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호 커버스토리]

저는 지금 스무 살이고, 엄마 아빠, 두 명의 동생이 있습니다. 우리 엄마는 막내 동생이 태어난 이후로 쭉 병상에 누워서 생활해오셨어요. 막내 동생을 출산하고 이틀 만에, 외할머니 댁에서 엄마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갑작스럽게 듣고 가족들과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그날부터 쭉 누워있는 엄마와 생활하게 되었지요. 엄마가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기 때문에 의사소통은 대부분 엄마의 눈 깜빡임으로 하면서요. 엄마에게 질문을 하고 “맞으면 한 번, 아니면 두 번 깜빡해봐요” 하는 식으로요. 이게 최선이었지요. 

‘일어나지 못하실 수도 있겠구나…’

엄마가 쓰러지고 처음엔 엄마가 아프다는 걸 제대로 몰랐어요. 그때의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제가 너무 어려서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거 같아요. 다만 초등학교 3학년 때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어요.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고 처음 학교에 가던 날 엄마가 아닌 아빠 손을 잡고 학교에 갔던 기억인데, 돌이켜 보면 그때 엄마가 아프다는 걸 체감한 것 같아요. ‘엄마가 더 이상 나와 함께 생활할 수가 없구나, 엄마가 하던 일을 아빠가 하게 되는 구나’ 하고요. 그리고 제가 동생들 밥을 챙겨야 하거나, 친구들이 엄마 이야기를 할 때 등 일상의 사소한 부분들에서 엄마의 부재를 불쑥불쑥 느끼곤 했지요. 슬프다기보다는 그때마다 ‘아 우리 엄마는 아프지’ 하는 생각을 덤덤하게 했던 것 같아요. 

엄마는 10년을 넘게 누워서 생활하셨기 때문에 욕창 같은 것들이 생기고 낫기를 반복했어요. 화상을 입어서 다리 한 쪽을 잃기도 하셨고요. 엄마도 정말 힘드셨을 거예요. 처음엔 기도할 때마다 항상 ‘엄마가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렸지요. 당연한 일처럼 기도를 했고, 그때마다 ‘엄마가 일어나겠지’ 하는 기대도 빼먹지 않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기도할 때 그 기도를 자연스럽게 하지 않게 되었어요. 엄마가 일어나실 거라는 기대감이 점점 줄고, 지금은 엄마가 일어나지 못하실 수도 있겠구나 싶어요.

이런 상황들이 원망스러울 때도 물론 있었어요. 잠을 참으며 엄마의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가래를 빼줄 때, 친구들과 놀고 싶은데 엄마를 돌봐야 하는 날이면요. 제 일이 바빠서 막내 동생을 씻기거나 옷을 입혀주고 머리를 묶어주는 게 굉장히 귀찮았던 적도 있고요. 가끔 내 몸이 아픈데도 아무도 몰라주거나 하면 괜스레 서운한 적도 있었지요. 

그래도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엄마의 빈자리를 엄청나게 많이 느낀 것 같진 않아요. 어릴 땐 주변에 사시는 교회 ‘이모’들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늘 곁에서 우리들을 돌봐준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살면서 한 번도 도움 없이 산 적이 없다고 할 정도네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생활에서 도움을 많이 받고, 위로도 되었지요. 그분들에겐 살면서 항상 감사해야 할 것 같아요.

   
▲ 사진: 김윤영 제공

모든 삶은 나쁜 점도, 좋은 점도 있는 것

가끔 아빠가 ‘네가 제일 크고 맏이니까 엄마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고 할 때면 ‘아, 나도 아직 어린데, 엄마 역할을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생각하기도 했어요. 조금은 부담이 됐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뭐. 나름 최선을 다해서 동생들을 챙겼는데 엄마 빈자리를 채울 만큼으로 하진 못한 거 같아요. 아빠도 혼자서 집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이 많았을 텐데, 참 외로웠을 것 같아요. 그런데도 늘 밝았던 아빠를 보면서 저도 동생들도 밝게 자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빠는 슬픔을 갖고서도 다른 슬픔을 가진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사람인데, 그런 게 참 멋있어요.

동생들을 생각해보면, 첫째 동생인 윤서(16)는 이제는 저처럼 엄마의 부재를 자연스럽게 느껴서 덤덤해졌을 것 같은데, 막내 동생 윤지(12)는 ‘다른 사람들처럼 ‘엄마’라는 말에 느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엄마’나 ‘작은엄마’나 ‘큰엄마’나 모두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셋 중에 윤지가 지금도 엄마의 관심이 가장 필요할 나이일 텐데, 그 부재를 가장 크게 느끼고 있을 것도 같고요. 

엄마가 아프지 않으셨다면 매일 아침 윤지 머리도 묶어주고, 옷도 골라주고, 씻겨도 주고, 숙제도 챙겨주셨을 거지만 윤지는 거의 혼자서 그런 일들을 잘 해내고 있어요. 생각해보니 한 번도 우리들끼리 엄마가 아픈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는 것 같네요. 아마도 제 성격상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게 잘 안되기도 하고, 동생들이 아직 어려서겠죠.

사람들 모두 각자의 삶이 주어져 있듯, 저와 우리 가족도 고유한 삶이 있는 거라고 여겨요. 엄마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변화였지만, 그 사건으로 일어난 변화들이 우리 가족의 원래 삶이기도 해요. 모든 삶이 그렇듯 나쁜 점도 있고 좋은 점도 있는 거지요. 제 역할이 더 많아지니까 책임의 양도 늘어나고, 남들은 경험하지 않았을 아픔도 받아야 했지만, 그 아픔이 없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분들도 만나게 되었어요.

이렇게 엄마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평소에 못하던 말이지만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겨서 남겨보고 싶네요.

아빠, 힘든 상황에 굴하지 않고 늘 밝고 건강하게 우리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챙기는 모습이 정말 멋있어요. 이제는 제가 성인이 되었는데도 집안일도 많이 못하고 맨날 싸돌아다녀서 미안해요. 아침에 애들 챙겨서 보내고 싶은데 몸이 안 일어나져서요.^^ 앞으로도 밤에 작업하는 일이 많으면 늦게 들어올 텐데, 걱정하시지 않게 연락 자주할게요. 앞으로 올 날들을 더 즐겁게 살아요. 아빠 사랑해요.

윤서야, 누나의 잦은 ‘물 심부름’ ‘스위치 심부름’과 괴롭힘을 받아줘서 고마워. 맨날 노는 것 같아도 주일마다 교회 애기들도 돌보고, 예배시간 봉사도 하는 니가 정말 대견해. 잘 커줘서 고맙다. 윤지만 덜 괴롭히면 아주 완벽할 것 같아.^^ 우리가 예전보다 많이 컸으니까 아빠랑 윤지를 더 도와주자. 아주 사랑해.

윤지야, 언니가 미안한 게 많아. 매일 아침마다 머리도 묶어주고 옷도 골라주고 싶은데, 몸이 안 일어나져. 생각은 안 그런데 쌀쌀맞게 대한 적도 많고. 많이 반성하고 있어. 알아서 똑똑하고 예쁘게 잘 커준 게 정말 고마워. 만화가가 되고 싶다면서 매일 노트에 열심히 만화를 그리고 있는 니 모습을 보면 노력하는 모습에 내가 더 반성하게 돼. 앞으로도 멋있게 커줘. 나도 옆에서 도와줄게. 아주 사랑해.

엄마, 윤영이에요. 엄마가 요양원에 계시고 제가 고3이 되면서 입시로 바빠서 많이 찾아뵙지를 못했어요. 대학생이 되면 맨날 엄마를 보러가려고 했는데, 대학생활도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바쁘네요. 미안해요. 엄마, 지금은 엄마 목소리, 엄마의 말투, 걸음걸이 같은 것들이 잘 기억이 안나요. 기억 안 나는 것투성이어서 엄마가 일어난 모습이 많이 보고 싶어요. 중간고사 기간이 끝나면 엄마한테 많이 놀러갈게요. 엄마 사랑해요.

  

김윤영
올해 대학생이 된 16학번 새내기로, 미술을 전공한다. 아픈 엄마와 멋진 아빠, 그리고 두 명의 동생과 즐겁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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