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호 거꾸로 읽는 성경] 베드로전서 3장 18~20절

성서의 아킬레스건
성서학자가 아무리 주석의 위용을 발휘하며 성서 텍스트를 종횡으로 담대하게 누비는 전문가라고 할지라도 건드리지 않는 게 더 좋을 듯싶은 구절이 있다. 일종의 터부 같은 구절이다. 이유는 충분하다. 그 구절이 기독교 교리에 매우 민감하게 관여하여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해석상의 의미는 매우 모호하거나 복잡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찧고 까부르며 해석의 난장을 펼쳐놓아도, 그럴수록 저자의 속셈과 의도는 미궁으로 빠져드는 게 문제다. 또 교리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 교권의 집중 포격을 맞아 난데없이 마녀사냥의 올무에 걸려들 수도 있으니 이런 해석의 아골 골짝을 누가 흔쾌히 들어서고자 할 것인가. 그래서 아킬레스건처럼 느껴지는 것이리라.

대표적인 사례로 이번에 도전하고자 하는 철옹성 같은 구절이 바로 베드로전서의 상기 본문(3:18~20)이다. 한국교계에서 존경받던 어느 목사는 이 구절과 연계된 사도신경의 옛날 버전, 즉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 옥에 있는 영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는 내용을 다시 재생시켜 쟁론거리로 삼은 까닭에(그것이 전부는 아니었고 오히려 지엽적 빌미이긴 했지만) 집중 난타를 당했고 교단으로부터 목사직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런 엉뚱한 스캔들 하나만 봐도 우리의 신학계와 교계가 성서 해석에 얼마나 여유와 자신감이 없는지 여실히 확인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처럼 그리 복잡한 해석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최종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성서의 교훈도 많이 있다. 하지만,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면 해석의 미로가 촘촘하여 좀처럼 그 최종적인 의미를 드러내기 어려운 구절도 많다. 그것이 교리적인 성감대에 어떤 영향관계가 있든, 그 해석의 물꼬를 트고 방향을 잡는 것을 교권의 힘으로 밀어붙이거나 겁박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해로운지 지난 역사를 통해 충분히 반증된 바다. 따라서 그것은 꾸준히 논의하고 해석의 지경을 넓혀가면서 다양한 가능성의 활로를 열어두고 그중에서 무엇이 더 개연성이 높은지 차근차근 잠재적 논의의 열매를 수렴해가는 수밖에 없다.

성서에서 난해하거나 불가해한 구절이 존재하여 전문 학자들을 수렁에 빠트리고 일반 신앙인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현실이다. 성서라는 책이 2천 년 넘게 오래 묵은 고대의 책인 이유도 있거니와, 동시에 문자로는 명료해도 그 심층의 의미마저 투명할 수 없는 해석학의 묘연한 세계 자체가 그런 현실을 강요한다. 그러나 이것이 역설적으로 은총일 수도 있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고백 앞에 우리의 지성이 허락하는 해석의 역량과 추론의 반경이 한정되어 있다는 겸손한 깨달음이 여기서 비롯된다. 또 그로 인해 억지로 풀어내 우리 욕망을 채우려는 탐심을 성찰할 기회를 얻기도 한다.

구독안내

이 기사는 유료회원만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 온라인구독 회원은 로그인을 해주시고 인증 절차를 거치면 유료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월 1만 원 이상), 온라인구독(1년 5만 원) 회원이 아니시면 이번 기회에 〈복음과상황〉을 후원, 구독 해보세요.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