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호 거꾸로 읽는 성경]

기독교인들의 오래된 상식(?) 중에 인종의 기원에 관한 것이 있다. 창세기 9장 24~27절에 기록된 이야기에 근거한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은 채 잠들었을 때 함은 그것을 보기만하고 말로 떠벌린 반면, 셈과 야벳은 옷으로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었다. 이 때문에 함은 노아로부터 다른 형제들의 종이 되도록 저주받았는데, 아프리카 흑인들이 한동안 유럽인들의 노예로 생활한 것은 물론, 현재도 서구 사회에서 경제·사회·정치적으로 종속된 것이 바로 그 저주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반면 아버지의 허물을 감추어 준 셈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세계를 ‘주름잡는’ 민족이 되었고, “창대케 될 것”이라고 축복받은 야벳의 후손인 유럽 백인종들도 지금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뿐 아니라 본문의 문학적 의도,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도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특정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더 중요시하는 ‘신실한’ 기독교인들에게는 불편하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설명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창세기 9장 24~27절에 기록된 노아의 저주와 축복이 인종의 기원을 설명하는 본문일까? 정말 하나님은 유색 인종보다 백인이나 유대인을 더 사랑하실까?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 아니다! 노아의 저주와 축복 본문에 근거해 오늘날의 인종적 편견을 정당화하는 것은 본문을 곡해하는 것이다. 또한 본문의 문학, 신학적 문맥을 완전히 무시한 해석이다. 왜 그런지 하나씩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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