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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길과 하나님의 시간
[316호] 요한계시록 4장
[316호] 2017년 02월 22일 (수) 16:57:04 정재훈 용인 덕성교회 전도사 goscon@goscon.co.kr

하늘 문이 열리다
부퍼탈 신학교 대학원 시절, 이스라엘 고고학 연구위원으로서 독일로 파송 온 피비거(Dieter Vieweger) 교수는 구약 중간고사 구두시험 때 나에게 ‘묵시문학의 다니엘서와 지혜의 관계’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 다니엘 12:3에 나타난 지혜의 의미를 인식했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이하 새번역) 

요한계시록 4장에서 요한은 하늘의 음성을 듣고 성령에 의해 하늘로 입성한다. 예수님은 요한을 ‘지혜 있는 사람’으로 여기셨는가 보다. 어렵고 험난한 환경 속에서 일곱 교회를 돌본 요한은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으로 여김을 받았을 것이다. 여기서 지혜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다니엘이 그랬듯,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편에 함께 동무하는 것. 그 이상의 지혜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현자들이 보기엔 미련하기 그지없는 생의 허비일 것이다. ‘인자 같은 이’는 3장의 말미에서 교회를 향해 문 열어주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간절히 피력하셨다. 그러나 예수 본인은 이미 자기의 문을 열어 놓고 계신다. 그렇다면 열려진 하늘의 문을 ‘얻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선 성경에서 ‘하늘 문’이 언급된 최초의 기사를 찾아보자.

“그[야곱]는 두려워하면서 중얼거렸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창 28:17)

광야에서 야곱이 만난 하나님이 약속하신 꿈, 그것은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하늘로 가는 문과 그 사다리였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하늘 문이라는 다리로 연결돼 있다. 그러면 그 열린 하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이기는 사람은 (마치)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계 3:21)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그리로 가는 희망의 단서도 붙들 수 있겠다.

과연 이기는 것은 무엇인가?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시록은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는가? 그렇진 않다. 오히려 그 대답을 ‘이기는 자에게 주는 상급’으로 대신하고 있다. 이 상급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놀랍게도 일곱 교회를 위한 상급의 처음 여섯이 모두 오경의 염원을 담고 있다.

에베소 계 2:7 창 3:22 생명나무
서머나 계 2:11 창 6:11 사망의 해
버가모 계 2:17 신 8:3 만나
두아디라 계 2:26 창 17:16 열방의 주권
사데 계 3:5 출 32:32 생명책의 이름
빌라델피아 계 3:12 창 28:22 성전의 기둥
라오디게아 계 3:21 창 37:9 24인 장로의 경배 & 해, 달, 열한 별의 경배

‘생명나무’에서 ‘성전의 기둥’까지는 창세기의 전 역사와 족장사(族長史), 그리고 출애굽 사건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역사의 징검다리다. 처음 여섯 교회의 이긴 자를 위한 약속과 라오디게아 교회의 이긴 자를 위한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전문적인 영역이라 이 글에서는 생략하고, 일곱 번째 약속[라오디게아 교회, 계 3:21]을 더 들여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인자 같은 이의 약속에 의하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이긴 자는 4장에 언급된 보좌에 동석해야 하고 24인 장로의 경배를 하나님과 함께 받아야 한다. 이와 가장 비교될 만한 장면은 요셉의 꿈이다: “들어보셔요. 또 꿈을 꾸었어요. 이번에는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절을 했어요.”(창 37:9) 여기서 ‘절하다’와 계시록의 ‘경배하다’(계 4:10)는 같은 단어(προσκυνέω, 프로스쿠네오)다. 

야곱이 본 것이 하늘 ‘입구’라면 요셉은 하늘 ‘속’을 보았다. 야곱과 요셉의 꿈을 수놓은 하늘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요한이 본 계시 사건 속에 모세오경의 신학이 재차 대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긴 자를 찾는 예수의 말씀은 실패의 역사를 되돌아보라는 요청은 아니었을까? 오경은 말한다. “… 주께서 너희 가운데 계시지 않는다. 너희는 적에게 패한다.”(민 14:42, 표준새번역) 오경의 관점은 자명하다. 모세와 백성은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들이 왜 패했는지를 알면 이기는 법도 배울 수 있으리라. 진 자에게 하늘의 꿈은 꿈일 뿐이다.

하나님의 필살기, 배수의 진
계시록에서 오경의 실패를 환기시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회가 출애굽 공동체의 연장선에 있다는 뜻이다. 약속의 성취는 계시록의 마지막,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계 21, 22장) 어쩌면 계시록은 오경을 완성하고 있다.

   
 

 

 

 

 

 

 

 

 

 

 

직접적 상관관계를 생각하기 어려운 창세기 12, 20, 26장과 민수기 13-14장을 비교하면 의외로 치밀한 오경의 통일성이 확인된다. 이방 땅에서 이스라엘의 어머니인 사라와 리브가를 이방 주권자에게 빼앗기는 경험을 묘사하는 창세기의 족장사는 지금까지 오해된 부분이 많았다. 가령 주인공들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의 윤리 문제가 주요 관건으로 다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민수기 13-14장을 자세히 살피면, 정탐꾼의 실패에 대해 말하기 위해 과거 족장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동원하고 있음이 핵심이다. 본래 오경 저자가 과거사인 창세기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는 민수기의 현재였다. 위 도표를 염두에 두고 다시 검토해보자.

창세기의 12, 20, 26장의 세 에피소드는 근소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패턴을 지닌다. 기근으로 하나님의 종이 이방 땅으로 내몰리고 거기서 설상가상으로 아내까지 빼앗긴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방 왕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종은 믿음으로 승리를 얻어 명예를 회복한다. 이것이 하나의 공식이다. 이 공식은 다시 민수기에서 재현된다. 그러나 민수기에서 모세와 이스라엘은 (그 연약했던 족장들의 승리와는 달리) 일생일대의 큰 위기와 실패를 경험한다.

애굽의 압제에서 탈출해 하나님을 섬기고자 길을 떠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옛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을 위협했던 이방인들을 다시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때 족장들의 시절과는 상황이 딴판으로 흘러간다. 그 옛날 족장들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승리를 얻은 데 반해, 모세 휘하의 리더들은 불평과 원망으로 후퇴를 결의함으로써 완패를 자초했다. 족장들을 위협했던 이방 세력이 하나님의 재앙으로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의 종을 놓아준 것과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위협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이방 세력이 단숨에 모세의 백성을 도륙하고 물리치는 쾌거를 거두었다. 동일한 패턴의 다른 결과. 이것이 맥락상 민수기의 가나안 입성기에 창세기 족장사가 소급되어야만 했던 근본적인 이유였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근거는 종들의 믿음이었고, 결과는 어떠한 위험 속에서든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함께하심도 없고 가나안 입성도 없다는 깨달음. 이것이 모세가 광야 40년의 뼈아픈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 족장사를 소급해 역사신학을 바로 세운 이유였다.

모세의 수사학, 네피림
모세가 파견한 12명의 리더 중 10명이 가나안 땅에서 네피림의 후손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스스로가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민 13:33, 이하 새번역) 모세는 훗날 오경의 기록을 통해 정탐꾼들의 보고가 얼마나 헛된 정보였는지를 홍수 사건을 기록하면서 꾸짖는다. (사건의 연대기적 발생순서와 기록적 맥락의 순서를 혼동하지 말기를!)

네피림은 홍수 이전에 있었던 존재다. “그 무렵에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와서 자식들을 낳으니,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다.”(창 6:4). 그러나 홍수로 모든 네피림은 지면의 생물들과 함께 사멸되었다. “내가 이제 땅 위에 홍수를 일으켜서, 하늘 아래에서 살아 숨 쉬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을 쓸어 없앨 터이니, 땅에 있는 것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창 6:17)

네피림은 오경의 역사신학적 관점으로는 이미 존재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을 보았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1차 가나안’(2차는 계시록의 하늘) 입성을 실패로 이끌고 이스라엘 전체를 다시 40년 동안 광야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는 허구적 보고가 정신의 전염병이 되어, 실존을 와해시킨 사건이었다. 모세가 진저리치며 홍수의 기억(역사)을 더듬고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더는 비실재(위협, 공포)가 실재(하나님, 그의 약속)를 파괴하는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라는 경고다.

이 예전의 홍수가 네피림을 지상에서 쓸어버리듯이, 계시록은 그리스도가 자기 보좌에 앉아 천사를 보내 치른 하늘의 전쟁(계 9:5-8)을 통해 미혹하는 자의 두려움을 제거하셨음을 일러준다. “그래서 그 큰 용, 곧 그 옛 뱀은 땅으로 내쫓겼습니다. 그 큰 용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데, 온 세계를 미혹하던 자입니다. 그 용의 부하들도 그와 함께 땅으로 내쫓겼습니다.”(계 12:9)

모세의 광야 시절, 계시록의 이 신학이 바르게 정착되었더라면 가나안 입성은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신학을 가졌는가가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우리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이기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의 함께하심의 은혜 안에서만 이길 수 있다. 이것이 계시록이 말하고자 한 ‘이기는 길’ 아니었을까?

모세의 수사학,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
창세기를 읽은 독자가 출애굽기를 건너뛰고 민수기를 읽을 리는 만무하다. 더욱이 요즘처럼 책이 묶여있다면 족장사를 가나안 정탐 사건과 연결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 둘을 연결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있다. 그랄(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만난 곳)을 설명하며 덧붙인 ‘가데스(모세의 정탐꾼들이 후퇴를 결정한 곳)와 술 사이’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두 사건의 친연성(親緣性)을 반드시 비교하라며 모세가 붙여 놓은 포스트잇이다.

(1) 아브라함은 마므레에서 네겝 지역으로 옮겨 가서, 가데스와 술 사이에서 살았다. 아브라함은 그랄에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창 20:1, 이하 표준새번역)
(2) 그들은 곧바로 바란 광야 가데스에 있는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로 갔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에게 보고하면서, 그 땅에서 가져 온 과일을 보여 주었다.(민 13:26)

아브라함이 사라를 빼앗겼다가 도로 얻은 ‘그랄’과 모세가 정탐꾼의 허위 보고를 받아 공포에 휩싸인 성인 남자 대부분을 잃은 곳 ‘가데스’는 지척 거리에 있었던 거의 동일 지역임을, 모세는 말하고자 했다.

강함이란 무엇인가?
모세의 정탐꾼들은 자기들보다 적들이 더 강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그와 함께 올라갔다 온 사람들은 ‘우리는 도저히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 백성은 우리보다 더 강합니다’하고 말하였다.”(민 13:31) 그러나 그보다 나약했던 이삭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대적 아비멜렉 왕으로부터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말하였다. ‘우리에게서 떠나가거라. 이제 너는 우리보다 훨씬 강하다.’ ”(창 26:16)

오백 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이삭의 후손과 아비멜렉의 후손의 상황이 그사이 크게 역전된 것일까? 소위 남자만 60만 명이 진을 쳤다고 하는 모세의 무리와 한 씨족에 지나지 않았던 이삭의 세력을 비교하면, 만 배나 더 많아진 수적 증가이다. 그럼에도 이 힘의 역전은, ‘강함’의 비교 기준은 어디서 기인한 역설일까? 믿음의 차이다. 임마누엘의 차이이지, 결코 힘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싸움은 실로 강대강의 싸움이다. 계시록도 그것을 인정한다. “그들은 그 여자가 당하는 고문이 두려워서, 멀리 서서 ‘화를 입었다. 화를 입었다. 큰 도시야! 이 강한 도시 바빌론아! 너에게 심판이 한 순간에 닥쳤구나’ 하고 말할 것입니다.”(계 18:10) 하지만 그 강한 바빌론을 심판하시는 더욱 강한 힘은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여자에게 재난 곧 사망과 슬픔과 굶주림이 하루 사이에 닥칠 것이요, 그 여자는 불에 타 버릴 것이다. 그 여자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한 분이시기 때문이다.”(계 18:8)

백성의 실패가 비단 정탐꾼들에게만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사실 ‘상대의 강약을 알아오라’는 주문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 위에 사사로이 얹어 놓은 것이었다. “그 땅이 어떠한지 탐지하여라. 그 땅에 사는 백성이 강한지 약한지, 적은지 많은지를 살펴보아라.”(민 13:18)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악의 강함 여부를 가늠하지 말고 싸워야 하는 전사이길 바라신다. 한편으로 기가 막힌다. 우리는 연약함을 핑계로 응석 부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조건 싸워야 하고 승리는 우리가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이다. 세상은 인정치 않지만, 심판주인 하나님께 모든 최종 권세가 있기 때문이다.(계 18:8) 그 최종 권세를 요한의 눈에 보여준 것이 바로 계시록 4장이다.

   
▲ 뒤러의 요한계시록 판화 중 4장 내용 부분,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보인다.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인자
공관복음에서 인자를 소개할 때 처음 부각되는 것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으로서의 인자다. 계시록 4장에서 아직 인자는 찾아볼 수가 없다. 5장에서야 어린 양의 모습으로 인자가 나온다. 4장의 환상이 보이는 동안에 인자는 어디에 있는 걸까? 다니엘 7장의 인자의 등장 순서(단 7:9-14)에 의하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심판이 시작되고, 책들이 펴질 때 인자가 등장한다.

4장에서는 하늘의 보좌가 보이나 아직 두루마리가 보이지 않으니 인자의 등장은 잠시 (5장으로) 미뤄진 듯하다. 계시록에서 인자는 죄를 사하는 권세자의 의미보다 불의한 세상 권세를 심판하는 심판자로서 등장한다. 그것이 지상 인자(공관복음)와 천상 인자(계시록)의 차이다. 이렇게 인자는 하늘과 땅의 유일한 인자가 된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 요한복음의 인자
요한복음은 처음으로 야곱이 꿈에 본 사다리(창 28:12)를 인자(요 1:51)와 동일시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개역개정) 이것은 인자가 역사를 만들어가는 위대한 인물이기 이전에 천상적 존재임을 아울러 천명하는 것이다. 또한 요한이 예수가 하늘 사다리임을 증명하는 근거로 요한이 복음서 말미에 제출한 것은 예수의 시신이 있던 자리였다.(요 20:12)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머리맡에 있었고, 또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하늘에 닿아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했던 야곱의 사다리는 온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이었건만, 유대인들은 스스로 그 소망을 잘라버렸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터뜨린 그들의 자축하는 웃음소리는 ‘불가역적’ 비극의 전주곡이었다. 인자(사다리)를 죽이고 그를 따르는 교회를 핍박한 세상 권세가 심판대에 오르는 것은 자명한 결과다. 잘려진 사다리인 인자의 정체가 하늘 주님으로부터 심판의 두루마리를 넘겨받는 분이라는 것. 그것이 계시록 4-5장이 말하려는 전언의 본질이다.

열두 별자리와 24인 장로
계시록 4장은 우주를 요약해서 그리고 있다. 우주 즉 천체를 그린다는 것은 시간을 그린다는 것이다. 땅에서의 시간은 천체의 광명들이 기준이기 때문이다. 4장에서 ‘스물네 장로’라고 할 때 ‘장로’라고 번역된 ‘프로스부테로이’(πρεσβύτερος)는 창세기 50:7의 문맥과 가장 유사하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에서 언급된다. 왕 앞에 선 프로스부테로스는 장로라 번역할 것이 아니라, 선임 신하 즉 ‘원로’라 부르는 것이 맥락상 적확하다.

이런 관점에서 신(God)을 자청했던 로마 황제 도미티안(Domitian, 51-96)이 12인이던 호위 신하(Lictor)를 24명으로 변경한 역사적 사실을 계시록 4장의 24인 장로와 연결 지어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도미티안이 자신의 좌우로 시립한 신하를 두 배로 늘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는 전대 황제들이 가졌던 ‘생전엔 신의 아들, 사후엔 신’이라는 최소한의 도리를 넘어서고 싶었다. 살아생전 이미 신이 되었다는 의미로 저승의 신하 열둘을 미리 거느리는 퍼포먼스. 이를 통해 산 자와 죽은 자의 신으로서의 최고 위상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신약학자 브루스 말리나는 태양이 저무는 순간 그 태양은 저 세상에서 또 하나의 천상 세계의 주인으로 거듭나고, 그곳에서도 열두 별자리의 주인이 된다는 바벨론의 천상 세계 이론을 제시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한 태양이 24개 별의 주인이라는 표현은 삶과 죽음의 세계 전체를 일괄 통치한다는 뜻이다.

요한이 유대교 전통에서는 근거가 희박한 천상의 ‘스물네 장로’를 굳이 언급한 것(이와 반대로 ‘네 생물’은 에스겔 1장에 전례가 있다)은 자신만의 수사학으로 도미티안의 교만을 꺾고 이승과 저승의 절대 주(Lord)로서의 하나님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예수가 이미 1:18에서 천명한 그대로이다. “나는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이로써 로마의 검과 예언자의 붓이 천둥소리를 내며 맞부딪힌다. 어느 이단 종교나 사교 집단이 이 ‘24 장로’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들 조직의 ‘중추적 인물 24인’이라 그럴듯하게 가져다 붙이고 의기양양해 한다면 그 또한 무지와 무식이다. 예언자의 붓과 스스로 척을 지는 행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별과 운명
이집트에서 인간이 별을 관찰한 이유는 풍요를 약속하는 홍수를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별의 움직임은 곧 운명으로 해석되었다. 이제 요한은 인간이 운명을 점치려던 별들이 그 면류관(이것에 관하여는 계시록 14장 주해에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광경을 목도한다. 운명은 이제 별에게 물을 게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야 할 일이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좌가 그 별들 가운데 좌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요한은 또 다른 곳,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에 보좌가 있다고 알려준다. “다시 저주를 받을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그 도시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도시 안에 있고,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예배하며.”(계 22:3) 하늘과 땅의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인자의 통치가 실현되는 곳은 어디나 하나님 보좌 앞이다. 산 자와 죽은 자도 주 앞에서 차등이 없다. 죽은 자의 기도가 하나님 귀에 들리는 것이다. “그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뗄 때, 나는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또 그들이 말한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계 6:9)

고대는 정치, 종교, 문학, 의술, 그리고 농경 치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의 기초가 천문학이었다. 하나님의 보좌가 그 중앙에 있어야 했던 이유다. 헬라어로 구약이 번역된 공장이었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역시 천문학이 꽃을 피웠었다. 요한이 천문학을 통해 신학을 설명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였다. 필자는 로마 황실의 천문학자 율리우스 피르미쿠스 마테르누스가 계시록을 읽고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당시에 논리와 합을 이루지 못하던 로마의 천문-신화의 결함을 요한이 제시한 예수 천문도로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추정한다. 고로 필자는 수많은 ‘24 장로’의 해석 가운데 브루스 말리나의 제안을 가장 통찰력 있는 해석이라 본다. (독일의 도서관에서 맘껏 읽었던 천문 신학 자료들을 이제는 구하기 어려운 것이 쓰라리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광명들을 보기보다 우리 스스로의 기술로 만들어낸 빛을 보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하지만 저 현란한 네온사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가 있을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고 심지어 있는 것도 없다, 한 일도 안 했다, 아는 것도 모른다, 또 실제로 그렇게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내기까지 하는 이 시대.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하기는 한 걸까? 예수님과 같이 목수 일로 자립의 생계를 꾸리며 목회를 하는 내 친구 박성장 목사(인천 길벗교회)는 “오늘날은 공간을 얻기 위해 시간을 팔아 사는 시대”라고 말했다. 그에게도 더 늦기 전에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몸을 일으키셨던 그리스도의 시간이 도래하기를. 아울러 요한계시록 4장을 묵상하며 지난 10년간 나라 전체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시간을 도둑질한 국가의 도둑들에게서 빼앗긴 하나님의 시간이 온전히 되돌아오길 소망한다.

 

정재훈
대한신학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 독일 뷔르츠부르크와 튀빙겐 대학교를 거쳐 부퍼탈 신학교를 졸업(Mag.Th)했다. 1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한신대 신대원을 졸업(M.Div)하고 현재 용인 덕성교회에서 청년학생부를 지도하고 있다. 토요일 밤마다 대치교회 성서학당을 통해 요한문서들을 강해하고 탁상담화를 진행한다. 전공 논문은 〈요한계시록 인자 기독론〉이며, 현재는 ‘요한계시록’ ‘지혜’ ‘기독론’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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