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호 커버스토리]

지난 몇 년간 한국교회는 가열차게(?) 추락해왔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했던가. 밑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그 민낯을 드러냈다. 해외에서 선교사로 지내다 최근 귀국한 이들을 만나보면, 한결같이 지금 교회의 모습이 당혹스럽고 적응되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줄곧 국내에만 있었음에도 낯설고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돌아보면 지난 몇 년은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답을 찾는 시간이었다.

목회자로서 경험한 ‘회심’의 순간

문제의식을 가진 건 어느 기업에서 직장인의 삶을 경험하면서부터다. 믿음의 기업을 내세우는 그 회사는 목회자들을 고용해 직원 신앙 교육을 담당케 한다. 비즈니스 환경이지만, 하는 일은 교회와 같다. 직원들을 만나고, 설교, 예배, 성경공부, 상담 등 기본적인 목회 업무들을 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예배당 안에서 만나지 않고 성도들이 일하는 일터 내부에서 접촉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게 차이가 무지 크게 다가왔다.

‘내가 교회에서 만나는 성도들이 이렇게 참혹하게 살아가고 있었던가.’

처음 든 생각이다. 치열한 업무와 그 안에서의 엄청난 스트레스, 게다가 장시간 노동에서 비롯된 가정생활의 어려움, 나아가 젊은 시절 예배당과 캠퍼스를 누비던 그 신앙의 패기를 잃어가는 것에 대한 내적 갈등까지. 예배당 안에서 성도들을 접촉하던 목회자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소위 ‘미생’의 삶을 확인했던 것이다.

변화가 찾아왔다. 어느 주일 오전 찬양인도를 하고 있는데, 한 성도분이 뒤늦게 헐레벌떡 들어와 앉으신다. 이전 같으면 예배 시간도 맞추지 못하는 태도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있었을 건데, 그날은 이상하게 울컥하는 맘이 올라왔다. 찬양 인도에 미세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감정이 흔들렸다. 저 분이 이 자리에 오시기까지 한 주간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사셨을까 생각하니 오히려 애처로웠다. 이전엔 하지 못하던 생각이고, 느끼지 못하던 감정이다.

일터에서 ‘목회자로서의 회심’을 경험했다고 할까. 성경을 보는 눈이 바뀌었고, 설교가 달라졌다. 목회 패턴도 바뀌었다. 실상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직장인이 주중에 따로 시간을 내어 신앙적인 어떤 활동을 하기가 매우 어려운 현실이라는 걸 알았다. 심지어 직장 내부에 목사가 머물러 있음에도 접촉하기가 어려웠다. 노동자를 극단으로 내모는 한국 사회에서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기하며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확인했다. 그들을 정죄할 일이 아니다. 주중 대부분을 예배당에 머무는 목회자 누구라도 그와 같은 환경에서 직장인으로서 살아간다면 마찬가지일 테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없다. 그렇게 살아가며 그나마 휴일의 시간을 할애하여 신앙의 일들을 해나갈 자신이 내겐 없다.

   
▲ 사진: 황정현 제공

교회,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방법을 바꿔야 했다. 그렇지 않고선 그들을 도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GBS도 사영리도 그들에겐 또 다른 업무이겠구나 싶었다. 그때부터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업무를 하는 직원들 옆에 함께 앉았다. 언제든 원할 때 접촉할 수 있도록 곁에 머물렀다. 함께 점심을 먹고, 야근을 하고,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니 직원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업무 얘기를 비롯하여, 개인적인 상담과 가족, 진로, 최종적으로 교회에 대한 얘기들을 터놓기 시작했다. 본인이 출석하는 교회의 여러 어려움, 그리고 목회자에 대한 문제까지.

기업 특성상 신앙인 비율이 높았다. 내가 맡은 부서만 하더라도 누구나 알 만한 대형교회부터 개척교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헌데, 상담을 해보면 내용이 같다. 크건 작건, 잘 알려진 교회건 그렇지 않건, 교인들이 하는 얘기는 같았다. ‘돌봄이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자기 교인을 돌보지 않았다. 어느 순간은 ‘한국교회 성도를 나 혼자 상담하고 있나’ 착각이 들 정도로 직원들의 깊은 얘기를 일일이 듣고 반응했다.

참 이상한 노릇이다 싶었다. 각자 본인이 출석하는 교회가 있고, 거기서 많은 봉사를 하고, 성경공부를 하며, 목회자와 관계를 맺기도 하는데, 그런데 왜 교회는 이들의 깊은 고민을 들어주지 않을까. 이들의 힘든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보듬지 않을까 궁금했다. 그 지점에 이르니 문제가 보였다. 우리가, 한국교회가 얼마나 피상적이고 비본질적인 지향이었는지 실체가 보였다.

사람이 없다. 어느 곳보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이 한국교회지만, 그 어느 곳만큼도 사람에 관심이 없는 곳이 한국교회였다. 수십 년을 다니고, 멘토라고 따르는 목회자가 있는 교회에서도 성도의 뼈아픈 현실과 고민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돌보지 않는다. 기업 경영자와 다를 게 없구나 싶었다. 신앙을 지닌 직장인은 주중에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주말에는 교회로 출근하는 형국이었다. 결국 두 회사를 다니고, 두 회사의 경영자를 섬기는 모습이 아닌가.

직장 사역 얘기가 길었다.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직장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려면 무엇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익숙지 않던 사회과학서적을 읽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목사가 이런 책을 읽어야 하나 싶은 책까지 집어 들고 읽어나갔다. 그러다 4·16 참사가 터졌다.

2014년 4월 16일, 광장, 참담한 한국교회

2014년 4월 16일. 그날이 이리도 잊지 못할 날이 될 줄은 그땐 몰랐다. 누군들 알았을까. 여객선 사고 소식을 들으며 출근했다. 전원 구조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렸으나, 오보라는 얘기를 듣고 뭔가 잘못됐구나 싶었다. 텔레비전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갖가지 보도와, 실체를 잡기 힘든 소식들이 이어졌다. 불안했다. 진위를 알 수 없이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러던 중 현장에서 실종자 가족들의 증언이 들려왔다. 아…, 비로소 갈피가 잡히고, 사태가 파악됐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밥을 먹기도, 잠을 자기도, 숨을 쉬기도 두려운 시간이 이어졌다. 팔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설마’가 실낱 같은 희망으로 바뀌고, 그 희망은 결국, 안산에 꾸려진 임시합동분향소 조문으로 끝이 났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생애적 참담함이 모든 걸 짓눌렀다. 삶의 지향 자체가 뿌리째 흔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냉혹하게 현실을 따져 물었다. 결국 고장 난 우리 사회를 바꿔야만 한다는 결론이다. 앞선 고민과 연동됐다. 학습은 현장으로 이어졌다. 광장으로 나갔다. 가열찬 그해 여름을 그동안 보냈던 시간과는 전연 다르게 보냈다. 보수교단 목사로서 겪어온 이전과는 다른 만남이 이어졌다. 비신자뿐 아니라 타종교 신도와 종교지도자, 진보운동가, 진보정치인…. 광장은 내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었다. 내부인으로서 인식해 온 한국교회를 객관적으로 보는 안목이 생겼다. 그렇게 다시금 들여다 본 한국교회는 참담했다. 이웃 없는 종교. 성경에 선명히 새겨진 예수의 삶과 말씀과는 크게 어긋난 모습이었다.

세월호와 관련하여 한국교회의 죄악은 위중하다. 참사 당시만 해도 함께 당혹하고 애도하는 모습이 있었으나, 극우언론에서 세월호 유가족에 ‘붉은칠’을 하며 사실을 호도하자 교회는 침묵을 넘어서 패륜적 언행을 일삼기 시작했다. 다 열거하기도 불쾌한 여러 교회와 목사들이 얽혔다. 그중에는 으레 그러려니 하는 부류뿐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도 있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 전반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정치권은 물론이요, 국가기관에 기업과 종교까지 세월호 이슈에 연관되었다.

   
▲ 사진: 황정현 제공


결국 세월호는 한국교회 민낯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누군들 예상했을까. 섭리라고 해야 할까. ‘적폐’라고 할 만한 한국교회 모습이 낱낱이 드러났다. 여론과 시민사회의 뭇매를 맞으며, 교회 안팎으로 비판과 자성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안산이라는 지역의 특성 때문이다. 소위 ‘복음화율’이 높은 지역이다. 교회가 많고, 잘 알려진 대형교회만도 여럿이다. 때문에 참사를 당한 피해자와 가족의 상당수는 집사는 물론, 장로, 권사, 목회자 가정까지, 교회에 깊이 관여되어 있는 분들이었다.

우리는 왜 광장으로 나와, 피켓을 들고, 촛불을 밝히는가

한국교회는 그들을 버렸다. 이웃 교회, 이웃 성도, 내 교회, 내 성도를 버렸다. 세월호 1주기, 정부의 소극적인 대처에 저항해 희생자 가족들은 삭발을 했다. 엄마, 아빠 할 것 없이 수십 명의 부모님들이 파르라니 머리를 밀었다. 돌아오는 주일, 그 모습으로 여느 때와 같이 교회학교 교사를 하던 엄마는 지적을 받았다. 교회에서 그런 모습으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 했단다. 십수 년을 교사로, 수십 년을 여러 모양으로 섬겨온 교회를 그렇게 내쫓기듯 나왔다.

이런 직접적인 부딪힘이 없더라도 세월호 가족분들에게 교회는 점점 낯설고 나와는 무관한 곳이 되어갔다. 이미 종교 산업과 같은 한국교회에게 자식을 잃어 사경을 헤매는 부모는 불편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기야 참사 직후 맞은 부활주일, 온 국민이 참사 가운데 애도와 분노의 맘으로 힘겨워 할 때, 교회는 큰 절기랍시고 호들갑이나 떨지 않았던가. 고난주간과 부활주일도 한국교회에선 그 의미를 상실한 종교 행사가 되어버렸다.

나라가 엉망이다. 책임자를 규탄하는 시민 저항이 거세다. 그 가운데 세월호에 대한 소리가 응어리져 있다고 믿는다. 지난 몇 년과 무척 다른 분위기가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교회의 소리도 들린다. 이젠 촛불과 피켓을 드는 것이 신앙의 미덕인가 싶은 인상도 받는다. 반가운 일 맞다. 하지만 마냥 맘이 편치만은 않은 건, 외형이 같다고 모든 것을 올바르다 하지 않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 때문인가 보다. 촛불 드는 게 불편해 보일 리가 있겠냐마는 그 동기와 목적을 점검하는 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왜 광장으로 나오는가. 우리는 왜 피켓을 드는가. 우리는 왜 촛불을 높이 밝히는가.

세월호 참사 1주기. 정부는 여전히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세월호 침몰의 원인과 기타 전반에 관한 진실 규명은 커녕, 세월호 선체 인양과 미수습자 수습마저도 약속과는 달리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2014년 참사 이후 그 해 11월까지 팽목항에서 수색 작업을 지켜보던 미수습자 가족들은 정부의 선체 인양 약속을 믿고, 수색 중단을 수용했다. 하지만 인양은 지지부진했고, 부모님들은 청와대로 홍대로 광화문으로 자식을 찾아달라는 피켓을 들고 서기에 이르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자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옆에 같이 피켓을 들고 서게 되었다. 그렇게 홍대로, 청와대로,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나는 왜 피켓을 드는 걸까’

매주 금요일이면 청와대로 향한다. 세월호 인양과 미수습자 수습을 호소하는 1인 시위다. 벌써 1년 반 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영하 10도의 추위에도, 영상 30도를 웃도는 폭염에도 시민들과 그 자리를 지켰다. 초기에 함께하시던 미수습자 가족분들은 인양 작업이 시작되면서 팽목항을 지키고 계신다. 많은 시민들이 그분들을 대신해 미수습자 피켓팅을 이어가고 있다. 얼마 전 그렇게 참사 1,000일을 맞았다. ‘나는 왜 피켓을 드는 걸까.’ 매번 나갈 때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게다가 참사 초기에 비해 시위 문화가 확산된 지금은 목사가 피켓을 든다는 것이 오히려 누군가에겐 환영받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질문은 중요하다.

‘사람’ 때문이다. 보수교단 목사로서 줄곧 읽고 배워온 것은 보수 신앙의 가치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한 영혼의 소중함, 생명에 대한 무게감이다. 그런 이유로 보수 신앙은 낙태를 반대하고, 영혼 구원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복음을 통한 개인 전도를 중시한다.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헌데, 정작 사회문제에 대한 보수교회의 대응을 보면 그렇지 않다. 사람이 없다. 사람은 없고, 사안만 남아 있다. 생명보다 명분이다. 사람보다 정치적 입장이 먼저인 듯 보인다. 그게 보수인가. 그게 보수의 가치인가.

누군가는 피켓 드는 목사를 보수라 여기지 않을지 몰라도, 스스로는 내가 몸담고 익혀온 신학과 전혀 충돌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배운 그대로를 잘 드러내는 행위라 여긴다. 처음 마음은 이랬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한국교회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외면했다. 차라리 핍박, 박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의 속내를 드러냈다. 직분자로 있던 분들마저 예배당을 떠났다. 과연 그분들 마음속에서 교회는 무엇이며, 하나님은 누구실까. 정작 어려움을 겪을 땐 외면하는 교회라니….

목사로서 그분들 옆에 있어드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목사로서’ 말이다. 물론 많은 시민들이 함께하고 계시지만, 혹시나 목사가 함께하면 신앙적 위로를 얻지는 않으실까 하는 마음이었다. 지금도 그 마음은 같다. 멀리 팽목항에 계셔도 온라인을 통해 늘 미수습자 피켓팅 활동을 지켜보신다. 혹여 피켓팅이 멈춰지지는 않을까 걱정하시다가도, 참석자가 많은 날은 든든해하며 힘을 내신다. 여전히 우리가 잊지 않고 함께한다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마음을 전한다.

우리는 예수의 초상을 가지고 있는가

목사에게 현장은 어디인가. 교회인가, 광장인가, 직장인가. 목사에게 현장은 사람이다. 사람이 현장이다. 피켓을 들고 촛불을 드는 것도, 설교를 하는 것도,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도, 결국 사람 때문이다. 사람 살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촛불을 드는 게 아닌가.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지지하고 편 들어주는 게 집회, 시위 아닌가.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대신 전하는 것, 그리고 생존과 자아에 함몰된 청중을 향해 이웃을 돌아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신 일깨우는 것이 설교 아닌가. 예배당 안이냐 밖이냐를 떠나 사람과 접촉하고 그들의 곤란한 처지를 헤아리고 공감해주는 게 목사로 부름 받은 바에 합당한 업무가 아니던가.

늘 위기의 때엔 처음으로 가면 된다. 우리의 처음은 어디인가. 우리의 처음은 예수님이다. 예수께로 가면 된다. 예수가 길이고, 예수가 진리고, 예수가 생명이다. 예수가 답이다. 예수께선 사람을 돌보셨다. 예수의 현장은 사람이었다. 열여덟 해를 하혈하던 여인도, 일평생 늘 그 자리에서 구걸하던 사람도, 귀신 들린 아들을 데려온 아비도, 심지어 동족의 세금 징수로 부자가 된 녀석도 모두 예수께는 현장이었다. 한국교회의 현장은 어디인가. 목사들의 현장은 어디인가. 수백, 수천 억짜리 예배당인가. 좋은 학위를 주는 유학길인가. 폼 나는 강의실인가. 주목받는 광장인가. 사람을 돌보면 어디든 현장이고, 사람이 없으면 어디든 자기만족을 위한 놀이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을 돌보는 일은 거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짐 월리스는 ‘사회적 약자와 적극적으로 얽히라’고 말한다. 그들이 더 이상 남이 아니라 나와 관계있는 이웃이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적극적인 행동은 비롯된다. 사회적 약자와 얽히는 건 비단 그들만을 위함이 아니다. 이는 깨지지 않는 단단한 콘크리트와 같은 한국교회를 갱신하는 길이다. 독일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오래전, 세속화된 독일교회의 회복의 길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를 돕고 지원하는 것이라고 제시했다. 본질적인 예수 정신은 그렇게 회복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올바른 예수의 초상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지닌 초상은 혹시 예수의 그것이 아니지는 않을까. 다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우리의 욕망을 버리고 예수를 읽어야 한다. 예수의 삶과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 말씀이 나를 광장으로 이끌었고, 오늘도 여전히 이 말씀은 나를 현장으로 내몰고 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마 25:42-45)

황정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랜드에서 사목으로 근무했으며, 현재 제자도연구소 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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