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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영성, 내면 윤리의 사회적 구성
[315호 커버스토리]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315호] 2017년 01월 26일 (목) 11:51:38 박명림 연세대 교수 goscon@goscon.co.kr

공공성과 개인성의 만남
우리는 왜 좋은 공동체를 가지려 노력합니까? 우리는 왜 공동체를 구성하고 바꾸려 합니까? 그것은 우리 개인들의 개별적 삶들이 안정되고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때 개인은 나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을 말합니다. 나와 남, 즉 모두가 서로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공동체를 구성하고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면, 공공성의 목표는 곧 개인성인 것입니다. 공공성이 곧 개인성입니다. 전체가 곧 개인인 것입니다.

이 점을 분리해서는 문제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네 하나하나의 개별적 전체 삶들과 유리된 공공성, 전체성, 보편성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남을 위한 삶이 나를 위한 삶이고, 나를 위한 삶이 남을 위한 삶이라는 궁극적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공동체와 개인, 전체와 나 사이의 공존성이자 상호성, 공통성이자 교호성이라고나 할까요? 참으로 오묘하고도 놀라운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가르침의 골간 중 골간이며,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가고자 했던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적 나눔이나 청빈은 존경하면서 국가나 사회 전체 차원의 분배 체계, 복지 사회를 만드는 일은 ‘급진’ ‘복지만능’ ‘좌파’라고 공격하며 거부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기득 논리요 허위의식이자 이데올로기입니다. 개인 도덕은 결코 개인적 차원의 도덕이 아닙니다. 개인 희생은 말할 필요도 없고, 개인 도덕 역시 사회적인 것입니다. 동시에 사회와 유리된 개인 도덕은, 내면적 자기완성의 경우가 아니라면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 도덕만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윤리나 시민적 삶을 가로막는 장애요 허구일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성은 공공성이요 동시에 사회성인 것입니다.

왜 공공성이 곧 개인성이고, 개인성이 곧 공공성입니까? 공공성의 제고 없이 개별 삶들은 안정되고 보호받기 어렵습니다. 전체 없는 개인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공공성 붕괴의 궁극적 귀결은 곧 실존성, 개인성의 소멸입니다. 전체 공동체 차원의 ‘전쟁사회’가 인간관계 차원의 ‘살인사회’로 연결되고, 끝내 개인 차원의 ‘자살사회’로 연결되는 연쇄고리는 우리로 하여금 깊은 고뇌를 불러일으킵니다. 경쟁 만능의 ‘전쟁 같은 공동체’에서 인간들 사이는 대화 대신 ‘폭력적 인간관계’로 진입하며 고립된 개인들은 절망한 채 ‘삶의 희망을 상실’합니다.

저는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발전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봅니다. 물론 궁극적 목적은 개인입니다. 인간 존재의 궁극적 목적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자유롭기 위해 평등해야 하며, 평등하지 않고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개인을 위해 왜 우리는 공동체를 먼저 바로 세워야 합니까? 그것은 자유와 평등이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롭지 못한 공동체에서 우리는 결코 평등하지 못하며, 평등하지 못하면 일부는 자유로울 수 있지만 모두가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고민은 늘 나 자신의 발전이지만, 성경은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이하 개역한글). 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까? 천국 없이 천국 백성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가장 중시하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은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단지 ‘더해준다’고 하였습니다. 완전히 반대입니다. 무엇이 먼저입니까? 전체가 우선인 것입니다. 자신을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전체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영혼은 진리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는 것과 똑같이 인간 실존은 전체 안에서 비로소 자유롭습니다. 공동체는 자유의 전제인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성과 개인성을 추구하지 않는 공공성과 전체성은 매우 위험하고 불필요합니다. 일체의 독재와 전체주의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때문에 둘은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 분리되고 멀어질수록 개인성은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로 흐르고, 공공성은 전체주의와 독재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내면 윤리의 사회적 구성 : 가장 중요한 개별적 전체 덕목
양자가 공히 추구되어야 할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면 윤리의 사회적 구성’이야말로 개인 삶과 공동체 윤리의 공통적인 최고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들 각자의 삶의 완성도는 내면 윤리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외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는가 보다, 내가 얼마나 양심적이고 윤리적인가는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외적 성공이 그 사람됨의 징표는 결코 아닙니다. 높은 외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낮은 내면 윤리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차라리 낮은 성공과 높은 내면 윤리를 추구하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내면 윤리의 완성도야말로 사람됨의 척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면 윤리는 고립된 채 독자적으로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개인적 득도의 과정이 아닙니다. 타인들과의 끝없는 사회적 관계와 대화 속에서 형성되고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즉 대화를 통한 사회적 구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회적 구성 과정을 통해 공동체와 전체 사회의 성격이 결정됩니다. 그런 점에서 ‘내면 윤리의 사회적 구성’이 개별적인 개인들의 차원을 넘어 타협과 합의를 통해 집단의 차원으로 상승할 때, 그것은 곧 사회의 구성 원리가 되고 제도가 되고 법률이 되고 헌법이 되고 체제가 되는 것입니다. 곧 ‘내면 윤리의 사회적 구성’이야말로 곧 목적인 동시에 절차이며, 이성의 법칙인 동시에 사회적 절차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좋은 삶과 좋은 공동체의 동시 추진, 동시 건설은 바로 ‘내면 윤리의 사회적 구성’,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중요한 것을 조금 깨달은 듯한 이 지점에서도 우리는 깊이 망설여집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공적으로 성공했다고 해도 사적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사적 삶이 성공했다고 해서 공적 의미가 성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높은 지위에 오른 자라고 해서 자녀의 죽음이 결코 고통스럽지 않은 일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이라고 해서 사람들에게 바른 양심의 사람으로 남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비아또르’로, ‘지능인’에서 ‘순례인’으로
우리는 왜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부릅니까? 그것은 동물과는 달리 지능을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정의에 불과합니다. 동물과 구별되는 ‘지능적 인간’에서 좀 더 나아가려면 인간은 마땅히 ‘인간적 인간’(homo humanus)이 되어야 합니다. 이때 ‘인간적인’의 말에는 ‘깨우친’ ‘자비로운’ ‘교양 있는’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적 인간’은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사는 존재로서 ‘사회적 인간’(homo societas)의 뜻을 함의합니다. 인간은 공동체 속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앞서 ‘내면 윤리의 사회적 구성’에 대해 말했지만, 인간은 정신적 영적으로 늘 근본과 진리와 지혜를 찾아 방황하고 여행하는 존재입니다. 끝없이 묻고 찾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영구안정과 영구평안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있는 한 영구안정과 영구평안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이지요.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영원히 헤매고 방황하고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곧 평안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영원한 정신적 영적 순례자인 것입니다. 순례자로서의 인간, 즉 순례적 인간(homo viator)인 것입니다. 여기서 순례란 ‘영혼의 순례’를 말합니다. 즉 인간은 자기의 근본과 영구평안을 찾아 영원히 순례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종교적 인간입니다. 순례적 존재인 것입니다.
자기를 묻고 찾는 순간은 다른 말로 근본에 대한 고민을 하는 시점입니다. 근본에 대한 고민을 하면 반드시 자기의 존재 이유와 진리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종교적 절대성, 또는 절대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며, 그럴 때 자신의 소명을 묻게 됩니다. ‘나는 세상에 도대체 왜 왔는가?’를 묻게 되는 거지요. 이른바 ‘귀환의 원리’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나의 소명을 묻는 가운데 남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주위에 나보다 더 상처받고 다치고 가난하고 억눌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카네이션: 소명·진리·사명이 살을 뚫고 들어온 사람 – ‘사회적 영성’
어버이날에 우리는 카네이션을 부모님께 달아드립니다, 왜 그 많은 꽃 중에 하필 그 꽃을 드립니까? ‘카네이션’은 피부, 살, 몸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에서 온 것입니다. 따라서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드리는 이유는, 내 피부, 살을 주신 부모에게 그 일부를 다시 돌려드린다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첫 감사의 표현을 최초로 자기 살을 나눠주신 부모님께 드리는 것이지요. 부모들, 그분들을 떠올릴수록 가슴이 먹먹해지는 원리입니다.

카네이션의 본래 뜻을 떠올리면, 내 살을 뚫고 진리가, 소명이, 말씀이 들어오는 것이 곧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뜻의 ‘인-카네이션’(incarnation, 成肉身)입니다. 말씀, 진리, 소명이 우리 몸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incarnatio/incarno] 우리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정신적 영적 몽매와 타락과 무지가 깨지고 무너지고, 끝내 치료되고 회복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이 곧 인-카네이션인 것입니다. 꼭 어떤 신비한 종교적 체험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소명과 진리가 우리 속에 들어오는 영혼의 계기를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전면적으로 다시 돌아보게 하고, 어떤 가치나 사명을 위해 거듭나게 합니다. 삶과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이 번쩍 뜨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전체를 보았다는 뜻이며, 또 전체 가운데 나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잠시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인 하나의 논리를 생각해볼까 합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분명)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 14:7)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그렇습니다. 예수를 본[안] 것은 전체, 곧 하늘, 창조주를 본[안]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나[예수]를 본[안] 것은 아버지(즉 전체)의 (피조물로서) 너 자신을 본[안] 것이며, 너 자신을 본[안] 것은 전체, 즉 하늘, 하나님, 사명, 소명을 본[안] 것을 의미합니다. 전체를 안 것은 나를 알았다는 뜻입니다. 부분과 전체로서의 나를 동시에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본 것은 곧 전체[하나님]와 부분[나]을 함께 본 것을 뜻하며, 그 연결고리를 분명히 깨달았음을 의미합니다. 영혼의 사정없는 떨림을 경험함으로써 내 전 존재를 흔들어 깨워 삶의 의미를 깨닫고 살아갈 비전과 각오가 자신의 안으로부터 새로이 생겨나는 것을 말합니다. 목숨을 살려내는 행위, 즉 생명(生命)이 안으로부터 솟아오름을 말합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소명은, 전체는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분을 만나는 것이 은혜이고 축복이고 거듭남인 까닭입니다. 이미 주신 것을 불러오면 됩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우리에게 접속, 즉 인-카네이션이 일어나지 않아서 모르고 지내왔을 뿐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말했습니다.

“살게 하는 것은 개인에 있지 않고 전체에 있다. 전체는 또 실지로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내게, 곧 자아에 있다.”

다시 성경말씀을 보면, 앞에서 ‘나를 알았다면’ 뒤에 현재와 현재완료가 따라 나옵니다. 즉 이제부터 알게 되면 지금까지 알아왔고 보아왔다는 것도 알게 되어, 아는 지금 이 순간부터 과거마저 전연 다르게 해석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봤다는 것은 곧 예수를 안다, 인정한다,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안다,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본다는 것은 곧 우리가 온 근원을 안다는 것입니다. 불명확한 것들이 명확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봤다는 것, 전체를 봤다는 것은 곧 부분으로서의, 피조물로서의 너를 봤다, 너를 깨달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네가 전체의 부분이라는 것을 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네가 나를 봤다는 것은 네가 너를 봤다는 것입니다. 이 두 말은 같은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봤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사명을 봤다는 것입니다. 전체와 부분을 동시에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보고 나도 봄으로써 나를 세상을 보내신 소명을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본다는 것은 그만큼 영혼의 떨림과 혁명적 충격으로 다가오는 말입니다. 전체를 만나는 인카네이션과 함께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혁명 중 가장 위대한 혁명인 ‘영적 혁명’ 말입니다.

전체를 만나는 것이 왜 혁명입니까? 곧 성서에서 계속 ‘전령’ ‘심부름꾼’ ‘낮은 자’ ‘섬기는 자’ ‘사도’와 같은 말을 쓴 이유입니다. 인간 쪽에서는 이끄는 자, 앞에 선 자, 지도자인 사람이, 하나님 쪽에서는 말씀을, 섭리를, 소명을, 사명을 가장 먼저 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말씀을 듣고 전체를 보고, 그럼으로써 낮아지고 깨닫고 소명을 자각한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먼저 깨닫고 낮아지고 심부름하려는 자는 인간 무리들 편으로 돌아서면 곧바로 가장 앞에 서 있는 자이고 이끄는 자이고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소명을 받은 뒤, 사람들 쪽으로 돌아서서 사명 받은 자로서 행동하게 되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낮아지는 것이 (사람 사이에서는) 높아지는 것이고, (전체에서) 낮은 것이 (스스로는) 높은 것이며, (피조물로서의) 부족함을 깨닫는 자가 (남들 앞에서는) 가장 채워지고 우뚝 서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 사회적 영성의 궁극적 목적(telos)
전체 문제에 눈을 뜨게 되면 전체 과제와 내 사명이 항상 팽팽한 긴장 속에 놓이게 됩니다. 둘 사이에 강력하고도 단단한 끈이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부름이고 소명이고 사명인 것입니다. 그럼 마침내 그 전체 속에 자기 삶이 도구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어떤 가치를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깨달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은 내가, 훈련받은 내가, 전체의 눈을 뜬 내가, 사명 받은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그래서 한 사람의 의인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걸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영혼은 늘 깨어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우리의 영혼을 늘 깨어있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게 한 사람의 의인으로 살 영적 각성이 있는가, 나의 변화가 어떻게 타인과 세상을 변화시킬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삶 속에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결단해야 하는 삶의 제일 화두입니다. 매일 매일의 기도 제목인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나의 주체적 의지요 결단인 동시에, 내 영혼을 움직이는 존재가 나로 하여금 전체를 보게 한 것입니다. 가슴이 떨리고 눈이 번쩍 뜨이고 영혼이 설레고 손발이 저려오는, 그리하여 온몸에 전율이 오는 그 전체와의 영적 만남을 말합니다.

전체를 만나는 것, 그것이 바로 놀라운 체험인 ‘인-카네이션’이고 ‘사회적 영성’인 것입니다. 영성은 하나님, 즉 전체를 깨닫는 것이고, 깨닫는다는 것은 곧 전체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전체 속의 나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나의 사명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영성은 당연히 ‘전체적’ ‘공동체적’ ‘사회적’ ‘개별적’인 것입니다. 영성은 본질적으로 하나님·본질·전체로부터 시작하여 자기를 거쳐 다시 공동체·전체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것입니다. 거듭난 내 영혼이 바로 은혜-말씀-진리와 전체-공동체-사명의 연결고리인 것입니다. 즉 ‘사회적 영성’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드디어 자기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과, 세계에 대한 사랑의 구별이 무너짐을 깨닫게 됩니다. 마침내 자기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과, 전체에 대한 사랑이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곧 책임입니다. 책임(responsibility=re[re]+spondere[to pledge])은 거듭 약속하고 거듭 서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 열정과 수난의 길을 자임하는 것입니다. 외면은 사랑도 책임도 아닙니다.

특별히 사망에 이르는 자를 외면하면 결코 안 됩니다. 자살과 저출산과 존속살인과 비속살인이 인류사상 최고의 기록적인 수치를 나타내고 있는 반생명·반인간·반생명적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죽음에 대한 외면은 인간과 교회와 성도의 가장 큰 죄악입니다.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치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내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잠 24:11-12)

“어디에 누구와 있었느냐?”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지금 아픈 곳입니다. 한 곳이 아프면 그곳을 치료하기 전까지는 온몸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 아픈 곳 때문에 우리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한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도,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라 지금 아픈 사람입니다. 그가 낫기 전까지는 온 가족이 아프고, 고통받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람들 역시 지금 아픈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입니다. 우는 자, 아파하는 자가 많은 사회는 병든 사회요, 무너진 공동체입니다. 이토록 우는 자가 많은 공동체에서 우리가 마땅히 서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사망의 순간에 “너는 어디에 누구와 있었느냐?”라고 물으실 때에 어떻게 답해야 합니까? 돈, 물질, 부자들, 권세의 편에 있었다고 해야 합니까?

믿음은 원천적으로 낮은 자들, 우는 자들, 아파하는 자들을 위한 연대의 손길이자 영적 울림입니다. 그들의 소리를 듣고, 그들과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며, 반생명적 반인간적 반그리스도적 방향으로 달음질치는 한국 사회를 치료하는 방향전환의 책임과 소명 실현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outside the city gate)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outside the camp)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2~13)

여기서 “성문 밖” “영문 밖”은 문명의 바깥, 곧 권세·부·안정·지배의 바깥을 의미합니다. 질병, 다툼, 가난, 아동, 야만, 어둠, 장애, 여성, 이방의 영역 말입니다. 그들을 나의 영성과 삶 안에 끌어안고 사랑하는 것이 세상을 향한 모든 사랑 중 첫사랑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amor vincit omnia) 이 사랑은 특별히 낮은 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됨이고 긍휼이고 측은지심이고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세계의 모순과 이 땅의 부조리와 내 이웃의 고통과 나의 죄를 끌어안고 아파하고 통곡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긍휼과 통곡을 실천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박명림
연세대학교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로,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실장 및 하버드대학교 하버드옌칭연구소 협동연구학자를 역임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독보적인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세계적·보편적인 관점에서 현대 한국 정치와 역사를 재해석해왔으며, 현실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이론적·실천적 대안을 제시해왔다. 저서로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 《역사와 지식과 사회》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인간 국가의 조건 1, 2》(예정), 공저로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6》 《다음 국가를 말한다》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 등 다수가 있다. <복음과상황> 1월호(314호)에 인터뷰 “‘현장 지식인’ 박명림 교수가 말하는 광화문 혁명, 세월호, 희망”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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