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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을 편드는 가난한 교회를 위하여
[317호 연중기획: 종교개혁 500주년,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화 04]
[317호] 2017년 03월 28일 (화) 13:44:31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 소장, 가톨릭 신학자 goscon@goscon.co.kr

“함께 통곡하자, 돈에 찌든 한국교회를 위하여.”

지난 3월호에 이 지면에 실린 박득훈 목사님의 글 제목이다. “오늘 한국교회 대다수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돈에 찌들어 있다. … 돈에 찌든 교회는 기복신앙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임당함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상처 자국을 피해갈 수밖에 없다. … 예수님은 사탄의 세 가지 본색으로 탐욕, 폭력성, 그리고 거짓을 든다. … 돈에 찌들어 사탄으로 전락한 한국교회를 위해 함께 통곡하고  분노하자. 그것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나는 박 목사님의 글에서 “삶 전체가 회개여야 한다”는 고백이 담긴 루터의 95개 논제를 보는 듯한 감동을 받았다. 한국 개신교회뿐 아니라 가톨릭도 통곡해야 마땅하다.

지난 글(2017년 2월호)에서는 종교개혁 정신이 오늘 한국교회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다루었다. 이번 호는 ‘종교개혁과 21세기 한국교회 개혁’에 대해 개신교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가톨릭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조심스럽게 세 가지 중요한 제안을 나누려 한다. (개신교에 대한 애정과 조언의 타당성은 각기 별개의 문제임을 물론 모르지 않는다.)

 1. 성도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선택하라
 2.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라
 3. 설교 제대로 하라

그리스도교 역사는 가난한 이들을 망각한 역사
교회개혁도 결국 예수 이야기에서 시작해야 옳지 않을까.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실천하고 가르쳤다. 예수를 보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를 보아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보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를 보는 것이다. 예수를 보면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떠올려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보면 동시에 예수를 떠올려야 한다. 둘 중 하나만 놓쳐도 사실 다 놓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외면한 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 얼굴만 주로 보고 있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는 동전의 앞뒤처럼 둘이 아니고 하나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무엇에 비유하는지 성서신학이 주목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예수가 왜 하나님 나라 비유를 복음서 여기저기서 자주 반복하는지 이유를 잘 알아야 한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의 놀라운 말씀과 기적과 행동을 자주 보았지만,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잘 깨닫지 못했다.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도 별 다르지 않다. 평생 교회나 성당을 다녀도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 예수 이야기는 자주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 목회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하나님 나라를 망각한 역사’라고 독일 개신교 성서학자 마틴 켈러가 한탄한 바 있다. 나는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망각한 역사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성장하고 있다. 일터와 가정에서, 여인의 세계와 남자의 세계에서, 모든 일상 영역에서 아주 작은 곳에서도 두루 목격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하나님 나라를 반대하는 악의 세력이 멈추게 방해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자주 들어왔고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반대하는 악의 세력이 분명히 존재하고 또 맹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주 잊어버린다. 하나님 나라를 반대하는 악의 세력과 용기 있게 싸워야 한다는 사실은 더 자주 망각하고 외면한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만 하고 하나님 나라를 반대하는 악의 세력과 싸우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를 반대하는 악의 세력과 논쟁하고 저항하고 싸우다 악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예수는 병이나 사고로 죽지 않았다. 정치범으로 처형되었다. 예수가 정치범으로 처형된 사실을 망각한다면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는 어렵다. 그 사실을 망각한다면 예수를 제대로 따르기는 어렵다.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교를 잊는다 해도 가난한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 역사 전체는 가난한 이들의 존재를 특징으로 합니다. …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고통 속에서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197쪽

교황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싶다. 첫째,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부자를 선택하지 않으셨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 자리다.(locus Dei) 하나님을 만나려면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면 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신학의 자리다.(locus theologicus) 신학을 하려면 가난한 사람들을 알면 된다. 둘째, 가난한 사람들은 신앙의 스승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신앙 감각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줄까 고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줄 것이 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신앙을 배워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잃으면 하나님을 잃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잊으면 복음을 잊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다시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들어보자. 다음은 2014년 8월 14일 한국을 방문한 교황이 한국 주교들 앞에서 한 연설 일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라는 사도 시대의 이상은 여러분 나라의 첫 신앙 공동체에서 그 생생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말에 이어 교황은 곧바로 한국 주교들을 사정없이 혼내기 시작했다.

“저는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의 핵심에 있다고 늘 말해왔습니다. 또한 복음의 시작과 끝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 번영의 시대에 떠오르는 한 가지 위험에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저 ‘사교 모음’에 그치고 마는 위험입니다. … 그런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부유한 이들을 위한 교회 또는 돈 많고 잘 나가는 이들을 위한 중산층 교회입니다. … 악마로 하여금 여러분이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잘 나가는 이들을 위한 교회가 되게 만들도록 허용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덕담을 나누기에도 짧은 만남의 시간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주교단 앞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 그것은 지금 한국 천주교회가 사교 모임이 될 위험에,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와 잘 나가는 이들을 위한 중산층 교회라는 위험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이다. 교황은 야고보 사도가 그랬듯,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를 꾸짖은 것이다.(약 2:1-7) 교황의 당부가 혹시 한국 개신교에게도 해당되는 말은 아닐까.

제안1. 성도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선택하라
개신교는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보다 교회 밖에 있는 가난한 사람을 먼저 챙겨야 한다. 개신교는 성도를 마땅히 존중해야 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가장 먼저 배려해야 한다. 목사는 성도나 이웃 종교인을 만나기 전에 가난한 사람을 먼저 만나야 한다. 예수는 그렇게 가르치고 행동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우리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일이다. 그들에게 형제자매가 됨으로써 그들이 겪는 위험을 우리 스스로 함께 지는 심각한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일상에서 불편함을 참아내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는 일도 포함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목숨을 거는 일이요, 말 그대로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그 사랑을 다짐한 사람에게 위험을 줄 수 있고, 박해와 죽임까지도 겪게 할 수 있다. 그 길을 예수가 걸었다. 로메로 대주교와 백남기 농민도 그 길을 뒤따랐다.

성직자를 교회와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진 시대가 가톨릭 중세에 있었다. 지금은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라고 보기도 한다. 로메로 대주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교회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서구신학에서 예수와 열두 제자, 성직자는 언제나 연구되고 언급되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잊혔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선의 대상이요 수혜자 정도로 여겨질 뿐, 교회의 핵심이나 신학의 주제로 생각된 적은 없었다. 전통신학은 예수에게서 ‘인간 일반’을 주로 보았다면, 해방신학은 예수에게서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냈다.

가난은 경제학의 주제가 아니라 신학이 다룰 주제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확하게 말했다.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딱 들어맞는 표현인 듯하다다. 다만 하나를 덧붙인다면, 가난이 신학의 주제일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도 신학의 주제라는 말이다. 신학은 가난이라는 ‘개념’을 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다루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이라는 ‘개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가난’의 복음적 가치를 죽어라 강조하는 설교자들과 신학자들이 도리어 가난한 사람들을 언급하지 않고 슬쩍 지나쳐 버리는 속셈을 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나는 요즘에야 비로소 예수가 왜 지식인이나 종교인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을 제자로 선택했는지 알 것 같다. 부유층이 많이 사는 도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시골을 활동 근거지로 선택했는지 이해할 것 같다.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예수도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했던 게 아닐까.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28살 청년 체 게바라의 심정을 예수는 충분히 동감하고 이해하지 않았을까.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 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싸울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십자가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예수는 그들의 역사적 운명인 십자가에 선뜻 매달린 것 같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도록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싸우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하지 아니한가?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님은 공동 운명 아닌가. 개신교 역시 가난한 사람들과 공동 운명 아닌가. 가난한 사람들이 죽으면 개신교도 죽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면 개신교도 산다. 개신교는 죽는다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은 살아야 한다. ‘살아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이레네우스는 말했다.(Gloria Dei vivens homo.) 그러나 로메로 대주교의 말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 아닌가?(Gloria Dei vivens pauper). 가난한 사람들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 pauper를 나는 대문자 Pauper로 쓰고 싶다. 하나님(Dei), 가난한 사람들(Pauper)이 같은 치원에서 함께 어울리게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지 않을까.

내 스승인 해방신학자 혼 소브리노(Jon Sobrino)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느냐 선택하지 않느냐에서 가톨릭교회가 넘어지느냐 일어서느냐 결판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느냐 선택하지 않느냐에서 한국 개신교가 넘어지느냐 일어서느냐 결판날 것이다. 그게 가장 중요한 주제일 것이다. 다른 주제는 다음다음 문제다.

제안2.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라
최저 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처우를 견디고 있는 목회자들이 많고, 미자립 교회가 전체 교회의 80%에 달하는 한국 개신교 현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국의 어느 시골 교회 목사라도 당연히 누리는 수준의 안락한 대접을 예수, 바울, 베드로가 하루라도 받아보았는가. 

돈이 없어서 망한 종교는 인류 역사에 없었다. 부유해졌을 때 종교는 어김없이 부패했다. 지금 한국 개신교에는 돈이 넘쳐난다. 한국교회는 돈이 없어서 걱정이 아니라 돈이 많아서 걱정이다. 가난해서 문제가 아니라 부자여서 문제다. 개신교에 돈이 좀 모자라야 한다. ‘헌금 줄이기’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시점이다. “악마는 지갑 속으로 들어온다”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했다.

목사들은 좀 굶어야 한다. 그래야 정신 차리지 않을까. 목사들에게 돈을 맡기면 안 된다. 깨끗한 목사들이 왜 더러운 돈을 가까이 하려 하는가. 목사들이 돈을 만지면 부패하기 쉽고, 배가 부르면 기도와 성경공부에 게으르기 쉽다. 부유한 교회에 가난한 목사는 있을 수 없다. 가톨릭 역사에서 부유한 수도원이 문 닫는 경우는 있어도, 가난한 수도원이 그런 경우는 없었다. 안락하고 부유하게 사는 목사들은 크게 반성하고 참회해야 한다. 그것은 주의 종이 걷는 길이 아니라 주의 배신자들이 걷는 길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집회에 적지 않은 개신교 성도들과 목사들이 참여해왔다. 왜 그럴까. 참 안타깝고 불쾌한 일이다. 그 장면을 보며 목사의 사회적 종교적 지위가 그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사회 갈등 현장에서 그들이 누구 편을 드는지 살펴보았다. 한국교회 목사들은 부유한 사람들 편에 서는가,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는가. 이 주제는 개신교에서 별로 논의되지 않는 것 같다. 해방신학에서는 그 주제가 진지하게 논의되어 왔다.

혼 소브리노 신부는 이런 말을 자주 고백했다. 우리 시대 가톨릭의 큰 문제 중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은 신부가 될 수 없고, 신부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는 것이다. 빈민층 출신 중에 신부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신부가 되기 위해 기나긴 교육과정에 드는 돈을 감당할 여력이 있는 사람이 빈민층 출신 중에 별로 없다는 얘기다. 또한 교회와 신자들의 도움으로 성장한 빈민층 출신 신부는 더 이상 가난한 사람으로 살지 않는다.

가톨릭에서 신부가 된 뒤 돈과 명예와 지위를 얻어 더 이상 가난한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런 신부가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설 가능성은 크게 줄어든다. 개인적으로 검소하게 산다 하더라도, 그가 부자와 권력자 편에 설 가능성이 더 커진다. 신부가 된 뒤에 가난한 사람을 돌보며 살기보다 종교 지배층의 일원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 생각, 생활방식, 존재방식 등에서 그렇다.

부유층 출신 신부가 해방신학자가 될 확률? 높지 않다. 가난한 계층 출신이 해방신학자가 될 가능성? 역시 높지 않다. 신부가 되고 나면, 그는 부자와 권력자를 편들기 쉽다. 이미 교회 안에서 지배층에 속하기 때문이다. 본인의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는 종교인이 될 확률은 크지 않다.

부자와 권력자를 멀리 하라
한국교회 목사들과 신학자들에게 간곡히 당부하고 싶다. 부자와 권력자를 멀리 하라고. 부자와 권력자 편에 서는 목회자는 부패한 세상에 저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부자와 권력자를 편드는 교회는 부패한 세상에 저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에 특히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부자와 권력자를 가까이 한다면, 한국 개신교에 미래는 없다.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하루 혹은 일 년 동안 어떤 계층 사람들을 주로 만나고 대화하고 식사하는가. 교회 성도, 고학력 전문직, 중산층 사람들과 주로 교제하는가. 아니면 버스와 전철의 일반 시민, 시장 사람들, 청년들, 실업자들과도 자주 만나고 있는가.

사람들이 주목하는 건 종교인들이 예수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 믿음의 내용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하느냐가 아니다. 그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부자와 권력자와는 어떻게 어울려 지내는지를 더 주목해서 지켜본다. 수준 높은 학술 문헌을 쏟아내고 모범적 인물을 줄기차게 인용하는 방식으로 개신교의 구조적 문제를 감추거나 풀 수는 없다. 교회와 목회자의 부패를 없애지 않고서 예수의 매력을 죽어라 강조하는 방법은 정직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

작은 교회 : 가난한 교회, 저항하는 교회
최근 한국 개신교에서 작은 교회 운동이 퍼져나가고 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작은 교회가 무엇인지 알려면 작은 교회가 반대하는 대형교회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대형교회에는 적어도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대형교회는 가난한 교회가 아니다. 둘째, 대형교회는 저항하는 교회가 아니다.

그러기에 작은 교회는 가난한 교회, 저항하는 교회여야 하겠다. 작지만 부자 교회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작은 교회가 아니다. 작지만 저항하지 않는 교회가 될 수도 있다. 그 또한 작은 교회가 아니다. 가난한 교회지만 저항하지 않는 교회도 작은 교회가 아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부자 교회가 되려는 유혹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다는 멋진 명분 아래 사실상 부자 교회로 성장할 위험이 있다. 가난한 이들을 돕자,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다, 부자 성도여 헌금하라… 결국 돈을 모으기 위해 부자들과 자주 어울리고 그들이 내는 헌금의 출처나 형성 과정은 묻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난다. 이런 악순환의 악령이 그리스도교 주위를 끝없이 배회하고 있다.

우상이나 악마는 자기 변신에 능하다. 악마도 성서를 인용할 줄 안다. 그리스도교 안에 서식하는 악마는 매일 성서를 끼고 산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부자 교회’는 진보적 목회자들이 숭배하는 마음속 우상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작은 교회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최종 도착지일도 모르겠다. 그러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부자 교회’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작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상이나 악마는 추하고 잔인하기보다 달콤하고 매력적이다. 우상을 학문과 자연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옛 시대나 미개한 나라 이야기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 않다. 우상은 오늘 우리 시대와 문명 사회에서도 날뛰고 있다. 돈과 권력이 매력적인 우상으로 숭배된다. 돈이 전부라는 생각이 심지어 종교에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노골적으로 돈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와 성직자라고 예외는 아니다. 삼위일체의 삼위는 성부, 성자, 성령이 아니라 돈, 미국, 하나님이라는 우스개도 생겼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아니라 예수천국 교회지옥이라는 말까지 나온 실정이다.

제안3. 설교 제대로 하라
개신교는 말씀과 설교를 중시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까닭일까? 일반적으로 목사는 스님이나 신부보다 말을 잘하는 편이다. 어릴 때부터 목사의 유창한 설교는 내게 놀라움 그 자체였다.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 할까. 어떻게 저렇게 성경을 잘 알까. 어떻게 그 많은 성경 구절을 저렇게 줄줄 잘 외울까. 그 동경은 슬프게도 대학 시절에 사라졌다.

1980년대부터 한신대에서 번역 출간한 국제성서주석 시리즈 서문에서 안병무 선생은 이런 지적을 했다. “특히 제목 설교의 풍조 아래서 성서를 앞세운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성서를 가장 등한시하는 경향이 지배하는 한국 강단의 잘못이다.” 예배나 텔레비전에서 가끔 목사들의 설교를 들을 때 거의 어김없이 떠올리는 말씀이다. 목사들 설교 정말 잘 한다는 어릴 적 감탄은 이제 ‘목사들 설교 정말 엉망이다’로 크게 바뀌고 말았다.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나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한 일부 목사들 설교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내가 들은 목사들의 설교는 대부분 엉터리 수준이었다. 마이크를 빼앗고 싶은 적이 솔직히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설교를 잘하지 못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설교를 엉망으로 하니까 불쾌했다. 무엇보다 대부분 설교자의 성서 지식이 크게 부족하고, 말의 논리가 잘 안 맞고 논리적 근거가 빈약했다. 목사나 신부들 설교를 모델 삼아 대학입시에서 논술 시험을 치르면, 높은 점수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늘 예배에서 가장 문제되는 부분이 설교라고 나는 생각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설교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신자들이 강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평신도는 강론을 듣는 것이 어렵고, 목자는 강론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는 것이 유감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135쪽.

“연구와 기도와 묵상에 오랜 시간을 바쳐야 합니다.” - 앞의 책, 154쪽. 

사제가 더 거룩하냐 덜 거룩하냐 하는 문제는 말씀을 선포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현대의 사제 양성》, 26쪽.

“강론자는 말씀의 관상자이고 또한 그의 백성의 관상자입니다. … 성경 본문의 메시지를 인간 상황에, 하느님 말씀의 빛을 갈구하는 경험에 연결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154쪽. 

 “사람들의 말에 많이 귀 기울이고, 그들의 삶을 나누고, 그들에게 사랑의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 앞의 책, 158쪽. 

“강론자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 말씀을 들을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의 사람에 와 닿지 못하게 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반성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에게 권고가 되지 않는다면, 그 말씀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거짓 예언자, 사기꾼, 협잡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 앞의 책, 151쪽.

‘거짓예언자, 사기꾼, 협잡꾼’ 같은 거친 단어를 교황 문헌에서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교황이 사제를 겨냥하여 그런 단어를 쓰는 사례는, 내가 아는 한, 처음이다. 그만큼 강론이 소중하다는 사실이다. 목사와 신부들은 거짓 예언자, 사기꾼, 협잡꾼 소리를 교황이나 신자들에게 듣지 않도록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개신교와 가톨릭은 공동 운명
4복음서를 해방신학 관점으로 읽는 작업을, 마가복음 해설서인 《슬픈 예수》(21세기북스)와 마태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메디치미디어)에 이어 계속 하고 있다. 이번 원고 주제와 관련하여 올해 출판될 누가복음 해설서 《가난한 예수》(가제)의 누가복음 13:1-9 부분을 잠시 살펴보자.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예수가 역사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고향 나자렛에서 겨우 십리 떨어진 세포리스에서 자신이 태어나기 몇 년 전에 로마군대에 의한 유대인 대량 학살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부모 형제나 동네 사람들에게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제주 어린이들이 4·3 사건을 들으면서 학창 시절을 보내는 것과 비슷하겠다. 목회자들은 예수처럼 역사나 시국 사건을 잘 알고 있는가.

예수는 백성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본문에서 시국 사건을 예로 들어 설교하고 있다. 로메로 대주교도 그렇게 설교했다. 라디오로 전국에 중계된 일요일 미사 강론에서 로메로 대주교는 시국사건을 국민들에게 낱낱이 알렸다. 영화 <로메로>에서 로메로 대주교는 성체를 높이 들어올리는 장면에서 총에 맞았다. 그러나 사실은 설교 도중에 총에 맞아 쓰러졌다. 로메로 대주교는 목숨 걸고 설교했고 설교하다가 목숨을 바쳤다. 그런 설교는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사람을 감동시킨다. 설교는 로메로 대주교처럼 목숨 걸고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목사나 신부 중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위 누가복음 본문의 비유에서 6절 이하가 내게는 조금 이상하다. 포도밭과 무화과나무 비유라면 중심은 무화과나무가 아니라 포도 아닌가.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땅의 영양을 다투고 빼앗는 경쟁 관계 아닌가. 그런데 왜 포도원지기는 그렇게 무화과나무에 정성과 애정을 쏟았을까? 혹시 이 비유를 종교간 대화에 아름답게 적용할 수는 없을까.

주인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모두에 관심이 있다. 포도원지기도 마찬가지다. 포도나무를 그리스도교라 여기고 무화과나무를 유대교로 여기면 어떨까. 무화과나무를 이웃 종교로 여기면 어떨까. 이웃 종교가 잘 자라도록 그리스도교가 애정을 가지는 것이다. 이웃 종교가 잘 되도록 그리스도교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면 어떨까. 무화과나무가 잘 자라면 포도나무도 잘 자라게 된다. 종교간 아름다운 선의의 경쟁이 기대된다.

개신교는 가톨릭을 제대로 잘 알아가면 좋겠다. 가톨릭은 개신교를 제대로 잘 알아가면 좋겠다. 개신교와 가톨릭은 하나님 찾아 걷는 지상 순례길에서 만난 고마운 길벗이요 아름다운 동행이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를 나누며, 함께 손 맞잡고 걸어가자. 넘어져도 서로 일으켜주고 같이 나란히 걷자. 우리는 공동 운명이다.  

기쁜 소식이 하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독일 개신교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개최하는 속죄와 화합의 기념식에 참석할 것 같다. 독일교회는 교황에게 정식 초대장을 보냈고, 교황은 기념식에 참석할 뜻을 비췄다고 한다. 독일 개신교가 교황을 초대한 것은 종교개혁이 시작된 이후 처음이다.

올해 2월 8일 교황을 방문한 독일 개신교 대표단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은“우리는 동일한 세례를 가지고 있다. 서로에게 싫증나는 일 없이 함께 가야 한다. 일치로 향해 가는 길에서 후퇴는 없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반드시 함께 복음을 증거하고, 온전한 일치를 향해 계속 전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독일 개신교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식에 함께하는 것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관계성 중심에 다시 한 번 그리스도를 두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시다.

독일 방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마르틴 루터에 대한 파문을 공식 철회하는 선언을 하기를 나는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한스 큉, 레오나르도 보프 등 유수한 가톨릭 신학자들이 계속 그렇게 주장해왔다. 그에 동의한다. 당시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벌어졌던 종교 전쟁으로 생긴 희생자와 아픔의 역사에 대해서도 교황이 사과하길 바란다. 가톨릭교회가 마르틴 루터를 성인으로 시성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개신교와 가톨릭이 함께 마르틴 루터를 신앙의 모범이자 스승으로 모시면 좋겠다.


김근수
가톨릭 성도신학자.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광주가톨릭대학에 입학, 2학년 때 독일 마인즈 대학에 유학하여 신약성서를 전공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는 예수’를 주로 공부하다가 ‘예수를 보는 가난한 사람들’을 연구하기 위해 남미 엘살바도르 UCA 대학에 유학했다. 해방신학의 대가 혼 소브리노(Jon Sobrino)에게 해방신학과 기독론을 배웠다. 서양철학사, 4복음서, 해방신학에 관심이 있으며 종교 간 대화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제주시에서 가족과 살고 있다. 《슬픈 예수》 《행동하는 예수》 《교황과 나》를 썼고, 《해방자 예수》 《희망의 예언자 오스카 로메로》를 번역하였다. 공동 집필로 《교황과 98시간》 《쇼!개불릭》 《지금, 한국의 종교》가 있다. 〈가톨릭프레스〉  초대 편집인이었고 해방신학연구소를 만들어 소장으로 있다. 팟캐스트 “쇼!개불릭”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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