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할아버지가 ‘젊은 파수꾼’들에게 2

 

그동안 잘들 지냈는지? 

잘 지냈느냐고 묻는 내가 잘못된 안부를 묻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온 나라가 난리가 났구나. 나라에 난리가 나면 성경을 펴서 읽어야 한단다. 그래서 이 할아버지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한 편 들려줄까 한다.

르호보암 왕과 박근혜 대통령 :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가

잘 알다시피,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후광으로 전쟁을 치르지 않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지.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과 그저 자기와 가족들이 살 집만 지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화려한 궁전과 밀로 궁과 자그마치 칠백 명의 후궁과 삼백 명의 첩을 두고 그들을 위한 궁들을 짓고, 또 예루살렘 성벽과 다른 많은 성벽을 쌓기 위해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노역을 시켰다. 강제 노동뿐 아니라 그 많은 공사를 하려니 얼마나 많은 세금을 걷어야 했겠니. 히브리 민족이 이집트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이 모세를 시켜 구원해주셨는데, 이집트가 자기 조상들에게 한 짓을 솔로몬이 자기 백성들에게 한 셈이지.(왕상 9:15~24; 대하 8:3~11) 

게다가 늘그막에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단다.(왕상 11:9) 솔로몬 왕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르호보암은 할아버지 다윗과 아버지 솔로몬 덕분에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호의호식하며 자란 인물이지. 그가 왕이 되자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대표해서 여로보암이 찾아와, 당신의 아버지가 시켰던 중노동을 없애고 무거운 세금을 감면해달라고 호소하고 간청했지. 르호보암은 3일의 여유를 달라고 한 뒤, 솔로몬 왕을 섬기던 원로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때 원로들이 이렇게 대답했단다.

임금님께서 이 백성의 종이 되셔서, 그들을 섬기려고 하시면, 또 그들이 요구한 것을 들어주시겠다고 좋은 말로 대답해주시면, 이 백성은 평생 임금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왕상 12:7, 새번역, 이하 인용 성경구절은 새번역임)

그런데 르호보암은 원로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친구였던 젊은 신하들에게 조언을 구했지. 그러자 그 친구 신하들은 이렇게 충고했단다. 

‘내 새끼 손가락 하나가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다. 내 아버지가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다. 그러나 나는 이제 너희에게 그것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메우겠다. 내 아버지는 너희를 가죽 채찍으로 매질하였지만, 나는 너희를 쇠 채찍으로 치겠다’, 하고 말씀하십시오.(왕상 12:10~11)

사흘 뒤 르호보암은 여로보암에게 친구 신하들이 시킨 대로 대답했단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니? 여로보암과 백성들(열두 부족 가운데 열 부족)이 반기를 들어 나라가 두 쪽으로 나뉘었단다. 왕이 누구의 말을 듣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지? “왕은 백성을 섬겨야 한다.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말과 “백성은 채찍으로 길들여야 한다.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끝이 없다.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말 가운데 어느 쪽을 듣느냐에 한 나라의 흥망이 달렸단다. 

온 나라를 어지럽히고 떠들썩하게 만든 이른 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대통령이 귀 기울이지 말아야 할 사람들의 말만 들어 생긴 사태란다. 단순히 최순실이라는 한 인물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 아닌 거지. “백성을 섬기라”는, 원로들을 통한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은 필연적 결과란다. 
여기서 함께 성경의 시편 한 대목을 읽어보자꾸나. 아래 성경 구절은 지금 할아버지가 번역 마무리 중인 《읽기 쉬운 성경》에서 가져온 것이다.

오, 하나님.
왕이 당신처럼 정의를 행하기를.
왕의 아들이 당신의 정의를 실행하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백성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리고
당신의 힘 없는 백성을 정의로 다스리게 하소서.
산들은 백성에게 번영을 안겨 주고
언덕들도 정의를 위한 열매를 가져오게 하소서.
왕은 백성 가운데서 힘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자식을 건져주고
억누르는 사람들을 쳐부수게 하소서.
시편 72:1~4

바벨론 포로가 된 유대 민족의 질문 : ‘우리가 왜 망했지?’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된 국정 운영이 온 나라를 헤어나오기 어려운 태풍 속으로 몰아넣었구나. 내로라는 분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흥분된 어조로 호통을 치고, 저마다 한 분야에서 학식을 자랑하는 분들이 신문·방송에 나와서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매일 쏟아내는 이런 말 저런 말을 들으면서 문득 너희들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런 분들보다 잘나서가 아니다. 이런 시국일수록 기독 청년은 귀와 눈을 더욱 성경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야 홍수처럼 쏟아내는 어른들의 말에 정신을 잃지 않고 사태의 핵심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 

할아버지는 왜 맨날 성경 얘기만 하느냐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구나. 왜냐하면 내가 아는 한, 성경은 인류와 인간이 도덕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위기 등 모든 위기에 처했을 때 나아가야 할 길을 가르쳐주는 유일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단다. 자 그럼 다시 돌아가서, 이 사태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과연 대통령 한 사람만의 잘못인지 성경에 물어보자. 성경의 눈으로 세상 일들을 보면 가야 할 희망의 길이 보이고,  새 힘을 얻어 변혁의 길을 갈 수 있단다.

너희도 알다시피 성경은 창세기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으로 끝난단다. 그런데 원래 예수님과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의 시대에는 성경 하면 우리가 지금 구약이라고 부르는 책밖에 없었단다. 그 책을 히브리인들의 성경(이하 ‘히브리 성경’)이라고 부르기로 하자꾸나. 그 히브리 성경은 창세기로 시작하여 역대기로 끝난단다. 아마 이건 몰랐을걸? 그런데 예수님 이후에 기독교가 태어나서 지금 신약이라고 부르는 책을 보태면서, 두 책으로 나뉜 둘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연결된 하나의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내기 위해 옛 말씀과 새 말씀을 연결하는 고리로 ‘말라기’를 그 사이에 넣었단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 시절에 성경은 창세기로 시작해서 역대기로 끝나는 책이었단다. 왜 이렇게 지금 성경 이야기를 좀 길게 하느냐면, 히브리 성경/구약을 바르게 이해해야 신약 또한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 및 다른 사도들의 말씀이 히브리 성경과 일치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되고, 또 히브리 성경이 예수님이나 바울의 말씀과 대립되는, 좀 가치가 떨어지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단다. 말이 좀 길어졌구나. 

구약 곧 히브리 성경은 바벨론에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이, ‘우리가 왜 망했지?’ 하고 질문하면서 그 답을 찾아가는 수 세기에 걸친 신앙 고백서란다.

우리가 왜 망했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우리가 어쩌다 망했지?
아니, 하나님이 왜 우리를 버리셨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 하나님이 혹 가짜 신이고 바벨론의 신 마르둑이 참 신이 아닐까?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여 나라를 회복하고 성전을 회복하여 야훼 신앙을 되살리게 해주실까?

바벨론에 이어 페르시아, 알렉산더의 그리스, 로마로 이어지는 수백 년에 걸친 제국들의 압제와 폭정과 수탈과 신앙의 탄압을 거치면서 그런 질문(신학)들은 더욱더 그 깊이를 더해가서, 마침내 우리에게 전해진 구약/히브리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탄생시켰단다. 
그들의 끈질긴 질문, 곧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상세하게 설명해준 책이 탄생한 것이지. 그 하나님의 답은 한마디였다. ‘회개.’

죄 지으면 죽는다. 죄 지으면 망한다. 죄 지으면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 그러니 죄를 지었으면 빨리 회개하라. 그리고 무엇이 죄인지를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책이 히브리 성경이지. 신약은 그 뒤를 이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설교 주제, 곧 ‘회개하라’로 시작하게 되지. 그러니 성경의 알파와 오메가는 ‘회개’이지.

히브리 성경의 결론 :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히브리 성경의 마지막 장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지.  ‘우리가 죄를 지어 멸망했다.’
지도급 인사들인 제사장들과 일반 백성도 크게 죄를 지어, 이방의 모든 역겨운 일을 따라 하였으며, 마침내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거룩하게 하신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고 말았다.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그들과 그 성전을 구원하실 뜻으로, 자신의 백성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시고 또 보내셔서, 경고에 경고를 거듭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특사를 조롱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비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백성을 향한 주님의 분노가 치솟으시니, 백성을 바로잡을 길이 전혀 없었다.(대하 36:14~16)

역대하 36장 17~20절에 바벨론의 왕을 시켜 멸망시킨 이야기가 나오고, 이어서 21절에 결론의 결론이 나온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시켜서 “땅이 칠십 년 동안 황폐하게 되어, 그동안 누리지 못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대하 36:21) 

성경의 결론을 ‘회개하지 않아 망했다’고 내린 그들은 창세기를 이렇게 시작하지. (다음은 창세기 1장을 이 할아버지의 말로 풀어 요약한 거란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인류를 만드신 목적이 무엇인지 아니? 서로 물고 뜯고 싸우라고 창조하신 것이 아니야.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잘 돌보라고 창조하신 거야. 온 우주 가운데 바로 이 지구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야. 얼마나 아름답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좋은 하늘과 땅이니? 우주를 창조하시고 난 다음,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지구(성전)를 완벽하게 준비하시고 나서야 우리/사람을 만드셨지. 

이렇게 창조 이야기를 시작한단다. 창조 이야기는 물리적 우주를 창조한 과학 이야기도 아니고 창조의 순서를 말하기 위한 창조 연대기 이야기도 아니란다. 그 이야기는 기회가 있으면 다음에 하기로 하자.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인류가 살기 좋은 지상 최고의 동산을 만들어서 평화롭게 살게 해주셨지. 거기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동료 피조물인 동식물들을 돌보는 평화의 삶을 누렸다. 그러다가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에덴에서 쫓겨난 뒤, 인류가 만든 세상은 힘을 가진 사람과 집단이 힘을 가지지 못한 쪽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약육강식의 세상으로 변해버린단다.(이 이야기는 지난 번〔2016년 9월호〕에 상세하게 이야기 했으니, 그때 띄운 편지를 참고하는 게 좋겠구나.) 

에덴 동산에서는 사랑과 정의가 필요 없었단다. 주인이신 하나님이 곧 사랑과 정의이시니 말이다. 그와 달리 사람이 만든 세상은 힘이 곧 하나님인 곳이기에, 이곳에선 정의와 사랑이 절대적인 법으로 작동되어야 한단다. 사람이 만든 모든 공동체는 크든 작든 정의와 사랑이 두 기둥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제일 작은 단위인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제일 큰 단위인 국가라는 공동체 모두 사랑과 정의라는 두 기둥 위에 집을 지어야 튼튼한 평화의 집이 되는 거란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곧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정의에서 완성된단다. 이것이 히브리 성경의 핵심 가르침이다. 예수님도 히브리 성경의 핵심 요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두 가지라고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마 22:37~40)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이라는 정의로 완성된단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놀고 먹은 게 아니라 동료 피조물인 동식물을 돌보는 일, 곧 하나님의 일을 맡아 했듯이, 에덴 바깥의 세상에서는 힘이 있는 사람이 힘 없는 사람을 돌보는 일을 가리켜 ‘정의’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번영과 행복이라는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즉 힘을 가지고 약한 사람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짓을 하면 하나님의 벌을 받아 멸망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주면서 이렇게 끝을 맺는단다. 

나는 당신들에게 당신들이 받을 수 있는 모든 복과 저주를 다 말하였습니다.(신 30:1) 

곧이어 모세는 신명기 30장 2~3절에서, 하나님의 가르침 곧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않고 벌을 받아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가 압박과 설움을 받다가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거든 회개하여라, 그러면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켜 당신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해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신명기 30장 마지막까지 회개가 유일한 살길이라고 거듭거듭 강조한단다. 따로 잠시 짬을 내어 신명기 30장을 꼭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는 모세의 어버이, 하나님의 마음에 눈물이 절로 날 것이다.

군사력·경제력이 아닌, 정의와 사랑이 국가 공동체의 두 기둥

한 국가를 튼튼하게 받쳐주는 두 기둥은 사랑과 정의란다. 이 두 기둥이 바로 서 있어야 세상을 에덴으로 바꿀 수 있지. 하나님이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는 길을 막아버리셨기에(창 3:24), 에덴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란다. 다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질서, 곧 정의와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로 만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을 에덴으로 바꾸는 것이란다. 그분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지.(요 3:16) 구약성경에는 정의(미츠밧), 사랑(헤쎄드), 구원(체다카) 이 세 단어가 제일 많이 나오는데, 대부분의 경우 함께 짝을 이루어 나오지.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 곧 구원의 길임을 암시하는 거지. 예수님은 이 말을 더 쉽게 풀이해주신다. 내가 길을 가르쳐주마, 내가 가르쳐준 대로 살아라, 그러면 산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의 심경이 모세의 심경과 같지 않았을까?

오늘 우리나라에 일어난 일은, 정의와 사랑이 국가라는 공동체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해주는 두 기둥인데 반해, 무기와 돈이 국가의 두 동량인 줄 알고 죽자 살자 달려온 결과란다. 시편 33편을 보면 군사력이 나라의 기둥이 아님을 알게 된다. 

군대가 많다고 해서 왕이 나라를 구하는 것은 아니며, 힘이 세다고 해서 용사가 제 목숨을 건지는 것은 아니다. 나라를 구하는 데 군마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목숨을 건지는 데 많은 군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16~17절) 

그러면 돈은 어떨까? 예수님은 아예 ‘하나님과 돈은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선언하신단다. 성경은 돈을 하나님(정의와 사랑)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죄의 뿌리라고 말하지.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 같은 온갖 고난을 겪고도 정의와 사랑이 나라를 떠받치는 기둥이라는 진리를 깨우치지 못했다. 일제 36년의 고난을 겪고도, 6·25(한국전쟁)라는 민족 상잔을 겪고도, 가깝게는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대구 지하철 참사, 더 가깝게는 세월호의 비극을 겪고도 정의와 사랑이 하나님의 축복과 번영을 보장해주는 유일무이한 길이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지. 경제성장을 하나님 자리에 앉혀놓고, ‘잘살아보세’라는 찬송을 부르며 맹진해온 결과가 바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란다.

기독 청년은 위기의 때마다, 정의와 사랑을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외쳐야 한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외쳤던 것처럼 ‘회개하라’고.(마 3:2; 4:17) 무엇보다 자기가 심겨진 곳에서 정의와 사랑을 몸으로 살아낼 때, 비로소 이 민족 이 나라를 향해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셔서 벌을 복으로 바꾸어주신단다. 정의와 사랑을 몸으로 살아낼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원자/작은 예수가 된단다. 소돔의 의인 열 명이 된단다. 

다음에는 밝고 따뜻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이만 맺는다. 

2016년 11월 5일
너희들에게서 예수의 희망을 보는 할아버지가.  

 

전성은
서울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65년 거창고 교사를 시작으로 2006년 교직에서 물러나기까지 41년간 지방 읍내의 학교에서 ‘지천명(知天命)의 교육’에 일생을 쏟았다. 샛별중학교 교장, 거창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으며, 참여정부 시절에는 대통령 직속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한 바 있다. 퇴직 후에도 교육 정책 및 교사 교육에 관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활발히 이어오고 있으며, 국제성서연합회 세계성경번역센터 한국 편집인으로 성경 번역에도 매진해왔다. 지금까지 쓴 책으로는 ‘교육론’ 3부작인 《왜 학교는 불행한가》 《왜 교육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가》 《왜 교육정책은 역사를 불행하게 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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