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호 동교동 삼거리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촛불 민의를 받은 정치인들과 특검팀, 검찰 관계자들이 유종의 미를 거둘지 아직은 확신할 순 없겠습니다. 이 와중에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는 국무총리는 인사권 행사 논란까지 불러일으키며 ‘대통령 놀이’에 한창입니다. 그 연장선에서, 국정 역사 교과서 강행 계획이나 사드 배치 의지는 아직도 건재합니다. 그 틈에 조류인플루엔자는 역대급으로 빠르게 확산 중이어서, 계란파동으로 시장이 아수라장 될 판입니다. ‘이러려고 대한민국에 태어났나…’ 자괴감이 드는 시절입니다.

나라 바깥 사정도 만만치 않습니다. 세계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자리에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전 세계가 경기하듯 놀랐고요. 지난 12월 말엔 러시아 대사가 경찰관 출신의 터키 청년에게 암살당했으며, 같은 날 베를린에서는 ‘묻지마 트럭 테러’로 최소 12명이 숨지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미 국지적 테러가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던 터라, 테러가 일상이 되고 있다는 이 느낌이 단지 ‘느낌적인 느낌’에서 그치길 바랄 뿐입니다.

참 난리법석인 세상입니다. 어느 드라마의 명대사였던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라는 말이 더 이상 드라마 속 대사가 아니어 가는 형편 속에서 우리는 불확실성으로 흐릿한, 새로운 한 해를 또 맞습니다. 2017년 새해 첫 커버스토리 주제는 ‘고립사’입니다. 무연사나 고독사라는 말도 있지만, 사적이고 개인적인 죽음을 넘어 ‘사회적 죽음’의 의미를 강조하는 데는 ‘고립사’가 적실하다는 주장에 공감합니다.

새해부터 ‘죽음’을 말하다니 뜬금없다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재작년 송파 세 모녀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남은 밥과 김치 좀 달라”던 한 시나리오 작가의 아사 사건은요? 가끔 ‘사건’이 되기도 하지만 어느새 흔한 죽음이 되어 뉴스거리에서 밀리는 ‘사회적 부고’지요. 누구나 알지만 실은 아무도 모르는 죽음 말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사회로부터 고립 당한 죽음’이 더 이상 쓸쓸하지 않게 배웅하고 기억하려는 분들의 목소리를 담아보려 했습니다. 그들은 “사는 것도 걱정, 죽음마저 걱정거리”(52쪽)인 세상에서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69쪽) 묻습니다. 3년 넘게 가까이에서 노년의 고립을 지켜보며 “명랑한 노후, 가능할까”(62쪽) 자문하기도 하고, 해마다 노숙인들과 같이 거리에서 고난주간을 보내는 목회자의 “한국교회여, ‘무연사’에 응답하라”(74쪽)는 외침도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그 사회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박사라 홈리스행동 활동가(“레드레터 크리스천”)와 정치학자 박명림 연세대 교수(“사람과 상황”)는 각기 다른 인터뷰에서 묘하게도 “죽음을 차별하지 말자”고 한 목소리를 냅니다. 죽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 이 사회의 안녕과 세계 평화를 넓혀가는 시작이라고 말입니다. 아픈 곳, 아픈 사람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아픈 사람들이 이 사회의 중심”이라고 외치는 이들의 삶 앞에서, ‘자괴감의 시절’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작은 희망을 품습니다.

새해에는 복상도 더 낮은 곳, 더 아픈 사람들에게로 향하겠습니다.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