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호 커버스토리] 시골 할아버지가 ‘젊은 파수꾼’들에게
얘들아, 여름방학을 어떻게들 보냈니? 마음껏, 신나게들 놀았니? 아니면 제대로 놀기는커녕 이 무더운 여름에도 학원 가랴, 밤늦도록 공부하랴 힘들게들 보냈니? 어느 쪽이든지 아무쪼록 건강하게들 지내기 바란다.
아는지 모르겠다만, 요즘 ‘사드’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다. 무기 하나 갖고 왜 어른들이 저렇게까지 야단이지 하고 궁금해할 것 같아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성경의 눈’으로 바라보기
기독자는 세상의 일들을 성경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성경의 눈으로 본다’는 말은 성경의 가치, 즉 옳고 그름에 대한 성경의 기준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정의로운 일인지 아니면 불의한 일인지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우리의 행동/삶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기독자는 절대로 세상 사람들의 기준을 따라 살면 안 된다. 교회에서 하는 말이라고 무조건 따라서도 안 된다. 교회가 하는 말도 성경의 기준에 비추어 보아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한다. 더더구나 대통령의 견해나 국무총리의 주장, 야당 지도자들의 논리나 국회의원들의 이런 저런 말들은 경계하고 잘 판단해야 한다. 정치가들은 대체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을 한단다. 어쩌면 그들의 말은 안 듣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사람들은 사드는 몇 킬로미터까지 그 전자파가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느냐의 문제로 야단법석이다. 또 어디는 되고 어디는 안 된다는 설치 장소의 문제로 난리를 떤다. 그것은 사드 문제의 핵심을 피해가기 위한 얄팍한 정치가들의 농간이란다. 사드는 미국이 강대국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전쟁으로만 해결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무서운 무기란다. 그러니 사드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대화와 타협을 통한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준 전쟁 선포나 다름없다. 미국이 인류의 미래를 놓고 평화나 전쟁이냐의 선택에서 전쟁을 선택했다는 선언인 셈이지.
우리는 기독자다. 젊고 늙음을 떠나 우리는 모두 기독자다. 기독자는 예수가 찬성하면 찬성하고 예수가 반대하면 같이 반대의 편에 서는 사람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사드를 찬성하실까, 반대하실까? 이를 알려면 성경을 살펴봐야 한단다.
하나님은 인류가 서로 사이좋게 도와가며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신단다. 하나님은 옳고 그름의 문제에 대해서는 칼날 같이 정의롭고, 인류의 앞날에 대해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인도하시고 돌보시는 분이란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류를 창조하신 이래 단 한 순간도 낮이나 밤이나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인류를 자기 눈동자같이 인도하시고 돌보아주셨단다. 잘못하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식을 야단치시듯 불호령을 내리기도 하시고, 우리의 삶에 따라 상을 주기도 하시고, 때론 잘못이 너무 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면 무서운 벌을 내리기도 하신단다. 하나님의 그 무서운 벌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고 그 심판이 내리는 날을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날’이라고 한다. 무서운 벌을 내렸다고 해서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니란다. 하나님의 벌은 인류 역사를 바른 길, 곧 평화를 향해 나아가게 하기 위한 징계란다.
정의·사랑의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
그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는 죄가 무엇인지 아니?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 노릇을 하려는 거지. 이것을 성경은 ‘교만’이라고 한단다. 교만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전쟁을 낳기 때문이지. 아담과 하와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은 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였단다. 그래서 그 벌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류가 제일 처음 지은 범죄가 무엇인지 아니? 형이 아우를 죽이는 사건이었단다.(창 4:1~16) 이때부터 하나님은 항상 동생 편이셨지. 동생이 약하니까. 두 번째 죄는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기 시작한 일이었단다.(창 6:1~8) ‘가부장제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지. 이때부터 하나님은 항상 여자 그것도 애기 못 낳는 여자 편이셨단다. 그리고 세 번째 죄는 하나님의 징벌을 피하기 위해 인류가 힘을 합쳐 아예 도시를 만들어버린 짓이란다. 그것이 바벨탑 이야기란다. 여기서 고대 부족국가 나아가 도시국가가 생겨나지.(창 11:1~9)
아무리 작아도 국가라는 것이 생겨나자 힘을 가진 집단이 힘이 약한 집단을, 한 집단 안에서도 힘을 가진 사람이 힘이 없는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지. 그래서 나중에 황제가 나오게 된 출발이 되는 부족장과 소위 왕이라는 게 생겨나지. 족장이든 왕이든 그들이 가진 힘이라는 것은 바로 ‘군대’였단다. 군대란 칼과 창을 잘 쓰는 칼잡이 창잡이들을 거느린 ‘것들’이지. 그런 무리들을 ‘것들’이라고 비하해 부르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솔직히 말해 그들이 잘 한다는 일이 사람을 찌르고 베고 하는 짓 아니냐? 그런 것들을 소위 용사나 영웅, 또는 전사나 기사라며 무슨 잘난 사내들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인류가 이성을 잃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니?
나는 요즘도 태극‘전사’라고 부르는 방송보도를 보면 소름이 끼친단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도조 히데키 군부정권이 이끄는 일본의 압제 밑에서 겪은 치욕과 고통이 아직도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는데,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군부정권 아래서 민주주의를 부르짖다가 피를 흘린 젊은 대학생들의 고통과 아픔이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대표선수’라고 부르면 될 것을 왜 하필이면 태극‘전사’라고 부르는지 일생을 교사로 살아온 나는 이해하기가 힘들단다.
이렇게 인류가 아예 도시국가(또는 부족국가)를 만들어 집단으로 하나님께 대항하자, 할 수 없이 하나님은 힘이 지배하는 세상을 뒤바꾸시려는 계획을 세우신다. 힘을 가진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보살피는 세상을 만들게 하시려고 하신 일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선택하신 일이란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일을 할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이지.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먼저 그를 힘이 센 국가들 사이에서 여기저기 떠돌며 온갖 어려움과 억울함, 위기를 겪게 하셨지. 심지어 왕이라는 자에게 아내를 뺏길 뻔했단다. 다시 말해 힘을 가진 집단/국가/민족이 힘없는 집단/국가/민족 위에 군림하는 게 어떤 것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게 하신 거지. 그런 고된 시련을 겪게 하신 다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계약을 체결하신다.
“내가 너에게 복을 주어 네가 앞으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그 민족은 절대로 힘이 없는 민족을 누르고 착취하고 지배해서는 안 된다. 힘을 길러라. 그러나 그 힘으로 약한 민족을 돌보고 도와주는 세상을 만들어라. 그래서 내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민족 곧 하나님의 민족을 만들어라.”(창 12:2~3 참조)
“힘을 가진 사람이 힘이 없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 나의 정의다. 그렇게 하면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겠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이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 최대 행복은 하나님의 계약 대상자가 되는 거란다. 기독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계약 대상자인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할 일을 대신 하는 인간’을 의미한단다. 인간 최고의 명예로운 직무지.
엑소더스, 그리고 새로운 사명
세월이 흘러 아브라함의 손자 대에 그의 자손들은 기근을 피해 당시 이미 최대 강대국이 되어 있던 이집트로 내려가 살게 된단다. 이집트로 내려간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나중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지. 그들은 고된 강제 노동과 학대에 시달리면서 비인간적인 삶을 사는 노예 신세로 전락한단다. 그들의 고통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모세를 일으켜 세워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히브리 민족을 구원해 내신다. 이집트의 고된 노예생활에서 히브리 민족을 구출하신 구원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광야의 시내 산에서 히브리 민족 전체와 계약을 맺으신단다.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을 민족 전체로 확대한 것이지. 아브라함 때와 다른 점은,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시고 그 십계명을 계약의 중심에 두셨다는 것이다.
“너희가 이 십계명대로 살면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
“너희가 앞으로 만들어야 할 세상은 힘을 가진 사람이 힘이 없는 사람을 섬기는 세상이어 야 한다. 그러면 너희는 나의 축복을 받아 번영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이집트와 같은 세상을 만들면 너희는 나의 저주를 받아 멸망할 것이다.”
이것을 줄여서 구약성경은 이렇게 표현하지. “이 계명을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 그러니 기독자는 하나님의 계명 곧 십계명을 각기 자기 삶의 영역에서 실현해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제국 이집트로부터 하나님이 히브리 민족을 구출해 내시고, 광야에서 십계명을 주시고, 계약을 맺은 일을 ‘출애굽’이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엑소더스(Exodus), ‘제국으로부터의 구출’이라는 뜻이지. 이 사건은 단순히 하나의 구출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구출한 목적이 있다는 얘기지. 곧 새로운 사명, 곧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통해 이 세상을 억압과 불평등과 착취가 없는 평화와 공존의 세상으로 만들어야 하는 사명이 주어진 사건이지. 그러니 이를 어찌 인류 구원의 위대한 역사가 시작된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니?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과 고역에 시달리는 것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것을 보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신 26:5~8)
이 고백을 구약신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또는 출애굽 신앙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성경 신앙의 출발점이요 주춧돌이란다. 출애굽 신앙을 현대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역사는 이렇게 발전해야 한다.
억압에서 자유로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착취에서 공존으로
‘제사장 국가’ 유다 왕국과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
하나님은 히브리 민족을 곧장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셔서 국가를 세우게 하시지 않았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처럼, 그의 자손들이 광야 40년 동안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몇 백 년 동안 이미 도시국가를 만들어 왕이 군대를 가지고 백성을 억누르는 국가들 사이에서 온갖 억울함과 고통을 맛보게 하셨지. 그 왕들이 다스리는 국가라는 것들의 온갖 횡포를 몸서리치게 맛보게 하신 후 하나님은 사무엘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시켜서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고 착취가 없는 평화와 공존의 사회를 이상으로 하는 국가를 세우게 하셨다. 그게 바로 다윗에게 세우게 하신 유다라는 국가였지. 다시 말해 히브리 민족에게 출애굽 신앙을 실현하는 국가를 세우도록 허락하신 거란다. 평등과 자유와 함께 더불어 사는 공존의 사회인 국가. 그것이 하나님이 다윗에게 허락하신 유다라는 국가였단다. 이것을 ‘제사장 민족’ 또는 ‘제사장 국가’라고 구약성경은 표현한다. 다른 나라들이 따라 해야 할 모범적인 국가라는 뜻이지.
그런데 2대를 못 넘기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에 유다는 왕과 군대와 귀족들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규모만 작은 또 하나의 ‘작은 제국’ ‘작은 이집트’가 되고 말았단다. 참 슬픈 일이지. 강제노동과 불평등과 착취가 있는 국가로 전락한 거지. 그 강제노동의 결과, 나라는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 두 쪽으로 갈라져 안 그래도 작은 국가가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마치 우리나라가 남과 북으로 쪼개진 것 같이.
하나님은 예언자라고 불리는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셔서 충고하고 타이르고 벌 주고 갖은 노력을 다 쏟지만,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의 이상을 펼치는 국가 노릇을 하지 않고 이집트를 따라가고 말았단다. 하나님은 크고 작은 예언자들을 보내어서 회개를 촉구하셨지. 회개하고 돌아와 다시금 십계명을 이상으로 하는 국가가 되어, “국가란 이래야 되는 거야!” 하고 세계를 향해 외치는, ‘세계 모든 나라들의 빛’이 되라고 호소하셨어. 아무리 해도 회개하지 않는 두 나라를 하나님은 각각 앗시리아(BC 722년)와 바빌론(BC 586년)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었단다.
참 가슴 아픈 일이지.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없는, 서로 돕고 돌보고 협력하며 살아가는 ‘제사장 국가’를 세워 세상 모든 나라들이 보고 따라하게 하시려던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이 또 다시 실패로 돌아간 사건이 바로 바빌론 제국에 의한 유다 멸망이었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장 국가는 사라지고 바빌론 제국, 페르시아 제국, 알렉산더와 그 부하들의 그리스 제국들,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로마 제국이 세상을 지배하는 ‘제국들의 세상’이 되어 인류의 고통이 극에 달하자,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인류를 구원하는 일을 새롭게 시작하신단다.
칼로 만든 ‘제국의 평화’ vs. 십자가로 이룬 ‘예수의 평화’
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이 인류 역사를 지배해온 보이지 않는 손이란다. 아무리 못되고 악한 국가라는 것들이, 역사를 (소수만이 자유와 부귀를 누리기 위해) 자유에서 억압으로, 평등에서 불평등으로, 공존에서 착취로 이끌어 갔지만, 그래도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게(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지) 자유, 평등, 공존으로 발전해 왔단다.
겉으로 보면 인류 역사는 왕들이 지배해 온 역사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그 역사를 지배해 오셨단다. 그 기록이 곧 구약성경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다스리셔서 자유, 평등, 공존의 세상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선언을 기록한 것이 신약성경이란다.
역사를 창조하시고(과거), 이끌고 계시고(현재), 앞으로도 이끌어 가실(미래) 분이 하나님이라는, 곧 역사의 주인/결정권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증해준 사건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란다. 하나님은 인류를 절대적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류를 절대로 버리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예수의 뒤를 따라 정의와 사랑의 좁은 길을 가는 기독자들과 함께하셔서 기필코 평화와 공존의 세상을 만들어 가신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이 사랑에 대한 예수의 증거요 외침이다.
얘들아,
나와 함께 가자. 평화를 만드는 길을.
힘을 가진 사람/집단(제국들)이 칼로 만든 평화는 가짜 평화란다.
내가 십자가로 보여준 정의와 사랑으로 만든 평화가 진짜 평화란다.
나와 함께 가자. 십자가(정의와 사랑)로 평화를 만드는 길을.
로마 제국이 만든 평화는 가짜 평화이며, 예수가 보여준 정의와 사랑으로 만든 평화가 진짜 평화다. 예수님 오시기 이미 40여 년 전에 로마 황제는 자기가 세상을 통일하고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 왔다고 선전하면서 스스로 ‘신의 아들’이라 선언하고 인류의 ‘구세주’라고 불렀지. 나중에는 자신을 ‘평화의 왕’이라고까지 불렀단다. 예수님보다 먼저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쓴 사람들이 바빌론의 황제들을 비롯하여 소위 ‘제국의 황제’들이었단다. 중국에서는 황제라는 사람들이 자신을 하늘 천(天)자에 아들 자(子), 천자라고 불렀던 것은 알고 있겠지? 20세기에 일본은 스스로 대일본제국이라 부르고 천황(天皇) 숭배를 국민들에게 강요했었단다.
그 동양과 서양의 제국들 진, 한, 송, 수, 당, 원, 명, 청, 앗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알렉산더의 그리스, 로마, 일본, 중국, 소련,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미국… 이런 국가들이 주장한 논리가 무엇인지 아니? 바로 다음과 같다.
전쟁이 없어져야 평화가 온다. 전쟁을 없애려면 천하를 통일해야 한다. 천하는 칼로만 통일할 수 있다. 칼이 곧 정의다. (그런데 그 통일은 남이 하면 안 되고 꼭 자기가 해야만 한다.) 천하를 무력으로 정복하여 통일을 해야만 전쟁이 없어진다.
이 논리를 한 마디로 줄이면 이렇다.
칼은 더 큰 칼로만 이길 수 있다. 칼로만 천하를 통일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칼의 평화’를 내세운 제국은 모두 망했다
그러니 사드는 지구상에 고대 국가가 생겨난 이래 ‘칼로만 세상에 평화를 가져 올 수 있다’고 주장해 온 강대국들의 속내를 보여주는 실체란다. 그런데 역사는 그런 제국들의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보아라. 그런 명분으로 수백 수천 수억의 사람들을 죽여가면서 제국을 건설했던 국가 가운데 망하지 않은 국가가 있는지. 크든 작든 역사상 망하지 않은 나라가 하늘과 땅 아래 있는지.
그 제국들과 강대국들이 언제 망했는지 아니? 사람 목숨을 파리같이 여기고 살육을 자행해서 세운 국가들, 인권을 헌신짝만큼도 여기지 않고 칼로 다른 민족과 국가들을 피로 물들여 정복하고 세운 국가들이 언제 망했는지 너희들은 아니?
바로 그들의 교만이 하늘에 닿았을 때란다.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란다. 선악과를 먹은 제국들은 살육으로 다른 민족, 국가들을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들었지. 그리고 식민지 사람들의 피를 빨아 먹었지. 식민지의 피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면서 제 나라 국민들에게는 자유와 평등과 공존을 누리게 한 줄 아니? 천만에! 제 나라의 지배 계급은 온갖 부귀영화와 향락을 누리면서 백성들은 겨우 목숨이나 연명하게 하는, 소위 빈익빈 부익부의 계급사회를 만들었다. 그 계급사회를 카스트제도라고 부르는 것은 알고 있겠지? 이렇게 인간의 생명과 재산, 인권을 무시하는 교만이 하늘에 닿았을 때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는 날이란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예언서에는 ‘그날이 오면’이라는 말이 수없이 나온단다.
그런데 그 멸망의 길은 한 번 들어서면 멈출 수가 없었단다. 한 번 들어선 그 망국의 길을 벗어난 제국은 여지껏 없었단다. 제국들이 망하는 그 날이 그들에게는 무서운 날이었지만, 피를 빨리던 피정복 국가들-약소 민족들-에겐 환희의 날, 곧 ‘출애굽의 날’이었단다.
미국도 망한다. 반드시 망한다. 지구 위의 어떤 나라도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있다. 지금 지구상에 미국을 당할 나라가 없다지만, 하나님이 주인인 역사의 정의에 따라 미국도 제국들이 갔던 길을 가게 되어 있어. 미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국가가 되어 문어발처럼 세계의 부를 빨아들이고 있지만, 바로 이때가 미국이 망하는 길에 들어선 때란다. 미국이 세계의 부를 빨아들이면서도 자국 안에서는 역사상 가장 극심한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을 만든 이때가 바로 망하는 길에 들어선 때란다. 미국이 회개하는 길, 곧 지금 가는 길을 돌아서서 자유, 평등, 공존의 세상을 만들지 않으면 망하는 길 곧 내리막 길을 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공평한 정의의 하나님이시란다. 어떤 국가도 약한 국가들의 부를 빨아들이는 짓을 용서하시지 않기 때문이지. 약한 국가는 도와주어야 할 대상이지, 마음대로 지배해도 되는 대상이 아니란다. 하나님은 어떤 국가도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을 만드는 것을 용서하지 않으신단다.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서 제국들이 역사의 결정권자들인 것이 사실이지만 주인은 아니란다. 하나님이 주인이란다. “누가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였느냐? 태초부터 나 주가 거기에 있었고, 끝 날에도 내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이사야 41:4)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믿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을 신앙이라고, 참 앎이라고 말한다.
사드, ‘칼의 평화’ 내세우는 강대국들의 전쟁 논리
사드의 논리는 ‘칼은 더 큰 칼로만 막을 수 있다’는, ‘평화는 칼로만 이룰 수 있다’는 천하 제패를 추구하던 제국들의 만들어낸 허위 논리란다. 그 논리/핑계로 동서양의 제국들은 ‘부국강병’을 신으로 섬기면서 전 세계의 약소민족들을 피로 물들이고 착취했다. 근세에 스페인과 네덜란드 등 서구 열강들의 아프리카-아메리카-아시아 식민지화를 보아라. 멀리 갈 것도 없이 일제강점기를 보아라.
사드는 그저 전자파가 몇 킬로미터까지 영향을 미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길이냐 악마의 길이냐’의 문제란다. 전쟁이냐 평화냐의 문제요, 인류 멸망이냐 공존이냐의 문제다.
사드는 그 자체를 반대해야 한다. 내 지역에는 안 되고 다른 지역에는 된다는 문제가 아니란다. 사드는 어디에도 안 된다. 전쟁은 어디에서도, 어떤 명분으로도 안 된다. ‘더 큰 칼로만 평화를 가져오고 지킬 수 있다’는 강대국/제국들의 전쟁 논리에 넘어가선 안 된다. 인류의 꿈은 평화다. 전쟁이 아니다. 인류의 꿈은 안녕이다. 한 곳으로의 부의 집중이 아니다. 인류의 꿈은 공존이다. 독존이 아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를 개발해서는 안 되는 이유와 같다. 미국이 핵무기를 개발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전 세계 어느 국가도 핵무기를 개발해서는 안 되는 이유와 같다. 어느 국가 어느 누구도 핵무기를 개발해서는 안 된다. 핵무기를 개발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다른 무기도 개발해서는 안 되는 이유와 같다. 어떤 국가도 무기를 개발해서는 안 된다. 어떤 과학기술도 무기를 개발하는 데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과학 기술은 평화로운 인류의 안녕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미국이 지금은 사드로 중국과 러시아를 억누를 수 있겠지. 그러나 언젠가는 중국과 러시아가 사드를 능가할 무기를 개발해낼 거다. 그러면 또 미국은 그 무기를 이길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할 거고….
과학기술을 살상용 무기 개발에 사용하는 것은 죄다. 인류는 이제 과학기술을 무기를 개발하는 데 이용하는 죄짓기 문명을 끝내야 한다. 그 개발된 무기를 팔아 부를 하늘에까지 쌓아올리는 문명을 끝장내야 한다. 인류는 모든 무기를 폐기해서 인류의 안녕을 위해서 사용하는 새로운 문명을 시작해야 한다. 인류는 회개하여 신무기 개발 경쟁과 전쟁 연습을 중단해야 한다. 이제는 바빌론 제국의 문명을 끝내야 한다.(사 48:20; 계 18:4) 그것이 살 길이다. 그것이 번영과 축복의 문명으로 가는 길이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사 2:4)
지금 미국과 중국과 일본은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슬픈 일은,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모두 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을 다투어 멸망의 길을 달리는 이 역사를 멈추어야 하는데도 인류가 이 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멸망의 길은 인류의 눈을 멀게 해서 그 길이 넓고 편하게 보이게 한단다. 그런데 코앞에 닥친 문제는 그 길을 같이 가는 국가들도 미국과 함께 멸망할 뿐 아니라, 그 국가들 가운데 우리나라도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도, 중국도, 북한도, 일본도, 우리나라도 망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인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사랑하시는 분은 사랑의 매를 들 때가 되면 반드시 매를 드시기 때문이다.
종교가 있어야 하는 근본 이유
미국은 우방이다. 친구의 나라지. 친구는 사랑해야 한다. 친구를 사랑하는 길은 친구가 잘못된 길로 가면 ‘안 돼!’ 하고 알려주는 것이다. 이 ‘안 돼’ 하고 알려주는 일을 파수꾼의 임무라고 구약성경은 말한다. 기독자의 임무는 곧 파수꾼의 임무다. 그렇게 외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 또는 예언자라고 구약은 부른단다. 그런데 미국만 친구의 나라일까? 아니, 세상 모든 나라가 우리의 친구들이다. 인류가 모두 우리의 형제들이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향해 ‘안 돼, 그 길로 가면 망해!’ 하고 외치는 것이 우리의 임무지. 우리 기독자가 이 임무를 게을리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야수가 와도 짖지 않는 개’라는 책망을 듣게 된단다. “백성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것들은 눈이 멀어서 살피지도 못한다. 지도자가 되어 망을 보라고 하였더니, 벙어리 개가 되어서 야수가 와도 짖지도 못한다. 기껏 한다는 것이 꿈이나 꾸고, 늘어지게 누워서 잠자기나 좋아한다.”(사 56:10)
원래 종교의 근본 목적, 종교가 있어야 하는 근본 이유는 국가를 향해 ‘그 길은 망하는 길이야’ 하고 소리치기 위해서란다. 국가는 그 속성상 부국강병을 신으로 섬기게 되어 있다. 그래서 종교가 있어야 한다. 국가 자체가 악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게 국가의 한계라는 말이다. “부국강병을 신으로 섬기면 안 돼” 하고 호통을 쳐서 망국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사랑의 일을 하기 위해 종교가 있단다. 그게 종교가 있어야 하는 유일무이한 이유다.
천당 혹은 극락에 빈방이 많아서 기독교를 만들고 불교를 만들어 그 빈방을 채우자고 종교가 생긴 게 아니란다. 인류를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와 피조물을 멸망의 길에서 돌아서게 하고 살리기 위해 종교가 있는 것이다.(로마서 8:18~22) 기독교의 본분도, 불교의 본분도, 이슬람교의 본분도 모두 칼로 만드는 제국의 평화는 가짜 평화로 인류를 멸망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모든 국민들과 국가들에게 깨우쳐 주는 일이란다. 그런데 요즈음 그 ‘호통’을 치는 교회도 없고 절도 없는 것 같아 너희들에게 이 편지를 쓰게 되었단다. 참 슬픈 일이지 않니?
너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밉지만 일본도 사랑하고 중국도, 러시아도, 북한도… 전 세계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외쳐야 한다.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에게 외쳐야 한다.
“칼의 길은 멸망의 길이다.
칼로는 평화 못 만든다.
칼로 만드는 평화는 가짜 평화다.
전쟁에 전쟁을 불러 올 뿐이다.
인류가 다 망하는 길이다.
오직 십자가 곧 정의와 사랑으로만 참 평화를 만들 수 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는 기독자, 기독청년, 기독학생들의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너희들의 사명은 너희들이 심겨진 그곳에서 지금 성서를 읽고 묵상하고 생활화하여 멸망으로 치닫는 인류를 향해 외치는 작은 파수꾼(겔 33:1~9),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라고. 비록 다수에 속하지 못하고 소수에 속할지라도, 주님이 함께하신다.(마 18:20) 소수라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소수를 통해 이 땅에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눅 12:32)
2016년 7월 31일 새벽,
교회 강단에서 듣지 못하는 외침을 젊은 파수꾼들에게서 듣기를 신앙하는
시골 할아버지가.
전성은
서울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65년 거창고 교사를 시작으로 2006년 교직에서 물러나기까지 41년간 지방 읍내의 학교에서 ‘지천명(知天命)의 교육’에 일생을 쏟았다. 퇴임 후에도 교육 정책 및 교사 교육에 관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활발히 이어오고 있으며, 국제성서연합회 세계성경번역센터 한국 편집인으로 성경 번역에도 매진해왔다. 지금까지 쓴 책으로 ‘교육론’ 3부작인 《왜 학교는 불행한가》 《왜 교육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가》 《왜 교육정책은 역사를 불행하게 하는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