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호 커버스토리]

   
▲ 올 초 강원도 여행 중인 '꽃다운 친구들' (사진: 이수진 제공)

‘꽃다운’ 친구들과 함께 지낸 지 반 년이 되었습니다. ‘꽃다운친구들’(꽃친)은 창조적 쉼을 고민하는 청소년과 그 가족들의 모임입니다. 열여섯, 열일곱 꽃다운 나이의 청소년들이 자신을 탐색하면서 자기만의 속도와 자기 페이스를 찾아가도록 응원하고 격려해주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올해 열한 가정의 청소년들은 중학교 졸업 이후 고등학교 진학을 잠시 보류하고 조금 긴 방학을 선택했지요. 무려 1년이나 되는 긴 방학입니다. 저는 이들의 긴 방학을 부추긴 장본인입니다.

왜 부추겼을까요? 2012년에 중학교를 졸업한 제 딸과 1년의 방학을 지내 봤는데, 나쁘지 않았고 유익한 점이 있었기에 다른 가정에 권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상으로 조금 더 앞서 있던 일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 가정의 경험-고등학교 진학을 1년간 유보한 딸의 안식년-을 궁금해하는 분들이 심심찮게 질문을 하시는 것을 보면서 비록 소수이기는 해도 이런 종류의 목마름이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부추겨보기로 작정하고 청소년들에게 1년의 방학을 선물로 주자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어쩌나 병’ 앓던 초보맘 시절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이후로, 전에 없던 염려와 걱정이 제 삶을 이끌어가는 경험을 종종 했습니다. 둘째 아이를 기르면서는 그나마 좀 덜했는데 첫째를 키우는 과정은 주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영유아기 때의 걱정은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을 뿐 셀 수 없이 많았을 것이고, 그 걱정들이 아마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유아기 이후로 기억나는 것들로는, 잘 안 먹으니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작으면? 사회성이 안 좋아 친구를 못 사귀고 왕따가 되면? 너무 수줍어해서 학교에 가서 발표를 못하면? 나처럼 그림을 못 그리면? 수학을 못하면? 등입니다. 시기별로 실로 다양한 ‘어쩌나’ 병을 달고 20여 년을 지나왔습니다.

큰애가 21살, 둘째가 16살이 된 지금, 키는 평균보다 둘 다 작고, 둘째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2~3년씩 늦게 자라고 있으며, 큰아이는 내향적이라서 학교에서 발표를 잘 안 했던 것 같은데, 작은아이는 안 시켜도 자기 이야기를 잘하기도 하고, 그림은 둘 다 그럭저럭 그리는 것 같고, 수학은 둘 다 제 염려대로 썩 잘하지 못합니다. 학교에서의 친구관계는 한두 번쯤 가슴 철렁하는 사연을 들려주기도 했지만, 다행히 고질적이거나 치명적인 문제로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걱정함으로 누가 키를 자라게 할 수 있느냐는 예수님 말씀 그대로 ‘어쩌나’ 병은 아무 짝에 쓸모도, 효과도 없음을 알게 되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전전긍긍한다고 아이의 수줍어하는 성격이 급전환되어 유쾌 발랄해지지 않고, 내버려 둔다고 클 키가 줄어들지도 않는 것이지요. 만약 어미 마음속 걱정의 양이 아이들의 질적 양적 성장에 비례한다면, 제 아이들은 아마 공부도 잘하는 데 성격도 좋고 키도 크고 심지어 신앙도 좋은 엄친딸과 엄친아로서 지금쯤 다른 부모들의 부러움의 대상(또래들로부터는 지탄의 대상)이 되어있지 않을까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저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부모 노릇을 하면서 불안과 걱정이 기본 설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하늘이 주신 생명을 낳고 키우는 것이 처음이니까 ‘생소해서’ 불안하고, 잘 키워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잘 키우는 것인지 그 방법을 ‘몰라서’ 불안합니다. 또 다른 지배적 요인이 있다면 지나치게 ‘욕망해서’ 불안합니다.

자녀를 향한 제 기대는 순전히 자녀를 위한 바람이라고 우기고 싶지만 조금 정직하게 생각해보니 순도 100%가 아니었더라고요. 한마디로 말하면, 아이가 제 자랑거리이기를 바랐습니다. 적극적으론 자랑거리이길, 소극적으로는 절 부끄럽게 하지 않길 바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인 제 인생과 아이 인생의 경계가 자꾸 혼동되고 ‘네가 잘 되는 게 내가 잘 되는 것’으로 치환하게 됩니다. 이 말은 거꾸로 ‘네가 시험 못 보면 내가 우울해지고 내 인생 잘못 살았나 하는 실패감이 드는 것’이지요. 이 증상이 심화되면 아이 인생을 대비해주고 대신 살아 주느라 부모 자신의 인생이 생략 또는 삭제되는, 흔히 ‘희생’이라고도 하는 현상이 벌어지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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