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호 커버스토리]

▲ 최삼열 제공

처참했던 첫 달리기
2010년 3월 1일, 새벽부터 이른 봄비가 내렸다. 내 인생의 첫 마라톤 대회가 이렇게 무산되는 건가 싶었다. 비가 오는 데도 대회를 강행하는 주최측이 미웠다. 무려 한겨레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마라톤 대회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분한 마음으로 대회장인 상암월드컵경기장까지 갔다.

대회 운영본부 부스에서 안내하는 직원들(나중에 집으로 오면서 든 생각인데 아무래도 알바 학생들 같았다)에게 진보언론을 자처하는 한겨레가 어떻게 참가자들의 안전을 무시하고 대회를 강행할 수 있냐고 진상을 부렸다. 이렇게 추운 날 비를 맞으며 뛰다가 사고라도 나면 책임질 거냐고 항변했다. 불쌍한 직원들(다시 생각해도 알바 학생들이 분명한 것 같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만 끔뻑거리며 서로를 쳐다볼 뿐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그러니 나의 항변(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진상)은 허공에 대고 휘두르는 주먹질에 불과했다. 나의 정당한(!) 항변으로 대회가 취소되기는커녕 책임 있는 관계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와 대책마련을 해줄 거란 기대마저 허망해지는 순간이었다. 빈주먹은 헛심만 쓰고 직원들(알바가 고딩이었나?)이나 나나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기록계측용 칩을 반납하고 ‘완주 봉다리’(간식과 완주 메달이 담긴 봉투)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씁쓸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마라톤 대회는 비가 온다고 취소되지 않는다. 기록 달성에 방해가 되고, 발이 붓지 않게 신발과 양말을 잘 관리해야 하는 등의 주의사항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러너들은 비를 개의치 않고 뛴다. 오히려 비를 맞으며 뛰는 것을 즐기는 ‘덕후’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3월 1일은 늦겨울의 매서운 날씨가 여전한 시기이다. 체감상으론 아침 기온이 거의 영하에 근접한 기분이었다. 거기다 비까지 부슬부슬 내렸으니 ‘쪼렙’(조그마한/낮은 레벨) 마라토너의 기를 죽이기엔 완벽한 날씨였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첫 마라톤 대회 참가는 이렇듯 허무하게 좌절되었다.

진정한 첫 대회는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열렸다. 걱정과는 달리 이번에는 무난히 10km를 완주할 수 있었다. 물론 심장은 시작부터 터질 것 같았고 8km쯤에선 지옥의 문턱을 살짝 밟은 것도 같았지만 어쨌든 마지막 골인 지점이 눈에 들어오고부터는 그럭저럭 스퍼트도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이 날렵한 아식스 러닝화를 신고 달리던 주자들 틈에서 무겁고 둔탁한 운동화를 신고도 54분대로 들어 올 수 있었고, 이 기록은 아직까지도 내 최고기록으로 남아 있다. 연습할 때도 한번도 10km를 뛰어 보지 못했으니 이 거리는 내가 그때까지 달린 가장 먼 거리였다. 내 자신이 너무 기특해 그 날 집에 오자마자 날렵한 아식스 러닝화를 사서 나에게 선물하기까지 했다. 

구독안내

이 기사는 유료회원만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 온라인구독 회원은 로그인을 해주시고 인증 절차를 거치면 유료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월 1만 원 이상), 온라인구독(1년 5만 원) 회원이 아니시면 이번 기회에 〈복음과상황〉을 후원, 구독 해보세요.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