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호 김기석 목사의 욥기 특강 12] 욥 18장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욥기 18장에 나오는 빌닷 사람 수아의 말을 단초 삼아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앞장에서 욥은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가는 것 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오죽하면 그런 말을 했을까요? 당사자가 아닌 한 그런 심정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친소관계에 따라 그 아픔은 아주 다른 빛깔로 다가옵니다.

가까운 사람의 고통은 우리 가슴에도 큰 아픔을 안겨줍니다. 다소 먼 사람이 겪는 고통은 그렇게 아프게 느껴지지는 않지요? 실제로 세상의 모든 고통이 우리에게 예리한 고통으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심장이 터져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자기 삶을 든든하게 감싸주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세상에 알몸으로 내동댕이쳐진 욥의 신음과 탄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스토아적 초연함이나 일체의 고통이 집착에서 온다는 불교적 사변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엘리트적이어서 저처럼 조금만 아파도 ‘아야’ 소리부터 내는 사람들, 살과 피를 가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는 조금 어려운 것 같습니다. 경험해 보지 않은 고통 앞에서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좋습니다.

“너 때문에”라는 말의 무서움
하지만 빌닷은 입을 다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18장 2절을 볼까요?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이 구절에서 언급된 ‘너희’는 (복수 형태인 것을 보면) 욥은 아닐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벗들을 부추기기 위해 하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공동번역개정판은 이것을 조금 더 분명하게 번역해놓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참이오? 잘 생각하여 말 좀 해줍시다.” 그런데 새번역은 이 구절을 좀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너는 언제 입을 다물 테냐? 제발 좀 이제라도 눈치를 채고서 말을 그치면, 우리가 말을 할 수 있겠다.” 빌닷이 욥을 책망하는 것으로 번역한 것이지요. 이런 차이는 물론 각각의 번역이 택한 원본의 차이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쪽을 받아들여도 상관없습니다. 빌닷이 하고 싶은 말은 다음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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