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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나타난 공적 신앙과 한국교회
[300호 커버스토리] 복음의 공공성, 시즌2
[300호] 2015년 10월 29일 (목) 16:04:52 김회권 haekwonkim@hanmail.net

공적 신앙의 원조, 성서의 예언자들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한국사회의 ‘공적 담론’이 되고 있다. 공중파 방송이나 주요언론들(‘PD수첩’ ‘시사매거진’ ‘그것이 알고 싶다’)이 한국교회의 총체적 부패와 타락상을 다루는 횟수가 점점 늘고 있는데, 제도권 기독교 수호기관들은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런 공적 담론이 기독교 박해에 대한 저항이라며 맞서고 있다. 

시민사회가 지적하는 한국교회의 총체적 부패상과 타락상은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각종 스캔들이다. 특히 세습과 권력투쟁, 담임목회자의 성적 추문 및 금전 비리 등의 권한남용 스캔들이다. 둘째, 한국교회의 재정운용 비리다. 일부 대형교회가 헌금을 국내투기성 펀드 및 해외 부동산매입에 전용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셋째, 매우 위험한 수위의 몰규범적 정치개입이다. 몇몇 목회자들이 선거철마다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되었거나 소송에 연루되어 있다. 넷째, 한국교회에 예언자적인 사회비판이 약화된 현상이다. 하나님의 친근성과 번영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거룩성과 초월성, 공의와 심판이라는 신앙 용어에는 낯설어한다. 소위 주류라고 일컬어지는 교회들에서는 심지어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질서를 하나님 나라를 대변하는 질서로 파악한 나머지, 가난한 시민들에게까지 확장되는 복지정책이나 노동자 권익정책을 비판한다. 심지어 사회적 형평성을 강조하는 기독교인들을 종북좌파라고 낙인찍는 죄악까지 범한다. 마지막으로, 목사-장로 중심의 당회 중심 교회정치 구조로 인해 개신교의 특장(特長)인 민주적 교회정치 구조가 붕괴된 점이다. 당회는 일반사회 기준으로 볼 때, 연로한 노인들 의식 수준에 맞춰진 의사결정을 함으로써 한국교회가 사회변혁적 기상을 펼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회정치에서 청년, 여성, 그리고 경제적 하층 교인들이 거의 배제되어 있으며, 심지어 당회 구성원들이 주축이 되어 드리는 교회의 공기도 시간에 부동산 경기가 죽지 않도록, 아파트값이 떨어지지 않도록 탄원하는 기도를 드리기까지 한다. 

이 모든 부패 양상의 근원을 추적해보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은 예언자적 공적 신앙의 부재다. 오도된 구원신학인 내재신학, 번영신학, 비성경적인 수구적 완고함이 한국교회를 사로잡을 수 있게 된 배경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성을 강조하는 예언자적인 영성 부재가 있다. 특히 추궁하시고, 위협하시고, 그리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주로 구약성경의 율법과 예언서를 한국교회 강단이 외면하고 있는 현실과 이 모든 타락양상이 맞물려 있다. 은혜만능주의에 빠진 한국교회는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를 무시하고, 이제 하나님의 진노는 과거지사가 된 것처럼 말한다. 통계에 따르면 대형교회일수록 구약성경에 대한 주변화와 배척이 극심하다. 단 한 번도 구약성경, 특히 예언서를 설교하지 않는 교회도 부지기수다. 이처럼 한국교회 강단에는 양심의 가책을 유발하며 마음을 찢게 만드는 회개 촉구 설교, 하나님의 심판 예고 설교가 거의 소멸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건전한 사회변혁의 대의를 주로 적대하는 세력으로 등장할 뿐 아니라, 응당 폐기되어야 할 사회경제 및 정치제도는 사수하려는 세력과 연대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지탄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잘 알다시피 정통 개신교신앙은 ‘프로테스탄트’, 즉 저항하는 신자들로부터 촉발되었다. 개신교는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은 극소수의 ‘저항자들’이 로마가톨릭교회의 반(反)하나님적 정치와 구조를 혁파하려고 몸부림치다가 태동한 것이다. 정통 개신교는 고대 이스라엘의 ‘저항적’ 예언자 신앙을 이어받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공평과 정의를 왕과 지배층에게 면대(面對)하여 선포했으며, 때로는 자기 죽음을 초래할 정도로 대담하게 지배권력자들을 겨냥한 하나님의 탄핵과 심판을 공포했다. 예언자들은 특히 성문 앞 광장, 성전과 왕궁에 가서 당시의 지배층을 겨냥한 야웨의 음성을 대변하여 외쳤다. 그들은 왕과 제사장 계급, 그리고 지주와 고위관리들의 권력 남용을 감시하고 탄핵했으며, 외적 침입 때 전쟁준비로 민중을 동원하는 악한 지배층을 비판하며 오히려 외적 침입의 원인을 이스라엘 공동체 내의 공평과 정의 붕괴에서 찾았다.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 내부에 공평과 정의가 붕괴한 책임이 지배층과 왕실에 있다고 보고, 이민족의 침략은 곧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응징이라고 주장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지배층이 외적 침입에 대한 군사적 대처보다 이스라엘 사회를 공의와 정의로 재건축할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코 아마르 아도나이”(야웨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느 움 아도나이”(이것은 야웨의 말씀이다)라는 전문 사자양식 구문(messenger formula)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특명전권 대언자로서 지상의 왕들과 지배층을 질책하고 탄핵했다. 이 두 문장은 예언자 자신이 발설한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봉인하여 서명하는 구두서명 행위였다. 예언자들은 자신의 행-불행 여부를 물으러 오는 개인고객을 상대로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지 않고,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적인 쟁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그들의 말씀은 공적 영역을 재구성하고 개혁하는 공적인 발언들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이 예언자들이야말로, 1990년대부터 신학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공적 신앙의 원조들이었다. 

1990년대부터 비상한 주목을 받아온 소위 ‘공적 신앙’(public faith)은 정치, 경제, 종교, 사회, 교육,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 말씀 선포와 신앙 실천의 장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을 의미한다. 참 역설적이게도 이 공적 신앙의 맹아는 바로 하나님께 소유되고 하나님 나라에 사로잡힌 예언자들의 수동적 ‘개인구원’ 경험이었다. 그들은 아주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포획되고 하나님의 의의 병기가 되어 하나님이 정조준하시는 과녁을 향해 날아갔다. 따라서 예언자들이 맛본 개인구원은 실로 사회변혁적 동력을 발출하는 개인구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주류 한국교회의 기독교신앙은 구약성경의 예언자 전통에 담긴 공공성을 상실하고 기독교신앙을 사적 취미나 기호 정도로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하고 있다. 기독교신앙이 사사화되면 거의 사적 취미나 세계관적 기호(嗜好)처럼 신앙은 그 신앙소유자의 개인신념 소장품처럼 취급된다. 기독교를 사사화하는 사적 신앙인은 기독교신앙과 진리를 교회 안에서만 유통되는 언어로만 여길 뿐 교회 밖의 일반사회에 적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기독교가 사사화된 까닭은 한국교회가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을 버리고 아직도 단자적 개인구원론 중심의 기독교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단자적 개인은 서로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개인이다. 사회적 개선과 변화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구원이 단자적 개인구원이다. 기독교의 사사화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능력에 사로잡힌 구원이 아닌 거의 가짜 구원, 즉 자기암시적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문제는 그들이 교회의 주 무대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기독교신앙의 사사화는 한국교회의 구약폐기론적 입장 및 그릇된 구원론과 상당히 밀접하다.  

구약폐기론에 바탕을 둔 그릇된 교회관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폐기되었기에 구약의 율법을 따라 경제, 정치 등을 논하는 것은 신학적 오류라고 생각한다. 신약성경만이 성경이고 구약은 이미 실패한 이스라엘 민족의 성경이었으며, 구약의 최고 가치는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언하는 것이었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이런 구약폐기론적 입장은 정통 기독교의 입장과 거리가 먼 마르시온적 이단의 논리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 39권을 유대교로부터 정경으로 받았고, 주후 4세기 말에 신약 정경 결정과 더불어 구약성경 39권을 총망라해 66권의 기독교인 성경을 확정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창조적으로 폐기된 제사법과 의식법을 제외하고 구약성경의 십계명, 시민법 특히 십일조법, 토지법 등 주요 공동체규약법은 신약시대 성도들과 교회에 고스란히(한편으로는 더 급진적으로 재해석되어) 계승되었다. 산상수훈에서 십계명은 훨씬 더 급진적으로 재해석되어 초대교회로 넘어왔고, 희년법이나 십일조, 부조법 등은 고스란히 그리스도인의 교회로 이월되었다. 신약 성도들과 초대교회는 구약성경 39권을 그대로 정경으로 수용했을 뿐 아니라 모세오경의 땅 신학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전까지 모든 교부는 구약성경의 경제율법을 토대로 특별히 교회 공동체의 급진적 사랑실천, 이웃봉사, 사회봉사 등을 강조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개시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로 가득 차 있는 신약성경에는 구원받은 신자들이 어떤 이상적인 사회와 국가를 이루어야 할지에 대한 지침이 거의 없다. 사도 바울의 서신과 후기 신약서신(일반서신. 그중 특히 베드로전후서)의 주조를 띠던 재림기대 신앙은 주후 100년을 지나면서 조금씩 약화되기 시작했다. 2세기 중반부터는 교회의 구성, 교인의 훈련과 회개교육(<헤르마스의 목자>와 <디다케>), 그리고 교회의 정치 직제 등에 대한 관심이 재림기대 신앙을 점차 대신하게 되었다. 감독제도와 교회의 통일성, 세례문답, 기본교리체제의 정비 등은 재림신앙보다 교회의 세상 착근(着根)에 더 관심을 가졌던 초기교회의 관심을 잘 예시한다. 구원받은 신자들의 세상이탈적 재림기대 열정보다는 이 세상에 상당히 오래 거주할 가능성과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감독에 의한 교회의 정치적 기능이 부각되었고 급기야 6세기에는 로마제국의 행정관 기능과 영적 통치 기능을 겸전한 주교-교황 제도가 등장했다. 이런 고민의 연장선에서 구약성경 24권(그리스어 역본-영어 역본-한글 역본으로는 39권)과 신약성경 27권을 정경으로 받아들인 주후 4세기 말의 기독교회는 더 이상 구름을 타고 오실 재림 예수님에 대한 열광적인 기대를 내세우지 않고, 대신 어떤 중간단계의 사회를 이루고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신약은 물론 구약성경(심지어 외경까지)을 정경으로 받아들인 초기 가톨릭교회는 성과 속을 나누지 않고 삶의 모든 영역을 기독교신앙의 실천장으로 간주했다. 땅에서 이뤄지는 모든 영역의 인간생활에서 기독교신앙을 적용하고 실현하려고 했다. 초기 가톨릭교회도 초대교회의 공적 신앙의 기상을 계승했던 것이다. 이 초기 가톨릭교회의 공적 신앙 형성에는 구약과 신약이 공히 정경이 되었다. 

지극히 사적이고 단자적인 구원론

사사화된 기독교가 대세를 이루는 교회와 기독교인은 ‘사후 천당 구원론’으로 기운 채 성경을 아주 좁은 의미의 ‘구원론’으로 축소한다. 한국교회 주일예배 설교의 80% 이상이 ‘현세축복’과 ‘내세구원’에 관한 설교라는 통계가 나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중심 무대에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전한다’는 예언자적 자의식이 결여된 대언자들이 활개를 친다. 그들은 시대의 중심 문제를 비껴가고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는 지배적 인간들의 중심 죄악을 도외시하기 때문에 그들이 선포한 죄 용서의 복음은 지극히 공허하다. 죄에 대한 단죄와 회개 요청은 빠지고 곧장 ‘값싼 구원론’으로 도약하는 설교들이 한국교회 강단을 좌우하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다. 

예언자적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소유된 백성으로 거듭나는 구원론을 설파하는 데 초점을 둔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사적 소유 대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공동체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소유되고 포획되는 사건이요 경험이다. 구원은 어떤 의미에서 수동적인 경험이다. 하나님에 의해 소유되는 것이 구원이기에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손안에 여전히 장악된 셈이다. 그런데 마치 구원을 소유 가능한 동산이나 부동산처럼 취급하는 교회에서는 개인주의적이고 단편적인 구원론이 지배하며 공적 신앙은 더 작동하지 않는다.

성경을 구원론 중심으로 읽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단자적이고 개인적 구원론이 아니라 ‘연대적, 생태계적 구원론’으로 읽어야 한다. 암이 생길 때는 99%의 건강한 세포가 중요하지 않고 1%의 암세포가 문제가 된다. 1%의 세포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암세포로 발전될 수 있는 1%에 해당되는 개인의 구원 경험이 공적 신앙의 첫출발이다. 사회 전체에 대하여 1%의 몫을 차지하는 개인부터 구원하는 것은 사회 전체 구원의 첫 단계다. 따라서 개인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 전략이 옳고도 마땅하다. 그러나 개인만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개인들이 몸 부딪치며 사는 영적, 물리적 생태계를 구원해주시지 않는다면 구원받은 개인의 구원 감격은 희석될 것이다. 

일찍이 3세기 중엽의 카르타고 교부 키프리아누스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를 주창함으로써 맹아단계의 가톨릭교회가 재림기대 신앙의 좌절감을 치유하고 지상에 오랫동안 정착하며 살아가는 순례자교회 모델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는데, 그 열매가 426년에 완성된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상의 인간 도성과 병행하면서 맞물리고 대립하고 그것을 초극하는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가톨릭교회가 완숙한 모형을 갖추기 시작하던 시대에 지상 도성 가운데서 천성을 향해 순례하는 가톨릭교회상을 제시했다. 아우구스티누스 등이 생각한 가톨릭교회는 로마제국의 세계 통치 이념을 이어받되 무력과 관료적 강압으로 유지되는 로마제국과는 달리 사제의 영적 통치로 운영되는 국가적 모델을 따르는 중간단계의 이상 사회였다. 교황과 주교는 세속군주의 무장통치를 대신하여 성례전, 기적, 말씀 등으로 사람들을 통치하려고 했다. 가톨릭교회는 5세기 이후 기독교회의 ‘중간사회’였던 셈이다. 가톨릭교회 교인들은 세상이탈적 재림신앙을 버리고 세상과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중간순례자 공동체인 가톨릭교회에 속함으로써 세속적 삶과 기독교신앙을 최대한 밀착시켜 생활했다. 그들은 가톨릭교회에 속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을 공공연히 표명하는 공적 신앙인이었다.

그런데 1517년 이후 형성된 개신교회에는 이런 가톨릭적 영적 봉건제국의 정밀한 정치력이 전혀 작동하지 않아 구원받은 개별 신자들은 곧장 세속사회와 맨몸으로 부딪쳤다. 이 경우 구원받은 신자들은 가톨릭교회적 저인망식 영성관리 체제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금세 세속화된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 즉 루터와 칼뱅, 츠빙글리, 불링거와 존 녹스, 그리고 17세기 초중엽 영국의 청교도 등이 일으킨 개신교 운동은 가히 또 다른 의미의 공적 신앙운동이었다. 이들은 가톨릭교회가 구성한 교회뿐 아니라 모든 세상살이를 개신교 신앙의 원리로 재구성하려고 공적인 싸움에 돌입했다. 교회정치, 교육, 성/속 이원론에 입각한 직업관, 정치, 경제, 예술 등 거의 모든 영역을 정통 개신교 신앙의 잣대로 변혁하고 재건했다. 정통 개신교의 분출하는 공적 신앙 에너지는 급기야 ‘30년 전쟁’이라 불리는 신·구교 영역분할전쟁으로 이어졌다. 30년 전쟁으로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는 자신들의 영적 통치관할지역을 나누는 데 어느 정도 합의했다. 

17세기 중엽부터 어느 정도 안정화된 개신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부터 교회를 지키느라 교회에 모든 에너지를 투입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개신교회는 두 가지 갈림길에 선다. 세속화되거나 소종파주의적 분리주의, 즉 소극적 경건주의로 주변화된다.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는 거의 가톨릭교회로 회귀한 듯한 주류질서 순응적 교회로 굳어져갔고, 곧 뒤이어 경건주의라는 내부 개혁파의 도전을 받았다. 경건주의는 개인회심주의, 공교회의 형식적 종교의식의 배척, 세계선교 투신 등을 통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순수한 열정과 공적 신앙 열정을 되찾으려고 분투했으나 대체로 세상변혁적 기상을 잃고 소종파로 전락해갔다. 경건주의는 교회만 하나님의 영토로 보는 교회중심주의 신앙을 낳고 자신의 영적 정결성과 구원 감격을 유지하는 데 몰두했다. 자연히 경건주의는 초대교회의 세상변혁적 기상은 물론이요 종교개혁자의 기상도 상실했다. 

세상변혁적 기상이 고갈된 교회는 현실순응적 기복신앙, 내세집착신앙, 영혼정화에 대한 청교도적 강박심리, 그리고 재림신앙 등을 강조하게 된다. 그나마도 제일 건전한 정통 기독교신앙은 재림기대 신앙인데, 불행히도 이 경건주의계열 교회의 재림신앙이 세상포기적, 세계탈출적 도피주의 심리와 쉽게 제휴해버린다. 그래서 열렬한 재림기대 신앙은 작은 이단 종파의 단골메뉴가 되었다. 그러나 재림기대 신앙은 사도신경의 신조에도 공포되어 있고 초대교회 성도들의 핵심신조이기도 했다. 초대교회는 건전한 재림신앙, 즉 세계변혁적 재림신앙으로 로마제국의 박해에서도 교회와 신앙을 지켰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박해를 초래한 1920~1940년대의 한국 기독교인들도 역사적 전천년설을 신봉하는 재림신앙인들이었다. 

그러나 세상포기적이고 세계탈출적인 재림신앙에 빠진 경건주의계열의 교회는 정치적 무책임, 기독교신앙의 개인소장품화를 심화시키고 이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위엄을 전혀 드러내지 못한다. 불건전한 재림기대 신자들은 구원받은 신자들이 오랫동안 지상의 인간 도성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재림에 대한 강조는 이단 종파뿐 아니라 19세기 미국 근본주의, 미국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주류 보수교회에서도 있어 왔다. 

참 역설적이게도 소종파의 재림신앙 신봉자들은 세상이탈적 종말을 꿈꾸는 데 비해 지극히 세속화된 교회에서는 이 재림신앙마저도 세속화(변질)되어 있다. 이래저래 재림을 말하는 자들이 이단 소종파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공적 영역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세상과 분리하여 정결하게 지키다가 재림하실 예수님에 의해 들림을 받는 환상을 품은 개별 신자들은, 세상에서 어떤 중간단계의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도무지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세구원’에 방점을 찍고 현실의 사회개선이나 변혁에는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되는 심리조작에 손쉽게 노출된다. 교회공동체(에클레시아)에 임시로 모였다가 구름 타고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느라고 중간사회건설에 전혀 관심을 갖지 못한다. 

내세구원과 경건주의적 세상도피심리는 사회변혁 기상을 결여시킨다. 이러한 토대에서 기독교신앙은 공적 영역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다. 이 흐름을 막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공적 신앙의 원조인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 실천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공적 신앙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의 빛을 비추어 역사의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해석했다. 그들은 천재지변과 역사적·정치적 격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왕들을 비롯한 지배계급을 압박하고 질책하신다고 봤다. 하나님 뜻이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제후들을 경고하고 왕과 지배층을 압박한다고 봤기 때문에 예언자들에게 동시대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포착하는 것은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그들은 살아 있는 권력을 가진 왕들과 지배층에게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추동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적 신앙은 하나님의 영에 추동된 예언자적 개인들과 교회에게서 표명된다. 하나님에게 영적으로 감화감동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미가서 3장 8절에 나와 있듯이, 지상 권력자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규탄할 수 있는 영적 패기와 용맹무쌍함에 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예언자들은 “나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야곱의 허물, 지배층의 허물을 대담하게 고발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코 아마르 아도나이” “너 움 아도나이”가 그들의 신탁 언어의 정형구문이었다.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영감 받았다는 말은 모든 지식 분야에서 백과사전적인 사실의 정확무오성을 보증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왕과 지배층의 죄를 탄핵할 수 있는 도덕적 담력을 구비했다는 말이다.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끊임없이, 특별히 지배층과 왕의 자기중심성을 끊임없이 규탄할 수 있는 비무장 예언자들의 영적인 패기를 말할 때 ‘영감 받았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코 아마르 아도나이)로 시작되고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너 움 아도나이)로 종결되는 신탁은 영감 받은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즉 자기 삶의 모든 터전을 스스로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대(對)지배층 선전포고다. 

예언자 엘리야가 비무장 혈혈단신으로 아합 왕을 찾아가서 ‘지난 3년간의 기근이 당신과 당신 마누라 때문이오. 당신 왕실이 바알을 섬겼기 때문에 야웨 하나님께서 비를 거두신 것입니다. 당신 죄 때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왕상 17~22장).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특징은 시사적 사건을 놓고 지배층과 왕실과 종교권력자들을 무섭게 다그칠 때, 영감에 호소했다는 데 있다(미 3:8).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시사 해설은 영감에 가득 차 지배층을 두렵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왕과 지주들, 악한 종교권력자들의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거룩한 하나님의 압박을 현존케 했다. 오늘날 언론의 시사 해설은 시장의 원리나 정부의 공영정책에 좌우되고 있기에 사실상 예언자적 공공성을 거의 담보하지 못한다. 이런 때 교회와 성직자들만이 공공적 쟁점을 놓고 예언자적인 시사 해석을 시도할 수 있다.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것도 돈으로 살 수 없고 시장영역이 침투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 공공영역이기 때문이요, 하나님 나라는 공공 쟁점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관철시키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탈근대적인 세계 속에서 어떤 사람들의 행동거지 속에 하나님의 현존이 있는지,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사태에 쏠려 있는지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영감 받은 예언자들은 영적 대담성과 패기를 갖춰 사태의 정곡을 찌르는 신탁을 쏟아낸다. 우리 삶의 자리는 하나님의 파토스를 분출하는 공적 영역이자, 지배층의 죄악과 약한 자의 아우성이 뒤섞인 공간이다. 슈퍼‘갑’과 슈퍼‘을’의 비대칭적인 관계가 만연한 세상은 하나님의 언어적 관여와 행동적 개입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특수한 시공간의 맥락에 서는 회중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설교자의 시사 해석은 불가피하다. 왜? 만일 오늘 우리 시대의 현실정치, 사회, 경제 등 공공영역에 대해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을 우리가 받아 시사적 언어로 재해석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모든 부조리한 사태에 대해 침묵하시는 셈이 되는 것이다. 옛 문자 속에 있는 성경구절만 읽고 그것을 당대의 공공영역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건 설교가 아니다. 공적 설교자는 오늘날 역사의 격변 속에 누가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지, 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지를 꼭 분별해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공적 설교행위다. 공적 설교자는 동시대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동선에 지극히 예민해져야 하고 시사문제에 정통한 이해를 하여야 한다. 아모스는 이런 공적 설교자의 전범이다. 

아모스의 공적 신앙

아모스 7장 10~17절은 선지자 아모스가 북이스라엘 왕국의 왕 여로보암 2세와 그의 왕실 제사장이었던 아마샤에게 가서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게 된 배경을 말한다. 그 당시 잘 나가던 여로보암 2세는 북이스라엘 왕국에 경제적 부흥을 가져온 왕이었다. 50여 년 동안 북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한 왕으로 아주 걸출한 치적을 이룬 자였다. 그 걸출한 왕에게 가서 아모스가 “당신의 벧엘 제단은 무너지고 말 것이고 당신의 왕국도 이내 박살납니다. 당신 끝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엄청나게 잘나가는 왕에게 아모스가 이렇게 외치니, 어용 제사장 아마샤가 와서 “네 나라 네 고국 남쪽에 가 예언하고 밥 먹고 살아라” 하고 맞받아쳤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예언하고 밥 먹고 살라”는 말이다. 당시에는 ‘예언하고 밥 먹고 살아가는’ 생계형 저주/축복을 남발하는 예언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미 3:5~11). 

요즘으로 말하면, 지방 유력자들이나 기업을 찾아가 불리한 기사를 쓰겠다고 은근히 압박하면서 사는 타락한 기자, 타블로이드판 신문에 기자로 이름을 걸어놓고 금품갈취를 위해 유력자들을 위협하는 공갈협박범에 준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돈 많은 부호나 지주에게 가서 공갈치고 나서 돈 뜯어내는 그런 뜨내기 예언자들과 자신이 얼마나 다른가를 강조하기 위해 아모스는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다”(7:14)라고 응답한다. 자신은 직업적 생계예언자나, 그런 예언자 밑에서 문하생으로 일하는 견습예언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 예언하는 예언자가 아니다. 나는 사실상 동산과 부동산이 꽤 많다. 우리 집엔 땅이 많다. 그리고 나 공부 많이 했다’라는 요지의 말을 한 것이다. 그의 예언 전체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변명으로도 들리는 듯하다. 

‘나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르심으로 예언자가 되었다. 나는 나의 고향 드고아 일대를 지나다니는 대상들을 통해 국제정세는 물론이요 소소한 지방적 쟁점들까지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나는 <타임>지, <가디언>지, 신화사통신, 블룸버그 통신, CNN, <르몽드>지도 탐독하고 청취해 왔다.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중농의 삶을 즐기던 나를 하나님이 어느 날 예언자로 부르셨다. 그 후부터 나는 신적 압박에 추동되어서 어쩔 수 없이 이 먼 데까지 와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모스 1~2장을 보면, 아모스가 약 예닐곱 나라의 국제정세를 완벽하게 통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자유농민이었던 농부 아모스는 자기 삶의 자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된 쟁점들을 하나님의 뜻과 의지의 빛 아래서 해석하고 그것을 광장과 성문에서 외쳤다. 국제조약을 어기는 아람의 불의와 신의 배반 사태부터 시작해서 국제적 곡물 수급현황까지 다 다룬다. 각 나라에 있는 핵심 죄악 사건들과 시리아-가나안 소왕국들에 일어날 미증유의 환난과 격변을 말한다. ‘그 나라들의 참혹한 죄들을 징치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북쪽으로부터 한 나라를 일으킬 것이다. 세계만민의 죄를 심판하실 하나님의 의지를 대행할 세계적인 심판국가가 그 나라들을 유린하고 약탈할 것이며 그중에서도 북이스라엘은 그 세계적인 심판국가에 의해서 철저히 짓밟힐 것이며 여로보암 왕실은 딴 나라로 잡혀갈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텍스트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역사적인 사건은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고 본문만 가지고 설교할 수 있는 자기충족적 강해설교를 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철두철미하게 당대의 사건들과 사태에 텍스트를 밀착시켜 적용했고, 죄악된 청중을 압박했고, 회개와 통회를 촉구하는 설교를 했지, 단지 토라 구절을 기계적으로 읊조리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시대의 살아 있는 역사적 현장 안에서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지금 아우성치는 농민의 피맺힌 절규 속에서 당신의 현존을 대표하게 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그 땅을 빼앗긴 소작인들, 자유농민에서 노예급으로 전락하는 농민들의 아우성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대변했다.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여 말씀으로 누군가를 하나님의 대적자로 규정하는 것은 어렵고 위험한 작업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텍스트 안에만 가둬놓는 것은 더 위험하고 잘못된 일이다. 항상 초월적 중립자로 하나님을 보려는 것은 안이한 생각이다. 초월적 중립자의 위치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똑같은 수준의 죄인이다. 예언자들은 세상일에 아무 관심을 갖지 않고 초월적 중립상태를 늘 유지하는 아파테이아적인 하나님을 말한 것이 아니라 파토스적인 하나님, 이 세상 누군가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하나님, 이 세상의 국지적 현장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는 하나님을 말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고, 예언자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동시대의 시사를 정확하게 모르면 역사 속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설교할 수 없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초월적 중립자로 보지 않고 특정한 시공간에 일어난 사태 속에 ‘편드시는’ 하나님을 말했기 때문에, 예언자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었고 매우 당파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예언자가 된다는 말은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예언자가 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이입니다. 나는 말할 줄 모릅니다”라고 응답한다(렘 1:6). ‘말할 줄 모른다’는 말은 왕과 지배층과 지주들에게 죄를 탄핵하는 말을 할 용기가 없다는 뜻이다. 모세도 똑같은 말을 한다. “나는 혀가 뻣뻣하고 입술이 둔한 자입니다”(출 4:10). 모세가 말을 못한다는 말은 애굽의 절대주권자인 파라오에게 가서 ‘내 백성을 해방시키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도덕적 패기가 모자란다는 뜻이다. 예언자들이 말할 줄 모른다는 말은 강단에 서서 지금 죄지은 유력자들, 검은 기업의 대부들, 살벌한 악당들의 죄를 고발할 수 있는 대담함이 모자란다는 말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나 조계종이 아무리 타락해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종교를 찾는다. 종교단체가 타락하는 속도보다 일반 사람이 죄짓는 속도가 더 빨라서 아무리 교회가 타락해도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계속 몰려온다. 종교에 불황이 없는 이유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죄를 짓고 있는 데 비해,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의 간격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영혼의 죄가 너무 많이 누적되었다. 그래서 일종의 치사량에 가까운 크롬과 비소 같은 영적 중금속에 오염된 상황에서, 구원을 바라고 종교를 찾는다. 그런 사람에게 죄를 탄핵하고 회개하도록 도와주면 참된 의사가 된다. 그러나 그런 죄책감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이 시대의 중심 죄악과 그들의 죄를 연결시켜서 해명해주지 못하면 이 시대의 죄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암에 걸린 사람에게 마이신을 계속 주는 꼴이다.

자기의 죄가 너무 누적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절실하게 듣고 싶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려면, 시사 쟁점을 반드시 지적하고 언급해야 한다. 동시대의 역사 한복판에서 죄를 단죄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대변해야 교회로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회개와 용서의 복음을 외칠 수 있다. 예언자들은 자신이 조상으로부터 전승받았던 텍스트를 기계적으로 읊조리지 않고 그 텍스트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동시대에 누가 하나님의 대적자이고 누가 하나님께 후원받고 있는 자인지를 판가름해서 과감하게 선포했다. 이 과정에서 특히 국제정세를 자세히 말하는 이유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외국과의 군사동맹을 맺어 하나님의 심판(앗수르, 바벨론 제국의 침략)에 맞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함이었다. ‘국제정치에 의존하기보다는 이스라엘 자유농민을 위해 정의를 세우고 공평을 세우라. 이것이야말로 국방의 기초단위다.’ ‘정의로운 재판, 자비심 넘치는 이웃들의 연합, 하나님에 대한 참된 순종, 이것들이 있는 곳이야말로 난공불락의 시온성이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메시지였다.

예언서를 읽는다는 말은, 그 예언서의 정신과 예언서의 논법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 시대에 악과 죄의 문제를 분석하는 것이다. 지금 인권이 유린당하는 현실을 무조건 승인하는 사람이나 성경의 문자적 해설을 본문에 충실한 설교라고 말하면서 더는 현실 문제에 관해 말하지 않는 사람은 철저한 무당파성의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다. 철저한 무당파성의 하나님 숭배는 우상숭배다. 이런 초월적 무당파성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말하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교황 칙령과 제도에 대항하여 성경의 예언자적 저항정신 위에 구축된 교회다. 모든 개신교회의 설교는 제도권 교회 유지와 고수에 그 목적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데 투신되어 있다. 모든 설교는 예언자적인 설교일 수밖에 없다. 

찰스 링마가 쓴 《행동하는 신앙인에 대한 묵상》(죠이선교회)은 자크 엘룰의 저작들을 통해 공적 신앙의 실천을 돕는 큐티북이다. 미국의 중도복음주의자였던 닉슨 대통령의 안보 보자관이자 워터게이트 스캔들 주인공이었던 찰스 콜슨도 ‘www.breakpoint.org’를 만들어 기독교신앙의 공적 면모를 복구하려고 애썼다. 짐 월리스와 그의 잡지 <소저너스>(Sojourners), 빌리 그레이엄 등이 만든 <Christianity Today>도 이런 입장에서 기독교신앙의 공공화를 모색한다. 한국의 <복음과상황>도 약 25년 동안 경건주의적 세상도피주의가 판치던 한국 보수주의 교회 토양에서 태어나 예언자적인 관점에서 공적 신앙을 표현하고 공적 실천을 촉진하는 잡지다. 

결론

인간 세상이 야수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잡동사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공적 신앙을 논하지 않을 것이다. 각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 대속적 보혈공로를 믿고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구원확신을 갖고 살다가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기독교신앙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공적 신앙을 논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비록 이기적인 욕망추구를 하더라도 그 이기적 욕망이 공동선을 추구하는 지향이 분명한 개인들의 상호언약적 유대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공적 신앙을 추구할 것이다. 

최근에 정의론을 주도하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이러한 공동선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존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샌델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단지 공리적으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행동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존립을 위해 선험적으로 요청되는 내재적 규범에 부합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적 행복추구론을 비판하며 임마누엘 칸트의 규범적 공동선을 신봉하는 샌델의 정의론은 새삼스럽게 기독교야말로 이 공동선의 추구에 최적의 사상이며 실천강령임을 깨닫게 한다. 

미국의 중도우파 복음주의자였던 찰스 콜슨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미국 루터파 목회자인 리처드 존 뉴하스(Richard John Neuhaus)는 《벌거벗은 광장》(The Naked Public Square)이라는 책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 앞 광장 예언자들의 이미지를 호소하여 한 국가의 합법적 통치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법과 제도 아래 있는 종교적 진리의 암반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미국 기독교의 공적 광장 탈출로 인해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했다고 진단한다. 미국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은 정부행정, 공공정책 등의 영역에서 종교적 가치를 배제했기 때문에 온다고 본다. 

그가 보기에는 공적 광장을 비우고 떠난 책임은 교회에게도 있다. 배제당하고 철수당한 면도 있지만 기독교회가 스스로 탈출했다는 것이다. 뉴하스에 의하면 미국의 경우 일부 교단의 신학적 고립화와 일부 교단의 영적 지도력 결핍으로 인해 광장에서 멀어졌다. 한국의 경우 건전한 예언자적 공적 신앙이 성문 앞 광장을 비우면 그 빈 광장은 불건전한 극우 정치와 극우 종교의 위험한 불륜적 제휴 세력과 극좌적 정치와 극자유주의적 무규범의 동거 세력에 의해 점령당할 가능성이 크다. 

기독교회가 공적 신앙을 표출하고 세상살이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려면 광장을 떠나서는 안 된다. 광장, 거리, 시장, 성전, 궁궐, 전쟁터, 학교와 학문 모든 영역은 예언자들의 자리다. 그런데 이 자리는 박해를 초래하는 자리다. 기독교의 공적 신앙은 한 사회나 공동체 운명을 결정하는 리더들의 담론 자리에 나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질책하고 경고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예언자적 공적 신앙을 이어받아 감히 세계제국의 수도 로마의 가이사에게 가서 복음을 정당화하려고 했다. 이 바울의 기상도 공적 신앙이다. 

슬프게도 우리가 속한 한국교회는 지금 역청구덩이에 빠져 그돌라오멜 동맹군에 포획된 소돔과 고모라처럼 초라하다. 기독교 지도자의 도덕적·윤리적 몰락, 대형교회의 세습·재정비리 등의 병발, 신학적 지성들의 자폐적 동굴우상 추구, 자발적 게토화 등으로 한국교회는 성문 앞 광장을 떠나고 있다. 하나님의 종들은 어떻게든 성문 앞 광장으로 파송되지 않으려는 듯 자신을 찾아오는 사사로운 고객들을 위해 사적 점괘를 해석하고 복채를 수수하는 사적 신앙을 즐긴다. 바야흐로 사적 멘토링을 통한 종교시장이 확장일로에 있다. 사회정의 추구보다 과도한 심리치유 활동이 활개 치는데 이것은 사적 신앙의 인기 종목이다. 

구약성경의 율법 폐기, 구약예언자 신앙의 폐기, 급변하는 사건들과 쟁점들의 병발로 인한 혼란, 재난이 재난을 덮고 스캔들이 스캔들을 덮고 불의가 불의를 사면하는 이 형국에 독재정권의 등장을 경각시키는 경보장치가 울리는데도 우리는 무력하다. 이 무기력 속에 우리는 기도하고 회개하고 통회하며 하나님이 일으키는 새벽을 기다린다. 공적 신앙의 기상을 회복하는 한국교회가 도덕적 위엄과 윤리적 지선(至善)을 과시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새날을, 성문 앞 광장에서 우리의 죄악을 고발하는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자복하는 새날을 기다린다.     

 

김회권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공부했으며, ESF(한국기독대학인회)에서 회심하고 신앙 훈련을 받은 뒤 11년간 ESF 간사로 섬겼다. 장신대 신대원을 나와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석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1, 2》 《김회권 목사의 청년설교》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도행전 1, 2》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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