화가 났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한 결과가, 이게 뭐란 말인가? 이렇게 끝나다니…. 그런데 놀랍게도 ‘잘 된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니 흉사가 아니었다. 이 상태로 몇 년 더 갔다면 나는 분명히 죽었을 거 아닌가. 이 상상력, 얼마나 귀한 지혜인가. 가족에게도 그렇게 말하면 공감할 것 같았고, 실제로 그랬다.

부도 이후 구사(求社) 운동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1년 동안 내가 흘린 피땀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내가 ‘고래 나라’의 일에 관여하는 ‘새우 한 마리’에 불과하다는 판단이 든 순간 사표를 던졌다. 인수기업의 오너가 파격적인 제안으로 함께 일하자고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나는 성공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었다. 그 후 2년도 안되어 그 제안을 수용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나는 과장 없이 사하라 사막에 던져진 새우 한 마리일 뿐이었다. 새우에게 ‘부활’이나 ‘성공’은 가당치 않은 목표였다. 그저 그 치명적 조건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 과제이며 사명일뿐이었다. ‘1년 안에 반드시 푸른 초원으로 돌아오리라’ 던 자신감은 아예 없어졌다. 숨만 붙어 있었다. ‘사막 한 가운데 던져진 새우’라는 자각이 희망의 근거였다.

장래가 보장되던 회사의 부도, 60대 후반의 몸뚱아리(내 나이는 당시 30대 후반이었다), 보증으로 집 날려먹고 허리 꺾여 들어간 오두막집 하나, 융통성 없는 집사람과 일곱 살·다섯 살·세 살의 어린 자식들, 흥부네 집 쌀독, 얄팍한 지갑, 퇴직교사 아버지, 병약한 어머니, 가난한 형제들, 나에게 기대가 큰 후배들, 짧은 영어… 이 보잘 것 없는 리스트가 내 자산의 전부였다.

역시 제일 먼저 몸에 이상이 왔다. 드디어 재앙이 시작된 것이다. 젊은 가장의 인생에서 몸이 진앙(震央)이 된 것이다. 그곳에서 시작된 지진의 규모는 얼마고, 끝이 어디며, 그 파괴적 결과는 어떤 것일까. 두려웠다.

“5대 성인병 모두 위험수칩니다. 지뢰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운 좋으면, 그래도 10년 더 살 수 있겠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대개 짧은 시간 안에 문제가 터집니다. 합병증이 젤 큰 문젭니다.”

주치의의 ‘언도’였다. 그런데 나는 그 엄중한 경고를 받고 나서도 위태로운 행보를 지속했다. ‘내가 이러다가 정말로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어리석음과 교만이 앞을 다투었다. 나는 죽음의 트랙 위를 그 후에도 오랫동안 걸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나는 날벼락 맞은 가족을 재앙에서 구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업을 도모했다. 돈벌이란 험한 세상과 머리싸움을 하는 것, 그 싸움에서 나는 ‘연전연패’를 거듭 했다. 어느 날엔가 맨 정신에 귀가하면서, 단 돈 만 원도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놀라웠다. 참으로 놀라웠다.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래도 빈번하게 객기와 호기를 부리며 적잖은 술값을 내고, 콜택시로 귀가했다. 될 대로 되라, 케 세라 세라. “내가 사막에서 초원으로 갈 날이 머지않았다, 처자식, 부모, 형제, 친구, 후배들, 그리고 세상의 힘없고 병들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 다 구해준다”라고 큰 소리 치며 거룩한 성자의 꿈을 꾸고 있었다. ‘망상’은 사라지거나 줄어들지 않았다. 도리어 기나긴 고난의 행군 기간 내내 내가 주저앉지 않도록 격려(?)하였다.

실은 ‘지뢰밭 경고’ 이후, 나는 15년 동안 세 종류의 성인병―고혈압, 고지혈증, 통풍―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런 환자가 이틀이 멀다하고 버스와 전철이 끊어진 시간까지 술을 마시며, 그렇게 무너지고 있었다. 빚은 점점 늘고, 아이들은 빠르게 자라고, 나는 그렇게 무모하고 졸렬한 방식으로 사실상 삶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라케시스’(그리스 신화에서 모든 피조물에 일정량의 수명을 결정하는 신)는 내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맨발로 그 칼날 위를 장장 15년 동안 걸으며 모진 목숨을 부지했다.

몸의 혁명
정확히 2012년 1월 20일이었다. 술 담배를 끊었다. 나와 우리 가족에게 이 날은 3·1절이나 광복절보다 더 중요한 날이다. 30여 년 전 논산훈련소에서의 스물두 살 장병의 몸무게는 55kg이었다. 제대할 때 69kg이었으나, 직장 다닐 때는 82kg까지 올라갔다. 나는 163cm의 단신이다. 겉은 살아있었지만, 속은 곧 세상을 떠날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제 술 담배를 끊은 지 만 3년이다. 그간 막걸리 한 모금, 담배 한 대 피운 적 없다. 고2 때부터 했으니 35년 만에 알코올과 니코틴과 이별한 것이다. 그 세월 동안 마신 술은 작은 호수 하나쯤은 될 것이며, 피운 담배를 다 잇는다면 서울 부산을 열 번쯤은 왕복한 거리가 될 것이다. 그렇게 살았는데도 이렇듯 살아 있는 건 기적이다. 술 담배 끊은 뒤에 6개월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이미 몸이 젊어지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부실했던 건강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음을 아침마다 체감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내 몸집에 80kg이 넘으면, 90kg으로 가는 게 쉽지 70kg대로 내려갈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한다. 당연하다. 움직이는 게 싫고, 그런 생활태도는 심신의 건강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건강은 운동성에 비례하고, 그 운동성이 바로 생명의 증거다. 적극적인 움직임, 곧 운동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태도가 활성(活性)이다. 운동성과 활성을 상실한 공룡은 결국 역사에서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던가.

나는 평소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도 택시를 타거나 차를 몰았다. 내 손으로 너끈하게 할 수 있는 일들도 언제나 누군가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처리했다. 마음과 달리, 누군가를 몸으로 돕는 일은 잘 하지 못했다. 대신 술이든 담배든 음식이든 내 몸에 집어넣는 것들은 언제나 과했다. 자장면은 늘 곱빼기였다. 단명할 팔자를 타고난 사람처럼 그에 맞추어 성실하게 목숨을 빠르게 낭비하며 어리석게 살았던 것이다. 그런 자의 죽음을 누가 슬퍼하겠고, 누가 아깝게 여기겠는가. 누가 그가 남긴 작은 미덕을 칭송하며 그 자식들에게 기억시키려 하겠는가.

중대 결심 이후, 가능하면 버스든 전철이든 목적지 한 정거장 먼저 내려서 걷기를 실천했다. 그런 정도의 성실성으로도 체중은 짧은 시간 안에 76kg으로 줄었고, 변화된 몸은 나에게 자신감을 높여 주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지인이 단식을 제안했다. 2013년 4월 20일. 망설이지 않고 동의했다. 나는 단식, 회복식, 조절식을 각각 열흘, 열흘, 한 달 하는 총 50일짜리 단식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중단 유혹이 있었다. 그 위기를 여러 차례 넘기면서 마침내 50일 단식을 끝냈다.

사람이 타고난 욕구 가운데 식욕이 가장 강력하다고 한다. 사흘 굶기면 남의 집 담장 뛰어넘지 않을 사람 없다는 속담은 사실이다. 단식할 때 3일차가 가장 힘들다. 단식 중단 유혹은 통제 불능의 식욕이 마치 거친 폭력배들이 행패를 부리는 것과 다름없다. 먹거리가 넘쳐나는 대도시 사람이 매일 직장에 나가 하루 종일 일하면서 단식을 성공적으로 지속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언어도단이다.

하물며, 나같이 무절제한 욕구로 기갈 들린 동물처럼 살아온 50대 중반의 사내가 단식을 하다니…. 그건 정말로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그런데 해냈다. 사선(死線)을 넘었다. 나는 평소에 반성과 절제를 못하는 그런 자신을 처형하고 싶었다. 마음이 늘 몸에게 패배당함으로써 ‘마음의 나’가 ‘몸의 나’를 혐오하는 것이다. 이젠 아니다. 대견하다. 나 자신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야만적 탐욕에서 단식의 혁명으로
단식을 끝냈을 때 나의 몸무게는 63kg이었다. 지금은 58kg이다. 나는 실은 1일1식을 하려고 단식을 했었고, 지난 2014년 1월 1일부터 1일1식을 시작했다. 현미 섞은 잡곡밥과 미네랄워터, 여러 종류의 야채와 과일들을 먹는다. 육류, 커피, 라면, 칼국수, 바게트, 피자 등 밀가루 음식, 정크 푸드, 콜라, 사이다 등 탄산음료들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다. 자동차도 처분했다. 과거에는 대부분 좋아하던 것들이다. 조금도 불편하지 않다. 그뿐 아니라 기분도 좋고, 심지어 자부심이 샘솟는다. 그래서인지 이 착한 섭생(攝生)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하루에 땀 흘리는 운동을 빠짐없이 두 시간씩 한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식한 지 6개월이 지나고는 74개 항목을 체크하는 정밀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그 중 71개 항목이 완벽하다고 나왔다. 의사도 놀랐다. 세 종류의 성인병 약을 단식 시작하는 날 다 끊었는데, 약 먹을 때보다 더 좋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몇 달 전에는 후배가 독일에서 개발한 휴대용 건강검진기를 들고 와서 나를 측정했다. 20대 국가대표 운동선수들이 대부분 80점에서 95점이라고 했는데 나는 86점이다. 50~60대 일반인들은 보통 50점대이거나 잘 나오면 60점대 초반이라고 한다. 이런 일은 내 평생 처음이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옆에서 배불리 과식하는 것은 야만적인 폭력이다. 주먹이나 무기로 때리는 것만 폭력이 아닌 것이다. 세월호 문제로 단식투쟁을 하는 이들 옆에서 피자 폭식 퍼포먼스를 한 사람들이 있다. 시대적 야만성의 대표적 증거다. 나도 그들에게 분노한 시민의 한 사람이지만, 지난날의 나 역시 그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몹시 침울해졌다.

지금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굶주리고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만이 아니다. 국내에도 굶어죽거나, 단 돈 1~2천 원을 벌기 위하여 이 맹추위에 곱은 손으로 작은 리어카를 끌며 폐지를 줍는 80대 노인들이 부지기수다. 우리는 그들 앞에서 폭식 퍼포먼스를 하는 그 야만세력과 다름없이 끊임없이 배를 채운다. ‘아, 실로 부끄럽도다. 나의 탐욕은 끝내 나를 징벌할 것이로다.’ 지옥은 배고픈 친구 옆에서 측은지심 없이 오로지 자신의 탐욕을 채운 자들의 나라다.

을미년 새해 여러 가지 계획이 많겠지만, 우선 먹는 거 줄이기에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내 경험에 비추면, 술 담배는 ‘줄이는’ 게 아니라 단호하게 ‘내쳐야’ 한다. 그리고 단식은 내가 얼마나 독한 사람인가를 재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를 재는 시험이다.

100세 시대다. 열흘이나 이십 일을 굶으면서 겪는 고통보다 백 배 큰 기쁨과 높은 자부심을 얻는다면, 단식 한번 해볼 만하지 않을까. 그것은 연탄재로 만든 벽돌 수준의 우리 몸을 상감청자로 재탄생시키는 장엄한 도전이다. 이 말 조금도 과장 아니다. 지나친 식욕을 절제하여 굶주리는 이웃과 나눔으로써 눈이 벌건 탐욕의 이 시대를 마감하는 위대한 변화의 시작이다. 그것이 진정한 ‘문화혁명’이다. 그 혁명 없이 인류사회는 21세기에서 22세기로 건너가지 못한다.
 

오세훈
씨알재단 운영위원이면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아름다운 서당에서 인문학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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