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호 성경으로 보는 세상만사] 시골 할아버지가 ‘젊은 파수꾼’들에게 4

오랜만에 다시 글을 띄운다. 모두들 잘 지냈기를 바란다.

다들 알다시피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한다는 심판을 선고했지. 그러자 내로라 하는 정치인들과 사회 지도자들이 한마디씩 한 것을 언론을 통해 들었으리라 믿는다. 이 할아버지도 들었다. 모두 한결같이 ‘통합’과 ‘화합’을 외쳤다. 간혹 ‘치유’를 말한 분들도 있었다. 그동안 국론이 탄핵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싸웠지만 이제 헌재의 심판이 내려졌으니 결정을 받아들이고 한마음이 되자, 그리고 갈등으로 입은 상처를 서로 치유하자는 말들이었다.

정치가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해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종교계 지도자들도 성명서를 통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이 할아버지는 생각이 달라서 편지를 쓰게 되었단다.

‘카포레스’와 속죄제사
함께 로마서 3장 25절을 읽어보자꾸나.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새번역)

이 구절은 3장 21-31절 단락에 속한 것으로, 지난 1,600여 년 동안 성경학자들과 교회가 그 번역과 해석을 놓고 씨름해온 구절이란다. 특히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다’는 구절이 그 씨름의 핵심이었지. 이 구절을 깊이 공부하지 않은 성직자들이 자기 나름으로 해석을 하고 가르쳐서, 신도들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놓치게 만들어 온 구절이기도 하단다.

앞서 정치가들이 헌재의 탄핵 심판 이후 통합과 화해를 말하는 건 이해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경우가 다르다고 했잖니? 특히 기독교 지도자들과 단체들의 경우, 이 구절에 담긴 하나님의 큰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 아닌가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단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 피를 믿으면 죄가 용서되고 죽어 천당 간다는 편협하고 좁은 구원론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싶구나. 물론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건 아니야. 그러나 단순히 그런 뜻을 넘어서는,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정의와 인내라는 큰 그림을 요약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언문이란다. 

그 문제의 구절을 직역하면 이렇단다.

“하나님은 예수를 힐라스테리온(hilasterion)으로 내주었다.”

힐라스테리온은 히브리어 ‘카포레스’(Kapporeth)를 번역한 그리스어란다. 그러니 히브리어 카포레스가 무엇인지를 알아봐야겠지? 카포레스는 고대 히브리어 단어로 ‘kipper’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란다. kipper는 ‘깨끗하게 한다’ 또는 ‘씻는다’는 뜻으로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씻어서 더러움을 없앤다는 뜻이다. 구약시대 성전의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있는데, 그 궤는 길이가 두 자 반, 너비가 한 자 반, 그리고 높이가 한 자 반이었단다. 그러니 그 덮개는 길이가 두 자 반이고 너비가 한 자 반이었겠지. 궤는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지만 덮개는 순금으로 만들었어. 그 궤 안에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율법과 계명을 새긴 돌판, 곧 증거판(출 24:12, 25:21)을 넣어두었단다.(출 25:10-22) 그래서 그 궤를 언약궤 또는 증거궤라고 부르게 되었지. 그리고 그 궤의 뚜껑(덮개)을 카포레스라고 했고. 우리 성경에서는 그 판을 속죄판으로 번역했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 모세를 만나시는 곳이 바로 그 궤(언약궤/증거궤)의 카포레스 위였단다.(출 25:22)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시려면 만나는 장소와 사람 모두 종교적으로 깨끗해야만 했지. 다시 말해 죄가 없어야 했던 거야.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죄가 없을 수 있겠니. 일부러 지은 죄는 없다고 해도, 죄인 줄 모르고 지은 죄도 있게 마련이지. 그래서 속죄판 위에 피를 뿌려 그 장소와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의식을 먼저 치렀지. 그 의식을 속제제사라고 한단다.   

여기서 속제제사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꾸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카포레스 위에서 모세/대제사장(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을 만났는지, 레위기 1-7장에는 여러 가지 제사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단다. 그 가운데 4-5장의 속죄제가 바로 카포레스와 관계가 있지.

하나님은 죄를 두 가지로 나누어 다루셨어. 고의로, 다시 말해 알고 짓는 죄와 실수로 또는 죄인 줄 모르고 짓는 죄를 구분하신 거지. 여기서 모르고 짓거나 실수로 지은 죄를 속하는 제사가 바로 속죄제사였단다.(레 4:4, 13, 22, 27, 5:1-5)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시려면 만나는 장소와 사람 모두 거룩해져야 했기에 속죄제물로 바쳐진 수송아지 피를 뿌렸지. 그렇게 해서 성전이 거룩한 곳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를 수 있는 곳, 즉 사람을 다시 만나 사귈 수 있는 곳이 되게 하셨단다.

그래야만 카포레스도, 죄를 지은 사람도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지. 피를 뿌린 이유는 피는 곧 생명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었단다.(창 9:4-5) 그래서 피를 뿌려서 종교적으로 깨끗하지 못한 것과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의식을 치렀단다.   

일부러 죄를 지었을 때는 물론, 모르고 지었어도 죄를 속죄받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란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서 사귀고 가르치고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죄를 지은 사람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는데, 그게 바로 성전 안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 안의 카포레스였어.

로마서 3장 25절의 ‘하나님께서 예수를 카포레스로 내어주셨다’는 말은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가 바로 그 카포레스고 거기에 뿌려진 피가 바로 예수의 피였다는 뜻이란다. 사도 바울이 쓴 이 구절은, 구약을 잘 알고 또 성전에서 드리는 속죄제사의 제도와 의미를 잘 알던 동시대의 초대교회 기독자들은 그 뜻을 정확하게 알아들었단다. 다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나서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의미가 희석되거나 잘못 이해되기도 했단다.

특히 루터와 칼뱅이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킬 당시, 죄를 사하는 권한이 교회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했었지. 그런데 그 강조가 잘못 오해되고 과장되어 언젠가부터 많은 기독자들이 ‘예수의 피만 믿으면 죄가 용서되고 죽은 다음에 천당 간다’는 교리로 곡해되고 축소되어 버렸단다. 실제로는 교회사에서 한 번도 예수의 피를 믿기만 하면 죄가 없어지고 그 결과 천당 간다는 단순한 교리를 편 적은 없는데도 말이야. 신학과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공부하지 않은 성직자들이, 이 구절과 신약에 나오는 그와 유사한 구절들을 곡해하여 그 큰 의미를 놓치고 신도들을 그렇게 가르쳐 온 거지.

십자가 예수,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는 지성소
그런데 문제는 알고도 고의로 죄를 지은 사람들의 죄란다. 그런 죄를 지은 사람들은 죄에 대한 벌을 받고 나서야 제사장에게 가서 제물을 드리고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단다. (고의로 죄를 지은 사람들이 받아야 할 벌에 대해서는 레위기와 민수기 그리고 더 자세하게는 신명기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지.) 심지어 중대한 죄를 지은 사람은 민족 안에서 쫓아내거나 사형을 시키라고 되어있단다. 예수가 달린 십자가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라는 말이, 고의로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라는 뜻은 아니야.

예를 들어 누군가 살인죄를 지었는데 아무도 모르고 붙잡힐 염려가 없는 상황에서 그가 예수의 십자가 피만 믿으면 죄 용서 받고 죽어서 천당 간다고 믿게 되어 회개하는 기도를 했다고 하자. 그래서 그의 살인죄가 용서되고 죽은 뒤 천당까지 간다면 이는 말이 안 되는 거란다. 회개 기도보다 중요한 건 자수를 해서 살인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하는 거지. 그러고 나서야 회개가 유효한 거란다.

이러한 율법의 이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킨 후, 시내산에서 계약을 맺을 때도 마찬가지였지. 알고 지은 죄는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용서되는 거지. 이러한 하나님의 법은 이방 민족과 나라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단다. 그래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 모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들을 죽였을 뿐 아니라) 이방 나라들 못잖게 사회 정의를 짓밟고 불의를 행하자 하나님은 아시리아와 바빌론에게 두 왕국을 내주어 죄 값을 치르게 했단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 유배생활을 하기 시작하여 페르시아, 알렉산더의 그리스제국, 예수님과 바울 시대엔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내린 벌로 믿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왔지. 그것을 고백한 시 가운데 하나가 시편 106편이야.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자비의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메시아를 보내어 그 옛날 이집트에서 해방시켜주셨듯 제2의 출애굽을 성취해 주실 것을 기다리는 신앙으로 살아왔어. 이를 ‘메시아 신앙’이라고 하지. 죄 용서=메시아=제2의 출애굽. 이것이 나라가 없어도 수백 년 동안 그들의 민족과 종교를 지켜준 신앙이었단다. 이러한 민족적 회개와 희망을 노래한 책이 바로 구약, 그 가운데서도 이사야 40-55장이란다.

메시아, 십자가, 회개 
로마서 3장 25절의 ‘하나님이 예수를 카포레스로 내어주셨다’는 말은, 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는 선언이었단다. 성전 안 지성소에 있는 속죄판이 유대민족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다면, 이제 세계의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만다는 지성소를 하나님이 마련하였는데 그게 바로 ‘예수가 달린 십자가’라고 바울이 선언한 거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바로 이사야서 40-55장에 약속된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메시아(53장)라고 선언하는 것이란다. 53장 첫 머리의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님/하나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라는 질문의 답이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다’라고 바울은 선언하는 거지. 이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나타났다는 얘기란다. 인간 사회에서 이보다 더 위대한 선언은 없다. 로마서는 이사야서 40-55장의 그리스어 요약판일 뿐 아니라 창세기 1장에서 말라기 끝장까지 구약전체의 요약이란다. 

로마서 3장 25절의 선언문을 현대어로 요약하면 이렇게 되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 시내산에서 율법과 계명을 주시고, 아브라함과 맺었던 계약을 다시 맺으시고, 제2의 에덴 동산 언약궤를 두는 지성소를 만들어 자기 백성과 교제하시고 가르치고 함께하셨다. ‘그리나 이제는’(롬3:21) 제2의 카포레스인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하나님은 모든 백성/인류를 만나셔서 사귀고 가르치시고 함께하시게 되었다.

이 구절은 “누구든지 민족과 국가와 상관없이 이 예수가 달린 십자가로 오기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과 사귈 수 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선언이란다. 다만 죄를 지은 삶은 회개하고 와야 한다. 이 십자가의 예수 앞에 나오는 것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한단다. 줄여서 그냥 믿음이라고 하기도 하지. 복음서에서는 ‘회개’라고 하고. 왜냐고? 고의로 죄를 지은 사람이 십자가의 예수에게 나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회개’이기 때문이지.    

국가든 종교든, 죄를 벌하지 않은 공동체는 망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된 지금 우리 민족이 해야 할 일은 회개란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코 함께 섬길 수 없는 경제성장의 우상을 이제껏 섬겨왔고 지금도 섬기는 죄를 회개해야지. 북한은 핵무기가 자기들을 지켜줄 것이라 믿고 핵을 개발하고, 남한은 사드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 믿고 있어. 이는 결국 우리 민족 모두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아니라 무력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 아니겠니. 모르고 지은 죄는 십자가 예수의 피로 용서받는단다. 그러나 알고도 지은 우상숭배는 벌을 받고 회개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어. 돈과 군사력이라는 우상을 숭배했으면 그 죄에 대해 벌을 받고 회개해야 한단다. 우리부터 먼저 하나님의 정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단다.

정치가들은 너나 없이 화합과 통합을 강조할 수도 있지만, 우리 기독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 지금은 회개를 말해야 할 때란다. 헌법을 어긴 죄로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었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앞으로 다른 법을 어긴 사실도 밝혀내 벌을 받게 해야 한단다. 또 박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고 바른 권면을 하기는커녕 앞장 서서 한 패거리가 되어 국정을 농단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가려내어 법에 따른 처벌을 받게 해야 한단다.

우리 민족은 일제 강점기에 앞잡이가 되어 호의호식하면서 동족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일에 동참한 친일 세력을 해방 후에도 엄격하게 색출하여 벌주지 않았단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였지. 일제 강점기에 친일하여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니 해도 된다고 가르친 선교사들과 목사들을 색출하여 벌주고 회개시키지도 않았단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좋은 게 좋다고 그냥 넘어가고 말았지. 그래서 그 친일 세력이 해방 후에 자유당 정권을 만들어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김구 선생 같은 애국지사들을 암살하기까지 했단다. 심지어 김구 선생을 암살한 범인 안두희를 살려주고 보호하기까지 했지.

4·19혁명 때도 이승만 대통령의 앞잡이가 되어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던 사람들을 제대로 벌주지 않았단다. 기독교는 이승만을 감리교회 장로로 만들어 놓고, 장로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고 설교한 목사 부흥사들을 징계하지도 않았지. 죄에 대한 벌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행위의 첫 걸음인데 말이야.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죗값으로 내어주시기까지 하면서 죄 문제를 해결하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은 우리 기독자들이 받을 벌이 더 크지 않겠니? 죄를 지은 사람을 벌하는 것이 그를 진정 사랑하는 거란다.

‘어떻게 말해야 한 표라도 더 얻을까?’ 하는 표밖에 모르는 정치인들을 따라 또 다시, 좋은 게 좋다면서 벌 받을 사람을 벌하지 않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 이후로 잠시도 쉬지도, 졸지도 않고 죄와 싸우시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배신행위임을 명심해야 한단다. 죄와 싸우지 않는 죄는, 죄를 짓는 죄보다 더 크단다. 이번만큼은 과거의 죄를 철저히 청산하고 회개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기독자들이 먼저 회개하는 모범을 보여야 해.

편지를 쓸 때마다 회개를 말해야만 하다니, 참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나라의 미래를, 민족의 운명을 염려하지 않는 종교는 샤머니즘이란다. 기독교를 샤머니즘으로 전락시키지 않는 젊은 기독인들을 꿈꾸면서, 기독교를 샤머니즘으로 전락시킨 세대의 할아버지가 마음 모아 쓴다.
 
시골 할아버지가,
2017년 3월 13일 새벽 거창에서. 
 

전성은
서울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65년 거창고 교사를 시작으로 2006년 교직에서 물러나기까지 41년간 지방 읍내의 학교에서 ‘지천명(知天命)의 교육’에 일생을 쏟았다. 샛별중학교 교장, 거창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으며, 참여정부 시절에는 대통령 직속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한 바 있다. 퇴직 후에도 교육 정책 및 교사 교육에 관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활발히 이어오고 있으며, 국제성서연합회 세계성경번역센터 한국 편집인으로 성경 번역에도 매진해왔다. 지금까지 쓴 책으로는 ‘교육론’ 3부작인 《왜 학교는 불행한가》 《왜 교육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가》 《왜 교육정책은 역사를 불행하게 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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