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호 김기석 목사의 욥기 특강 14]

욥과 엘리바스의 세 번째 논쟁 이야기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가끔 이 논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욥은 어떻게든 그를 논파하려는 세 논적들의 파상 공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의 편에 서서 변론해주는 이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외톨이입니다. 공자는 《논어》 이인(里仁)편에서 “덕스러운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벗이 가까이 있다”(德不孤必有隣)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욥은 덕이 없는 사람입니다. 과연 그런가요? 선뜻 수긍하기가 어렵습니다. 실제로 욥의 친구들은 이 시대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우정의 본이었습니다. 그 먼 길을 불원천리하고 찾아와 고통을 겪고 있는 친구 곁에 이레씩이나 머무른다는 건 보통 우정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이견이 생기면서 모든 게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의 차이가, 멀쩡하던 우정에 금이 가게 만든 셈이지요. 사실 우리도 한국의 개신교인 수가 몇 백만 명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믿음과 생각이 동질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종교인들과 대화보다 어려운 것이, 개신교 내에서 신학적 입장이 다른 이들과의 대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실은 저도 이런 사실을 절감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과연 우리가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회의에 빠지곤 합니다. 에베소서는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엡 4:5~6a)이라고 말합니다. 누가 이것을 부정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마다 그 각각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 다릅니다.

22장부터 27장까지가 논쟁의 3라운드인데 한 가지 특색은 엘리바스의 말은 비교적 길지만 특별한 내용이 없고, 빌닷의 말(25장)은 아주 간략하고, 소발의 말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뭘 암시하는 걸까요? 경험보다 이론에 근거한 친구들의 신학은 더 큰 확장성을 갖기 어렵다는 것 아닐까요? 신학자들 가운데는 소발의 말이 편집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욥의 말 속으로 흡수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일면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여기서는 복잡한 편집비평을 적용할 수는 없으니까 현재의 텍스트에 의거해 본다면 친구들은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별로 없는 셈입니다. 권투 중계를 보면 해설자들이 가끔 ‘때리다가 지친다’고 말하던데 욥의 친구들이 꼭 그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욥은 친구들에게 말로 뭇매를 맞으면서도 제 속에 있는 의문을 해소해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여전히 할 말이 많습니다. 이제 엘리바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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