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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좋은 백부장, 예수를 희롱하다
[313호 거꾸로 읽는 성경] 누가복음 7장 1절~10절
[313호] 2016년 12월 01일 (목) 17:03:50 정재훈 용인덕성교회 전도사 j7859369@hanmail.net

누가복음 7장 첫 이야기(7:1~10)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믿음 좋은?) 백부장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퀴어 축제를 기점으로 2016년 가장 주목받았던 본문이기도 하다. 세간에 ‘백부장의 종은 바로 동성애 파트너였다’는 문제로 설왕설래가 있었다. 일단 동성애 차원 이야기는 이차적 문제로 놓고, 이 장면을 다루는 누가의 교묘한 수사법에 주목하면 얻을 것이 훨씬 더 많다. 

백부장은 예수를 불러 놓고 다시 돌려보냈다. 나는 이것을 시비할 참이다. 내겐 백부장의 명백한 ‘무례’가 읽혀진다. 백부장에 관해 믿음이 좋기는커녕 ‘예수를 희롱했다’라고 주장한다면, 예상컨대 어떤 이들은 믿음의 표본인 백부장을 작위적으로 폄훼한다고 불편해할 것이다. 그러나 앞선 두 글(탕자·돼지로 성육신한 예수)처럼, 읽고 나면 이해가 될 것이다. 
 
되짚어보는 ‘백부장 이야기’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에서 백부장 이야기는 ‘이스라엘보다 믿음이 큰 이방인의 표본’이라는 주제를 담은 글로, 누가-사도행전의 선교적 저술 취지에 합하므로 누가복음의 대표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본문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취지에 더 잘 들어맞는 성경은 마태복음 8:5~13(백부장 이야기)이다. 누가의 본문은 마태와는 한 부분을 공유하되 마태복음에 없는 새로운 자료를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구성한다. 마태와 누가는 백부장의 종에 대한 평가도 다르고, 백부장에 대한 평가도 다른 “조금 비슷한 매우 다른 이야기”다. 

이 사건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기 위해 우리는 누가복음 7:8을 주의해서 관찰하고자 한다.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개역한글) 마태복음 병행 본문은 ‘든’이라는 단어 하나를 제외하면 똑같다. 그러나 마태복음 본문의 관심은 누가와는 초점이 다르다. 마태의 백부장은 긍정적 인물로 보아도 좋다. 하지만 누가의 (장로와 벗들 뒤에 숨어서만 활동하는) 백부장은 참 나쁘다! 다시 누가 본문으로 돌아오면, 이 말은 백부장이 예수에게 직접 한 말은 아니고(참고. 눅 23:47) 사람을 보내어 전한 말이다. 백부장의 자기 종(부하)에 대한 이해는 이렇다. 1) 가라 하면 간다, 2) 오라 하면 온다, 3) 하라 하면 한다. 이 사건에서 위 세 가지 사항을 실행에 옮긴 사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가라 하면 간다 ⇒ 유대 장로들(3절), 친구들(6절), 예수(6절)  
2) 오라 하면 온다 ⇒ 예수(6절)
3) 하라 하면 한다 ⇒ 예수(10절)

사건에 대한 자세한 관찰과 백부장의 진술을 종합해보면, 백부장의 종(부하)이라는 개념에 가장 충실했던 인물이 본문에선 다름 아닌 ‘예수’로 묘사된다. 최고로 말을 잘 듣는 종은 엉뚱하게도 예수라는 것이 밝혀진 셈이다. 이 결론을 가지고 전후 문맥을 몇 가지로 다시 따져보자.

1. “합당하나이다” (ἄξιός, 악시오스) 
백부장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청탁을 하러 온 유대 장로들의 진술 속엔 환자 자체에 대한 염려가 없고 오로지 백부장이 유대 회당 건립을 도왔다는 팩트만이 전부인 듯, 도움받을 합당성이 표출된다. 하지만 누가복음 7:4에서 말하는 “합당하나이다”의 원어 ἄξιός(악시오스)는 누가-사도행전에서는 누군가의 행위에 따른 당당한 ‘자격’의 의미로 쓰이는데, 그렇다면 백부장이 청하는 수혜는 은혜가 아니라 공로에 따른 당연한 ‘대가’의 의미를 지닌다. 어쩌면 로마 식민지 아래서 군권의 지원을 받아 지어진 유대 회당의 장로들이 로마를 위해 황제와 그의 외교적 친구인 왕의 잠재적 정적(政敵)인 유대인의 왕 예수를 잡아다 죽이게끔 넘겨준 것은 그들의 거래로선 자명한 ‘진상’이었을지 모른다. 인간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를 ‘당당하게’ 받을 자격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장로들은 예수를 희생제물 삼아 “합당한” 백부장에게 선물을 주고자 하는 듯 보인다. 

2.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6절의 이 겸양의 말을 액면 그대로 이해해도 좋을까? 사람을 오라 청할 땐 언제고 (마태복음의 백부장은 그러지 않았다) 수고로이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온갖 겸손한 척을 하며 들어오지 말라니!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마태 기사 안에서 처음 장로들을 보낼 때 “만일 예수라는 선생님께서 오려고 한다면 오실 수고는 하지 마시고 (주님을 모실 자격이 없으니, 마 8:8) 말씀만 하옵소서” 해야 옳았을 것이다. 누가가 빼놓지 않고 적시한 말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눅 7:6)” 속에는 이 겸손에 대한 불편함이 드러난다. 기껏 집에 거의 당도한 주님을 정녕 주라 생각했다면 어찌 문 앞에서 돌려보낼 수 있겠는가. 이런 문전박대는 이스라엘에서는 (또한 로마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누가복음 7장 9절이 반어적으로 들리는 이유다. 겸손으로 포장된 기만과 조롱이 아니고 무엇인가? 저 수사적 겸손은 그러므로 위선이다.

3. 새로이 등장하는 벗들 
사랑하는 종이 아픈 일과 관련하여 왕의 하급 장교가 식민 치하의 지방 토호를 호기부리며 호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힘들여 방문한 초대 손님 예수를 돌려보내는 일엔 종도, 유대 장로도 아닌 백부장의 “벗들”이 몸소 나왔다. 그렇다면 예수가 초대되는 백부장의 집 안 풍경이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백부장, 벗들 그리고 유대 장로들이 한데 모여 있었던 것이다. 예수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을 유대 장로들은 들어갔다? 우리에게 주님인 것만큼 백부장에게도 그러할까? 

독자들은 잃은 양 비유(눅 15:1~7)를 상기하기 바란다.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6절,  개역한글) 이 비유를 백부장의 경우에 대입해보는 것이 허락된다면 “그 (예수를 돌려보낸) 벗과 이웃(유대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사랑하는 종)을 찾았노라” 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런 해석이 어느 정도 진실에 다가간 것이라면, 백부장의 종은 사랑받았으나 욕정의 도구로서 그리 사랑받았음이 더 설득력이 있다. 부득불 잃은 양 비유를 힘입어 내가 (삐딱하게) 소설적 추리를 해본다면 그날 백부장의 집엔 아마도 흥겨운 ‘파티’가 있었다. 누군가 내기를 청했을 것이다. 예수가 ‘온다’에 유대 장로들은 돈을 걸었을 것이고, 벗들은 ‘안 온다’에 걸었을 것이다. 각자 자기가 돈을 건 내용을 위해 한 가지 행동은 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을 것이고 백부장은 ‘오다가 돌아간다’에 걸었을 것이다. 결국 돈은 백부장이 다 가져갔을 듯하다. (순전히 이해를 돕고자 작성해본 추리지만, 내겐 그만큼 백부장이 미덥지 않다!)

4. 이리저리 휘둘리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ἀλλὰ εἰπὲ λόγῳ)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눅 7:7, 개역한글) 

집에는 못 들이겠다는 백부장은 직접 나오지 않은 채 장로와 자기 벗들을 대신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 정작 “감당치 못하겠다”는 이 유령 화법의 저의는 무엇인가? 문장은 있는데, 진술의 진정성이 없다. 그는 지금 꾸며낸 말을 하고 있다. 말씀만 하사? 원격 치료를 믿는, 정녕 믿음이 큰 자인가? 그러나 예수는 (가급적) ‘가까이’ 가서 직접 치료하는 것을 선호하는 분이다(7, 10장). 원격 치료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까이하심과 손을 대심 그 자체가 치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가까이하심이 있었다면 ‘회복’은 필연적 흔적에 불과하다. 역으로 하나님을 멀리하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5. 권위(ἐξουσία) 논쟁
누가는 복음서 중 가장 많은 분량을 권위 문제의 논쟁에 할애했다. 애초부터 예수의 대적들 목표는 예수를 로마의 수하인 총독의 권세 아래 붙이는 것이었고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눅 20:20]) 사탄은 예수의 등장 초기부터 권세가 자기 손안에 있음을 확인받고자 원했다(눅 4:6). 

그러나 이에 대응하여 예수는 환자를 치유할 때도 그 목적이 오히려 예수 자신에게 권세의 지휘봉이 있다는 것을 주지하기 위함임을 천명하였고(눅 5:24) 로마와 총독에게도 육신을 죽일 권세가 없는 것은 아니나(눅 12:4) 정작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그보다 위에 있는 지옥의 ‘권세’까지 가지신 분임을 경고하신다(눅 12:5). 회당은 세상 권세자와 한뜻으로 그리스도를 (심문을 위해) 끌고 갈 주체였으니, 고로 회당 건립은 장로들과 백부장의 공동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눅 12:11) 
누가가 볼 때 유대 장로들은 예수가 무슨 권세로 복음을 전하는지를 추궁하는 원고의 배역을 맡은 주인공이다(눅 20:2). 적들의 정체를 까발리는 예수의 은밀한 일격은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눅 22:25) 정확히 백부장을 소개하는 장로의 입에서 나온 말(“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과 내용이 일치한다.

이것이 우연일까? 예수가 주신 힌트로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누가복음 22:25의 은인이라 칭함받는 이방 통치자의 한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누가복음 7장의 백부장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과연 예수는, 이렇게 잘 짜인 누가의 신학적 구조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권세 헤게모니 싸움에서 이리저리 불려 다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치켜세우고 힘없이 물러나는 것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구보다 침착하게 세상의 권세와 하늘의 권세를 구분하는 누가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6. 사탄과 백부장 비교
백부장의 위장된 겸손과 행동은 사탄의 유혹을 패러디한 것이다. 판단을 유보하는 독자를 위해 비교-예시를 들고자 한다.

구분  사탄 ⇒ 예수 구분 백부장 ⇒ 예수
눅 4:3 돌더러 떡이 되라고(εἰπὲ) 말하라 눅 7:8   해라(ποίησον)
눅 4:7 내 앞에서(ἐνώπιον ἐμοῦ) 절하면 눅 7:8  와라(ἔρχου)
눅 4:9 너 자신을 아래로 던져라(βάλε)  눅 7:8 가라(πορεύθητι)


백부장이 말했던 자기 위에 있는 권위는 사실은 예수를 광야에서 유혹했던 자가 아닌가? 어떤 이의 눈에는 이 비교표가 전혀 무관해 보일 것이고 어떤 이는 비로소 내가 백부장을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끝까지 추적한 이유를 공감할 것이다. 백성을 버린 장로와 백부장과 그 벗들과 벗이 되면 무슨 보상이 따르는지 예수는 알고 있었다. 일찍이 광야에서 악마는 예수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눅 4:6)

참고. 귀신과 사탄 혹은 가나안 일곱 부족과 백부장
이방 선교라는 주제에 관한 최고의 권위를 가진 누가라면, 그는 필히 구약의 가나안 정벌에 관한 치밀한 연구자이기도 해야 했다.

공통 어구 ἐγὼ ἐκβάλλω 내가 내쫓는다
출 34:12
(LXX)
ἰδοὺἐγὼἐκβάλλω πρὸπροσώπου ὑμῶν τὸν Αμορραῖον καὶ Χαναναῖον καὶ Χετταῖον καὶ Φερεζαῖον καὶ Ευαῖον καὶ Γεργεσαῖον καὶ Ιεβουσαῖον 내가 이제 너희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겠다.(칠십인역은 기르가스 족속을 명단에 올려 마소라 사본과는 달리 여섯 부족이 아니라 일곱 부족임을 명시한다.)
눅 11:19 εἰ δὲ ἐγὼ ἐν Βεελζεβοὺλ ἐκβάλλω τὰδαιμόνια, (Luk 11:19 BGT)  내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내쫓는다면, (비교 눅 8:2 일곱 귀신) ἐγὼ ἐκβάλλω


이 표에서 주목할 것은 “내가 내쫓는다”(ἐγὼ ἐκβάλλω, 에고 에크발로)는 표현이 성서에서 오로지 가나안 일곱 부족 축출과 축귀에만 쓰인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신성을 가졌음을 의미하는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와 같은 선상에서 고찰함이 적절하다. 그것은 신약 사도들이 구약 이해에서 이방-우상의 세력을 내쫓는 것이 하나님의 대예언이자 백성을 향한 대명령이었다면, 그 성취는 예수의 축귀에서 시작되는 (그리고 제자에게로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대전제임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누가가 사탄의 시험(4:1~13)과 백부장의 이야기를 통해 권위 논쟁이 예수에게 치열한 유혹이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말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현실 속 이방-우상의 세력과 사탄의 세력의 예수를 향한 도전이 영과 육의 세계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일임을 밝히려는 목적이다. 영이신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로 성육신했다면, 보이지 않는 귀신은 역사의 모순과 악의 모습으로 세상에 자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백부장 이야기는 단선적이지 않고 내포적이고 종합적이다.

7. 백부장 이야기의 복선
백부장 이야기 앞에는 탁류의 경고, 뒤로는 과부 아들의 부활 사화가 있다. 진주를 거절하는 돼지 비유를 대신한 ‘탁류 비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이방인인 척하는 백부장의 (악마적) 위선에 대한 경고로써 간단치 않은 복선 역할을 한다. ‘과부 아들의 부활’ 이야기에는 백성의 아픔을 돌보는 대신 세상의 권세자 편에 서느라 백성을 돌보지 못했던 백성의 장로들을 비난하려는 누가의 의도가 그 배치 속에서 잘 드러난다. 


유대 장로들이 결탁한 힘, 외세의 힘, 또한 사랑(Roma is Amor)과 평화라는 구호 아래 펼쳐진 제국주의 또한 밀물 들듯 세상을 휩쓸었으나 그 견고한 아성은 이제 초라해 보이는 탁류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 조만간 그 탁류 따위에 휩쓸릴 자신의 운명을 알리려는 것이 진정한 탁류 비유의 뜻 아니겠는가? 
이제 백부장 이야기 바로 뒤에 놓인 과부 아들의 부활 이야기(눅 7:12~16, 표준새번역)를 보자.

12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상여가 나오고 있었는데,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동네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상여를 뒤따르고 있었다. 13 주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하셨다. 14 그리고 앞에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하셨다. 15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의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그래서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 주셨다” 하였다. 

누가는 우리가 이 두 이야기를 반드시 비교하길 바랐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과부 아들의 부활을 통해 예레미야애가의 소원을 수리하고 계신 하나님을 떠올려주길 바랐던 것 같다.(애 1:1~2, 표준새번역) “아, 슬프다… 이제는 이 도성이… 과부의 신세가 되고…. 이 도성이 여인처럼 밤새도록 서러워 통곡하니, …그를 위로하여 주는 남자가 하나도 없으니….”
백부장을 위해서는 유대 장로가 앞장섰는데 과부를 위해서는 앞장선 이가 아무도 없고 이웃들만 뒤따르고 있다.(12절) 백부장에겐 반어적 칭찬을, 과부에겐 뜨거운 위로를.(13절) 백부장의 종은 볼 수도 없었던 반면 과부의 아들은 가까이 나아가 손을 대시고 부르시고 명하셨다.(14절) 부활된 아들을 어미 품에 돌려보내니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큰 예언자’이신 예수가 만천하에 계시되었다.(15~16절) 백부장의 심부름꾼들은 돌아가기만 했다. 그리고 아무 리액션이 없다. 주님은 내심 이런 것을 바라셨을 터. 
“네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네게 하신 일을 다 이야기하여라.”(눅 8:39, 표준새번역)    


정재훈

대한신학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 독일 뷔르츠부르크와 튀빙겐 대학교를 거쳐 부퍼탈 신학교를 졸업(Mag.Th)했다. 1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한신대 신대원을 졸업(M.Div)하고 현재 용인 덕성교회에서 청년학생부를 지도하고 있다. 토요일 밤마다 대치교회 성서학당을 통해 요한문서들을 강해하고 탁상담화를 진행한다. 전공 논문은 〈요한계시록 인자 기독론〉이며, 현재는 ‘요한계시록’ ‘지혜’ ‘기독론’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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