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 3책]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지음 / 정다운 옮김 / 비아 펴냄

그런 때가 있다. 책을 집어들면 이상하게 원제를 확인하고 싶을 때가. 특히나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같은 뭔가 쌈빡한 제목,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순간 헷갈릴 정도로 긴 제목을 가진 책은 원래 출판사가 작심하고 지었는지, 한국 출판사가 스리슬쩍 바꾼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 마련이다. 이럴 때면 나는 본문으로 바로 직행하기보다는 판권지를 먼저 열어보곤 한다. 아니나 다를까. 원제는 “Speaking of Sin”(죄를 말하다)이다.

출판사로 전화를 걸어 꼬치꼬치 캐묻고픈 충동을 누르고 책 페이지를 조금씩 넘기다보니 책 제목을 바꾼 것이 수긍이 간다. 죄와 관련된 이야기가 주를 이루긴 하지만,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교회가 자신의 고유한 언어가 지닌 힘을 상실한 채 특정 방식으로 환원해 쓰고 있거나 다른 언어로 대치하는 모습을 문제 삼고 그 언어가 지닌 본래의 힘을 되찾자는 것이다. 좋아, 여기까진 오케이.

지은이가 유려한 글쓰기로 소문난 양반이어서 그런지 글도 술술 읽힌다. 그런데, 다시금 궁금증이 치솟는다. 이건 어디까지나 ‘미국교회’ 이야기 아닌가? 그들과 달리 한국교회는 죄와 구원의 언어, 기독교 고유의 언어를 여전히 많이 쓰고 있지 않은가? 부흥회를 가보라. 신들린 듯한 부흥사가 외친다. “니들이 죄인이야!” “아멘.” 교회를 가보라. 강연회라도 열린다 치면 사회자는 말한다. “성도 여러분 할렐루야로 인사하면 샬롬으로 답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샬롬!” 예배를 드려보라. 설교 중간에 목사는 묻는다. “여러분 믿습니까?” 그리고 그 설교가 끝나면 서로 속삭인다. “오늘 목사님 설교는 너무 은혜로웠어요.” 이 정도면 죄와 구원의 언어는 축소는커녕 넘쳐날 지경이 아닌가? 하지만 뭔가, 텁텁하다. 뭔가, 빠져 있다.

죄인, 아멘, 할렐루야, 샬롬, 믿음, 은혜와 같은 말들이 쓰이긴 했지만 사실상 저 말들은 모두, 언제든, 일상 언어로 바꿀 수 있다. 흘러 넘쳐 보이지만, 미국교회와 결은 다르지만 얼마든지 대치가능한 언어를 사용하거나(깊은 언어를 얄팍하게 쓰거나) 특정 방식으로 환원해 쓰기는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기독교 고유의 언어가 가진 깊이나 힘을 살려내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지금, 여기’도 태평양 너머의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게 지은이가 말하듯 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세속화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이데거가 했다는 말 중 내가 아는 유일한 단 한 가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들 하는데 한국교회가 쓰고 있는 언어, 죄와 구원의 언어에는 도대체 어떤 존재가 살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정말 기독교 고유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제대로 바라보고 이를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려 애쓰고 있는가?

이쯤 되니, 결국 이 책 제목은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특정 단어 하나가 아니라 ‘언어’ 전체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건 비단 죄와 구원의 언어만이 아니다. 뉴스를 보라. 모든 걸 기억할 법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하고 있다. 오 노! 더 말해 무엇 하랴.

새해다. 다른 누구를 탓하기 전에 내가 잃어버린 언어부터 하나씩 되살려 봐야겠다. 그럴 때가 됐다.


박용희
장신대 구내서점, IVP(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 ‘산책’ 북마스터로 일했다. 책, 여행, 사람을 좋아한다. 새해 들어 고양시 덕은동에 헌책방 ‘용서점’을 내고 책과 더불어 하루를 열고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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