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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H. 요더의 성폭력과 메노나이트 교회의 대응 2
[303호 심층 탐구]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303호] 2016년 01월 26일 (화) 14:08:16 김성한 IVF 간사 goscon@goscon.co.kr

성직자들과 종교지도자들에 의한 성폭행은 희생자들과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심각한 피해와 고통을 남긴다. 어쩌면 이런 형태의 폭력이야말로 영적인 권력을 가장 나쁜 방식으로 남용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평화신학자 요더의 성폭행은 복잡한 질문들을 남겼다. 단지 그가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의 신학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재세례파-메노나이트 평화신학(Anabaptist-Mennonite Peace theology)의 매우 독특한 표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제자도의 핵심으로 비폭력과 평화의 원칙을 강조하는 사람이 어떻게 많은 여성을 고통받게 한 폭력의 주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평화교회를 지향하는 미국의 메노나이트 교회는 이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어떻게 실패했는가?

   
▲ '우리들의 말 못한 이야기'(Our Stories Untold)웹사이트(www.ourstoriesntold.com)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요더는 1967년부터 AMBS의 전신인 고센성경대학원(Goshen Biblical Seminary, GBS)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말린 밀러(Marline Miller) 총장은 GBS의 많은 여학생과 심지어는 미국 바깥의 여성들로부터 요더의 이상한 행동들에 대한 항의를 받고, 1976년경부터 요더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밀러 총장은 ‘요더의 잘못을 설득하는 것이 신대원 총장으로서의 숨겨진 가장 큰 업무’가 되어버렸다.(구슨 2015, 29~39)

현재의 시선으로 보면 요더의 문제를 다루는 밀러 총장과 학교의 방식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밀러는 요더를 즉각 해임시키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1970년대 미국에서조차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에 대한 뚜렷한 정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는 시대적 차이를 이해할 필요는 있다. 요더의 성폭행에 대한 밀러의 반응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은 마태복음 18장 15절 “신도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신도를 얻은 것이다”(표준새번역)라는 가르침을 순진하다 싶을 정도로 문자적으로 적용했다는 점이다. 밀러는 1976년부터 1980년까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는 성경 구절에 기초해서 요더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비밀스러운 시도를 계속하였다. 하지만 결국 밀러는 다음 단계인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1984년 요더가 GBS를 떠나 노트르담 대학교(Notre Dame University)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커버넌트 그룹’(1980-84)과 ‘컨피덴셜 테스크포스’(1982)와 같은 형태로 그룹 단위의 해결을 시도한다. 이때까지도 밀러를 포함한 학교의 리더십들은 요더의 결혼 관계와 가정을 지키고 ‘결혼 관계 바깥에서의 친밀함’에 대한 요더의 실험을 멈추게 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실패했다. 요더는 해임에 가까운 모습으로 학교를 떠나게 되었지만 왜, 곧이어 노트르담에 전임으로 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이유는 공개되지 않았다. 요더의 사임을 알리는 밀러의 메모로 짐작해 볼 뿐이다.

“존 하워드 요더는 고센성경대학원을 1984년 6월 1일자로 사임했습니다. 그의 사임은 상호동의로 이루어졌으며 아주 오래된 이슈들을 다루는 과정의 연장 선상의 결과입니다.”(밀러 1984)

30대 후반의 나이에 신학교 총장이 된 밀러에게 요더는 너무 크고 어려운 상대였다. 밀러는 요더의 제자이기도 했다. 쿤츠는 “요더와 밀러 사이에는 큰 힘의 차이가 있었으며 이것이 작용했다고 봅니다. 존은 또한 아주 훌륭한 조종자(manipulator)였으며 논쟁에도 강했습니다. 밀러가 바보가 아니었지만, 그는 요더에게 어떤 부분에서는 꼼짝없이 조종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쿤츠 2015)

이제 요더가 GBS를 떠났기에 그가 속한 프레이리스트리트 메노나이트 교회(PSMC)와 인디애나-미시간 메노나이트 콘퍼런스(IMMC)가 요더에 대한 책임-“교회에 말하여라”-을 갖게 되었다. 그 시도들은 ‘프레이리 교회의 장로회’(1986) ‘프레이리 교회 존하워드요더 테스크포스’(1991-92) 그리고 ‘인디애나-미시간 콘퍼런스-교회 와 삶 위원회’(1992-96)를 통해 진행되었다.

1992년 2월 프레이리교회의 장로들을 통해 세워진 테스크포스는 미국 전역의 메노나이트 교회의 여성들로부터 요더에게 받은 피해에 대한 보고를 접수하고 그중 8명의 증언을 청취하였다. 테스크포스는 요더를 따로 소환하여 이 증언들에 대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마침내 피해자들의 증언이 참된 것임을 확증한다. 오랜 기간 계속된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드디어 교회에 들리게 된 것이다. 요더의 목회직을 정지하면서 발표된 위원회의 보도자료는 “요더가 성적인 경계들을 침범했다”(Yoder has violated sexual boundaries)고 언급했다.(IMMC-Church Life Commission)

1992년 6월 인디애나-미시간 메노나이트 콘퍼런스(IMMC)가 요더의 목회자격 정지를 결정하고, 그에 대한 징계와 회복을 위한 절차가 시작되었다. 요더는 징계기간 동안 집에서 가까운 루터란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지만 그의 멤버십이 있는 프레이리교회와 메노나이트 교단을 떠나지 않았다. 인디애나-미시건 메노나이트 콘퍼런스와 교단의 인물들로 구성된 책무와 지원 모임(Accountability and Support Group)이 4년 동안 요더를 정기적으로 만나며 그의 잘못을 바로잡고 회복을 돕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요더를 돌이키기 위한 이들의 지속적인 시도는 재세례파-메노나이트의 교회론과 깊이 관련되어있다. 하지만 죄지은 신도 하나를 돌이키기 위해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로 인해 고통받은 수많은 신도를 돌아보지 않은 이들의 교회론은 많은 의문을 남긴다.

사과문 발표를 거부한 요더
1996년까지 무려 4년간 계속된 징계 절차를 종결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요더의 징계 절차가 끝났음을 알리는 1페이지의 공식 발표문을 놓고 8번 넘게 초안이 쓰이고 회람되었다. 이 공식 발표문은 징계 절차에 참여한 주체들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요더의 아내인 애니는 징계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공식 발표문의 초안에 담긴 요더의 성폭행에 대한 표현을 “적절치 못한 행동”으로 바꿔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편지에 담긴 애니의 자기 인식이다. 이 편지에서 애니 자신을 남편이 저지른 성폭행의 피해자라기보다는 몇 년 동안 계속되어온 징계 절차의 피해자로 여기는 듯 보인다. 자녀들의 엄마와 한 남자의 아내로서, 애니는 이 공식 발표문이 가져올 또 다른 파장을 염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발표문 어디에도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의 내용이 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요더 자신도 오랜 징계 절차의 피해자로 자기를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인디애나-미시간 콘퍼런스는 요더가 이 공식 발표문과 함께 사과문을 발표할 것을 요청했지만, 요더는 이를 거부했다.(구슨 2015, 73)

요더의 징계 절차가 끝났음을 알리는 공식 발표문은 메노나이트 교회들과 관련된 신문과 잡지들에만 보내졌다. 이 발표문은 “교회와삶위원회와 인디애나-미시간 콘퍼런스는 요더와 교회들에 집필과 가르치는 은사를 사용하기를 격려합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이것이 요더를 직면하며 그를 바로잡기 위해 이루어졌던 일곱 번의 시도 중 마지막 4년 동안 계속되었던 징계 절차의 결론이었다. 당시 인디애나-미시간 콘퍼런스의 회장이었던 셤 카우프만(Sherm Kaufman)은 공식 발표문의 마지막 초안과 함께 자신의 편지를 요더에게 보냈다.

“존, 우리는 이것이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과 기도는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걷는 여정을 계속하는 동안 서로에게 조금 더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당신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신앙공동체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가운데 두신 당신의 은사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도록 쓰일 것을 믿고 있습니다.” (카우프만 1996)

이 편지는 앞서 살펴본 공식발표문의 결론과 닮은꼴이다. 여성들을 향한 요더의 파괴적인 행동들은 언제나 그의 기여와 함께 균형을 이루는 방식으로 다뤄졌다. 결코 독립된 주제로 다뤄지지 않은 것이다. 징계 절차와 과정의 최종 목적이 요더를 회복시키고 그를 복권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과정에서 희생자들에 대한 언급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유명한 신학자를 대상으로 한 4년의 징계 절차는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 1984년 GBS를 떠나 노트르담 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요더는 사실상 메노나이트 학문세계에서는 추방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1988년 기독교윤리학회(Society of Christian Ethics)의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학자로서의 명성을 흔들림 없이 계속 쌓아가고 있었다. 메노나이트 서클 안에서 제기되는 피해 여성들의 절규는 더 넓은 바깥세상에서는 들리지 않는 외침이었다.

실제로 한 번도 목회를 한 적이 없었던 요더에게 ‘목회직 정지’가 어떤 의미가 있었을지 의문으로 남는다. 또한, 징계 후 요더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교회 앞에 더욱 복잡한 도전들을 남겨 놓았다. 나아가 요더가 진실로 자신의 비행들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후회하고 회개하였는지에 대한 충분한 증거들이 없고 그 의심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구슨 2015, 73; 쿤츠 2015).

들려지지 못한 피해자들의 이야기
요더와 관련된 이 오래된 논란의 다른 측면은 그의 명성이 그가 사망한 뒤에 더욱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사망하고 오히려 그의 책들과 그에 대한 책들의 출판은 늘어났다. 2000년 4월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는 20세기를 대표하는 10권의 책을 선정해서 발표했는데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1972)은 그중에 다섯 번째로 선정되었다.

한 자연인으로서 요더는 사라졌지만, 신학자로서 학자로서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살아있다. 최근의 독자들은 요더의 성폭행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그의 많은 희생자들은 여전히 요더의 폭력과 교회의 침묵이 만들어 놓은 그늘에 머물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끝내 들려지지 않았다. 이 ‘난처한’(awkward) 상황은 수많은 피해 여성들과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왔다.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의 공식 잡지인 <더 메노나이트>의 편집자로 일했던 에버렛 토마스(Everett Thomas)는 인터뷰에서 한 독자로부터 받았던 성난 편지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2013년 6월호에 편집자 중 한 명인 고든 하우서(Gordon Houser)가 요더의 책과 요더의 신학을 다룬 책을 나란히 소개한 뒤였다. 요더의 희생자들과 가까운 친구인 바바라 그레이버(Barbra Graber)로부터 엄청난 분노가 담긴 편지를 받게 된다.

구역질 나는 요더에 대한 추천사

고든 하우서는 90년대 초 콜로라도에서 열렸던 “여성들을 향한 폭력을 멈추기 위한 남성들”이라는 세미나에 참석했지만, 거기에서 다뤘던 내용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를 따르는 것에 대한 존 하워드 요더 가르침을 다룬 “놀라울 정도로 적실한” 책을 어서 사서 읽어보라는 글과 (지난 6월 미디어와 문화란) 교회가 조직적으로 만성적인 요더의 성폭행과 오랫동안 전 세계의 여성들을 상대로 저지른 잘못들을 은폐해왔다는 모순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은 꽤 역겨운 일이다.

하루를 망치는 것 같았다. 그의 폭행을 견뎌왔지만, 교회로부터 그 어떤 공식적인 사과와 보상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여성들의 얼굴에 찬물을 한 잔 더 끼얹는 셈이다. 그들의 포식자에게 또 다른 영예가 더해진다. 단지 더 “평화를 외쳐라, 평화가 없는 곳에서 평화를 외쳐라”와 같은 꼴이다. 메노나이트 교회의 평화주의 신학은 교회의 남성들이 똑같은 열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매 된 자들과의 평화를 추구하며 그들의 가정과 교회의 여성과 어린이들을 향한 폭력이 멈추도록 일할 때까지는 거짓일 뿐이다. 존 하워드 요더의 삶과 그의 가르침 사이의 윤리적 모순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 바바라 그레이버 (헤리스버그, 버지니아)

다음은 “구역질”에 대한 응답이다.

바바라가 요더의 폭력적인 행동들에 비춰볼 때 그의 저작들이 모순을 일으킨다는 점을 지적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학자로서의 그의 통찰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고든 하우서, 더 메노나이트 부편집장 (2013년 7월, 더 메노나이트)

2013년 메노나이트 교단의 공식 기관지의 지면을 통해 이루어진 이 날 선 의견 교환은 요더의 성폭행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다시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2013년 7월호를 기점으로 더 메노나이트는 독자들로부터 도착한 많은 편지를 다루게 되었다. 그리고 메노나이트 교회의 리더십은 이미 치리를 받았으나, 세상을 떠난 요더가 남긴 숙제들을 새롭게 다뤄야 할 부담이 남았음을 깨달았다. 

새로운 시대의 오래된 이야기
2013년 여름을 기점으로 나타난 요더의 성폭행에 대한 최근의 논란과 그에 대한 교단 차원의 반응에서 우리는 미디어가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더 메노나이트에 실린 바바라의 공개적인 반박 편지는 예상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편집장이었던 토마스는 그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말한다. “편집자로서 저는 이 의견을 싣는 것에 대해 미리 생각해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는 (교단 차원에서) 모든 사람에게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요더의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이 되었죠.”(토마스 2015) 교단의 공식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더 메노나이트>의 이런 전향적인 결정은 이어지는 요더에 대한 교단 차원의 반응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우선 셍크와 스투즈만은 광범위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블로그를 소통의 방식으로 택했다. 이런 소통 방식은 비밀스럽고 불투명했던 교단 차원 반응과 명확한 대비를 이뤘다. ‘공개성’과 ‘투명성’은 최근에 일어난 요더의 성폭행 논란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더 메노나이트>는 왜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요더의 성폭행과 관련된 침묵의 보도 관행을 바꾸게 된 것일까? 무엇이 교회 지도자들의 빠른 반응을 불러일으켰을까? 여러 가지 원인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셍크가 블로그에 쓴 글의 제목처럼 “성령께서 그러하듯 정해진 때가 오는 법”이다. 요더에 대한 논란은 이제 새로운 무대로 나오게 되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미디어의 역할은 최근 다시 시작된 요더의 논란의 중요한 측면이다. 웹을 기반으로 하는 소통 방식은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의 변화는 새로운 역학 관계를 가능케 한다. 예를 들어 1970년대와 1990년대 교회의 (남성) 지도자들 앞에서 요더의 성폭행에 문제를 제기했던 피해 여성들은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비대칭적 권력관계를 경험했다. 요더만이 여성 피해자들에게 권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었다. 메노나이트 교회와 그 기관들 역시 피해자들에게 권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여성 피해자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거나, 어쩔 수 없이 겨우 받아들였으며, 피해자들을 보호하거나 치유할 수 있었음에도 그 힘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들의 말 못한 이야기’(Our Stories Untold)라는 웹사이트는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하여 비대칭적 권력관계를 극복한 좋은 예다. 이 사이트는 ‘웹사이트로서 영적인 공동체(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일어나는 성적인 폭력에 관해 토론할 수 있는 안전하고 열린 공간’을 표방하며 2012년 6월 5일에 만들어졌다. 이 공간은 성폭행 피해자들에게 안전한 공간으로 자신이 당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사용자들이 (주로) 메노나이트 교회 안에서 겪은 성적인 폭력의 경험을 나누는 동안 요더의 이야기와 그에 대한 가부장적 메노나이트 교회의 반응은 자주 호출되었다. 적어도 이 블로그에서 요더는 존경받는 저명한 신학자가 아니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성폭행 가해자’였다.

루스 크랄(Ruth Krall)의 ‘인내의 공간’(Enduring Space)도 요더의 성폭행와 관련해 웹을 기반으로 소통하고 있다. 크랄은 임상 정신건강 의학자로 고센대학의 평화, 정의, 갈등 연구 프로그램의 디렉터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이미 1970년대 말 요더의 성폭행을 인지하고 밀러 총장에게 문제를 제기했던 인물이다. 2011년 8월에 시작된 이 웹사이트를 통해 성직자들의 성폭행 문제를 다룬 ‘하나님의 거실 안의 코끼리’라는 단행본 네 권 분량의 에세이들을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물론 이 서비스의 목적은 성직자들의 성폭행 문제의 심각성과 그 피해를 널리 알리기 위함이며 그 심각한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존 하워드 요더의 성폭행과 메노나이트 교회의 반응’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모든 자료는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어 있다.

2013년 ‘식별그룹’(Discernment Group)의 구성은 메노나이트 교회 지도자들이 택한 긍정적인 첫걸음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셍크와 스투즈만이 이 식별그룹을 주도한 것이 아니다. 피해자들과 그들의 친구들이 가상공간 안에서 계속해서 진실을 밝히라며 압박하고 있었기에 요더의 성폭행 이야기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결론을 대신하여
요더의 비밀스러운 실험에 대한 소문은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불거져 나왔지만 요더의 성폭행에 대한 언론의 최초 폭로는 1992년 6월 29일 되어서야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AMBS와 프레이리교회가 위치한 인디애나 주의 엘크하르트의 지역 신문인 <엘크하르트 투루스>(The Elkhart Truth)의 톰 프라이스(Tom Price)라는 기자의 보도로 다섯 번에 걸친 요더의 성 추문 탐사보도였다. 기사 제목은 ‘신학자 성적 조사에 소환되다’(Theologian cited in sex inquiry)였다. 이 특종 기사는 IMMC가 요더의 목회자격 정지를 결정한 6월 27일에 뒤이은 것이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프라이스의 특종기사에 앞서 캔자스 주 노스 뉴튼(North Newton)에 위치한 메노나이트 대학인 베델대학(Bethel College) 학생들의 저항이 요더의 성추문에 대한 공개적인 폭로를 촉발시켰다. 요더는 이미 그 1년 전부터 베델대학에서 준비하고 있는 ‘미국인의 경험 속의 폭력과 비폭력’이라는 콘퍼런스의 주강사로 초대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1992년 4월에 열리는 이 콘퍼런스를 앞두고 요더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베델대학에도 알려졌다. 그리고 이 소식은 학교 내에서 요더에 대한 찬반 논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대학 신문인 <컬리지안>(Collegian)은 요더에 대한 초청이 취소되었다는 기사를 내었고, 이어서 <메노나이트 월드 리뷰>(Mennonite World Review)는 “베델대학이 성적 비행에 대한 혐의를 받는 신학자의 강연을 취소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구슨 2015(b); Juhnke 2014).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준으로 보자면 요더의 성폭행에 대한 메노나이트 교회의 반응은 이해하기 어렵다. 시대가 만드는 어쩔 수 없는 사회적-문화적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피해자들이 겪은 정신적-육체적-영적인 피해를 돌보기보다 ‘저명한 신학자’와 ‘완전한 교회’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교회의 모습은 몹시 실망스럽다. 하지만, 곳곳에서 요더의 큰 그늘에 가린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애쓰고 저항했던 이들이 있었다. 피해자들의 친구였던 바바라와 루스가 있었고, 불의에 분노하는 베델대학의 학생들이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REFERENCE LIST

 

Christianity Today. 2000. “Books of the Century”Christianity Today (April)  http://www.christianitytoday.com/ct/2000/april24/5.92.html (accessed August 3, 2015).

Goossen, Rachel Waltner. 2015. “Defanging the Beast”: Mennonite Responses to John Howard Yoder’s Sexual Abuse. Mennonite Quarterly Review 89: 3-80

______________________. 2015 (b). Campus Protests and John Howard Yoder, 1985-1997. Mennonite Life 69. http://ml.bethelks.edu/issue/vol-69/article/campus-protests-and-john-howard-yoder-1985-1997/ (accessed August 3, 2015).

Graber, Barbra. 2013. Letter: Sickened by Yoder reference. The Mennonite (July) https://themennonite.org/wp-content/uploads/2014/10/07-01-2013-A-new-journey-for-new-moderator-Elizabeth-Soto-Albrecht.pdf (accessed August 3, 2015).

 Juhnke, C. James. 2014. The dicision to disinvite John Howard Yoder to speak: An interview with James C. Juhnke, former history professor at Bethel College. The Mennonite 17: 44-46.

Koontz, Ted. 2015. Interview by author. Elkhart, Indiana. May.

Krall, Ruth. 2013. The elephants in Gods living room - Volume 3 The Mennonite Church and John Howard Yoder. http://ruthkrall.com/downloadable-books/volume-three-the-mennonite-church-and-john-howard-yoder-collected-essays/ (accessed August 3, 2015).

Our Stories Untold. 2012. http://www.ourstoriesuntold.com/about/ (accessed August 3, 2015).

Price, Tom. 1992. Theologian cited in sex inquiry. The Elkhart Truth. https://www.scribd.com/doc/259603810/1992-Investigative-Series (accessed August 3, 2015).

Roth, John. 2015. Interview by author. Goshen, Indiana. May.

Thomas, Everett. 2015. Interview by author. Goshen, Indiana. May.

 

 

Archive

“John Howard Yoder Resignation” May 7, 1984 (AMBS Marlin E, Miller Files on John Howard Yoder, X-18-001) Mennonite Church USA Archives-Goshen.

“News Release” June 27, 1992 (Indiana-Michigan Conference on Church Life Commission on John Howard Yoder II-05-019, 1/6) Mennonite Church USA Archives-Goshen.

“A letter from Annei Yoder to Gordon Dyck” April 1, 1996 (JHY Folder #9 1994-1996 II-05-019) Mennonite Church USA Archives-Goshen.

“A letter to Yoder from Sherm Kauffman” May 17, 1996 (JHY Folder #9 1994-1996 II-05-019) Mennonite Church USA Archives-Goshen.

“News release – Disciplinary process with John Howard Yoder draws to close” May 17 1996 (JHY Folder #9 1994-1996 II-05-019) Mennonite Church USA Archives-Goshen.

 

김성한
IVF(한국기독학생회) 춘천지방회 대표간사로 IVF미디어 사역부와 인디밴드 코드셋 멤버로 활동했고 철학, 교회사, 평화학을 공부했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3년간 이 글에 자주 등장하는 미국 인디애나 주의 고센에서 살면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박사 과정(Intercultural Studies)을 공부했다. 현재 한국 기독교의 민족복음화 담론에 대한 논문을 붙잡고 씨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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