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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낫과 두루마리의 시간
[317호 올곧게 읽는 성경] 한국교회로 배달된 요한의 편지 4 (계 5장)
[317호] 2017년 03월 28일 (화) 14:28:10 정재훈 용인 덕성교회 전도사 j7859369@hanmail.net

봉인을 여는 이, 어린양
AD 95년에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어린양이 일곱 개로 봉인된 두루마리 책을 취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2017년 3월 10일 한국은 마치 여덟 번째 두루마리 책의 봉인이 열린 날 같았다. 계시록의 봉인이 그렇듯이, 혹자는 기뻐하고 혹자는 침륜에 빠졌다. 요한이 어느 누구도 그 일곱 인을 뗄 자격이 없음을(“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_계 5:3) 알고 있었듯, 우리 역시 여덟 번째 봉인의 결말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으나 할 수 있는 게 고작 헌법재판관들의 성향 분석 정도였다. 우리는 이정미 재판관의 주문(主文)을 예측할 수 없어 불안했으나, 요한은 내용은 자명하나 공표 자격을 갖춘 자가 없어(“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_계 5:4) 조바심이 났던 것이다. 

그때 어린양이 등장한다. 심판의 봉인을 여는 자로서 ‘어린양’의 형상은 계시록에 그려진 여러 기독론적 형상 가운데 단연 두드러진다.(총 28회 언급, 예외. 13:11) 어린양은 다니엘 7장 9-14절 ‘인자 같은 이’의 역할과 형상을 계승한다. 즉 계시록 안에서 ‘인자 같은 이’와 ‘어린양’의 신학적 관계는 대등한 병렬이 아니라 동격의 예속(‘어린양’이 ‘인자 같은 이’에 예속)이다. 계시록에서 ‘인자 같은 이’라는 표현은 단지 두 번 등장할 뿐이지만 여타 모든 기독론적 형상들을 총괄한다.(1:13, 14:14) 그들 사이에 거미줄처럼 연결된 신학적 개념들이 교류하고 있다. 그래서 어린양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시록을 관통하는 ‘인자 기독론’과 어린양의 개념이 어떻게 얼마나 융합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일단 그에 앞서, ‘어린양’이라는 표현만이 독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살펴보자.

어린양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어린양이 앞서 나왔던 ‘인자 같은 이’의 바통을 단순히 넘겨받은 것이 아니다. 그렇게 파악한다면 모름지기 기록자 사도 요한에게 큰 실례다. 앞선 연재에서 보았듯, 요한은 늘 당대의 전승에 과감하게 변화를 주고 현재와 미래의 의미를 증폭시켰다. 그러니 이 부분도 신실하게 읽어야 한다. 말씀의 발전, 전언(傳言)의 진화, 그 결말의 신비를 포착해 빙산의 보이지 않는 중량을 감지해야 한다. 그래야 크거나 작거나 충격(감동)이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보좌 앞에 선 ‘인자 같은 이’와 ‘어린양’의 행동 양식 차이부터 확인해보자.

인자 같은 이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단 7:13)

다니엘 7:13의 해석에 있어 <마소라> 본문과 <70인역> 그리고 다니엘서의 제2의 70인역이라 할 수 있는 <테오도티온>이 서로 능동태와 수동태 사용을 두고 치열한 번역상의 다툼이 있었다. 그 다투는 이유를 쉽게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메시아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 설정상 메시아가 과연 하나님 앞에 자력으로 설 수 있는가? 둘째, 만약 메시아가 자력으로 그 앞에 섰다 하더라도 문학적 수사에서는 ‘신적 수동태’(passivum divinum)로 쓰는 것이 옳지 않은가?

   
 


여기서 사건이 발생한다. 계시록 5:7에서 어린양은 이런 모든 수동적인 신학적 고민과 다툼을 비웃기라도 하듯, 당당히 와서(ἦλθεν, 엘덴) 취한다(εἴληφεν, 에이레펜). 어린양은 인도되지 않고 수여받지도 않는다.
 

어린양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계 5:7)

   

▲ "고대 근동의 신과 영웅의 일반적인 관계에 적용되는 최소한의 준칙 속에서 다니엘 본문을 기록한 필사자들과 번역자들의 치열한 고민이 담긴 것이다." 출처: Othmar Keel, 《The Symbolism of the Biblical World: Ancient Near Eastern Iconography and the Book of Psalms》(1997), 174. 

 

위 그림을 보면 보좌 앞 세 사람 중 가운데 사람이 누군가의 손에 인도되고 뒤에도 따르는 사람이 보인다. 다니엘 7:13의 다양한 표현들(‘그를 데려갔다’ ‘그가 거기 있었다’ ‘메시아 옆에 누군가 있다’ ‘그가 인도된다’ 등)은 단순한 위계, 수동의 수사학적 문제만을 지닌 게 아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신학을 담고 있다. 즉 고대의 신과 영웅 간의 관계와 위상과 관련이 있다. 고대 근동의 신과 영웅의 일반적인 관계에 적용되는 최소한의 준칙 속에서 다니엘 본문을 기록한 필사자들과 번역자들의 치열한 고민이 담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의 ‘어린양’은, 다니엘의 ‘인자 같은 이’에 나타나는 신적 수동의 문학, 신학적 수사학의 문제, 그리고 그것을 넘어 신과의 위상적 위계적 불일치 문제를 넘어선다. 그는 당당히 와서 취한다. 이러한 파격이 불현듯 가능해진 이유는 무엇인가?

피 흘린 어린양의 당당함
계시록 5장은 어린양과 하나님 사이에 모종의 거래를 펼쳐 보인다. 어린양과 하나님 사이엔 서로 주고받은 거래가 있다. 그것은 어린양이 ‘두루마리 책’(7절)을 하나님께로부터 취하고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9절)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맥락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이 피가 가진 의미를 히브리서의 한 구절을 빌려 이해하자면 ‘당당함’이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히 10:19, 표준새번역)

두루마리 책(봉인)을 열 권리를 취하고, 예수의 피를 주고 사들인 백성을 하나님께 드린 거래는 (합당한 대가를 서로 주고받은 것처럼) 거래 당사자들을 당당한 관계로 만들었다. 즉 다니엘서의 ‘인자 같은 이’와 계시록의 ‘어린양’의 차이는 피를 ‘흘린’ 메시아인가 아직 피를 ‘흘리지 않은’ 메시아인가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피를 흘리기 전 메시아는 상대적인 타자로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기를 낮추어야 했다. 그러나 피 흘린 메시아는 그 위상과 위계에서 (스스로) 당당하다.

요한복음이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에 비유하고, 마가복음이 거듭 ‘인자의 수난’(막 9:12, 10:33)을 알리고, ‘구름을 타고 오실 것’(막 13:26, 14:62)이라 말한 모든 빙산의 숨겨진 체적, 그 꽉 채워진 중량의 내용들이 계시록 5장에서 드러난 것이다. 그럼에도 또 한 번 묻는다. 피 흘렸음에도 하늘에 있는 그는 과연 누구인가?

말리나의 천문 신학
미국 크레이튼 대학의 브루스 말리나(Bruce Malina) 교수는 거의 모든 계시록 이야기를 천문학으로 설명해낸 독보적인 신학자다. 그에 따르면 죽임당한 어린양은 별자리 백양궁1(白羊宮, Υ, Aries, 양)에 대한 합당한 표현이다. 백양궁 자리는 세 개의 점으로 단순하게 이루어진 별자리지만 그것을 양 그림으로 형상화하면서 목이 등 뒤로 꺾인 모습, 즉 도살당한 양을 나타내고 있다고 설명한다.2 그에게 어린양에 의해 펼쳐진 봉인되었던 두루마리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분명 “하늘은 종이요, 구름과 천둥 그리고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는 거기에 기록된 글”이라 대답했을 것이다.3

어린양이 그 ‘두루마리’를 취하고,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계시록 전체의 비밀을 열어주는 선명한 도해다. 계시록은 자체적으로도 이 두루마리 책과 하늘의 관계 이해를 위한 단서를 6:14에서 제공한다.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계 6:14)

정리하자면, 요한이 하늘 여행을 하면서 두루마리 책을 보았고 그 책의 내용을 볼 수 없어 크게 울었던 것, 그리고 어린양이 그 봉인을 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피 흘림)가 없이는 하늘(우주)에 계시한 하나님의 무한한 뜻을 인간이 절대로 알 수 없음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자기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 남의 고혈을 뽑아 땅을 물들이는 지상 제국 로마의 황제 따위가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는 거짓 세계에, 진실의 봉인을 열어젖히는 ‘진리 장전’의 반포인 것이다.

‘두루마리’인가 ‘낫’인가
안팎 양면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책을 이해하고자 거의 모든 주석가들은 에스겔 2:10에 의지해왔다. “그가 그 두루마리 책을 내 앞에 펴서 보여 주셨는데, 앞뒤로 글이 적혀 있고, 거기에는 온갖 조가와 탄식과 재앙의 글이 적혀 있었다.”(겔 2:10, 새번역) 그러나 에스겔의 책과 계시록의 책이 같을 수는 없다. 계시록의 책은 인자 같은 이로서의 어린양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책이다. 앞서 언급했듯 ‘인자 같은 이’라는 표현은 계시록에 두 번 나온다.

첫째,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두루마리 책을 보내는 발신자로서의 ‘인자 같은 이’(계 1:11)이고, 둘째는 낫을 쥔 ‘인자 같은 이’(계 14:14)이다. 한마디로 계시록의 ‘인자 같은 이’는 두루마리 책과 예리한 낫의 주인이다. 그런데 믿기 어렵겠지만, 이 둘은 원래 하나였다.

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본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있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십 규빗이니이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 (슥 5:1-3)

에스겔뿐 아니라 스가랴 5:1-3에도 이쪽과 저쪽에 글이 쓰인 두루마리가 등장하고 있다. 이 구절이 계시록의 ‘인자 같은 이’와 ‘두루마리와 낫’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이유는 히브리어 ‘מְגִלָּ֥ה’(므길라) 곧 ‘두루마리’가 70인역에서 헬라어 ‘δρέπανον’(드레파논) 즉 ‘낫’으로 번역된 지점에 있다. ‘horse’와 ‘word’가 우리말에서 ‘말’이라는 같은 글자로 표기되듯 히브리어에서 두루마리와 낫은 자음 MGL을 똑같이 사용한다. 어미 H의 첨가 여부만이 차이가 난다. 70인역의 번역자가 문맥을 고려한 결과, 심판의 글이 낫의 양면에도 쓰일 수 있으며, 날아간다는 것4 역시 두루마리보다는 낫에 더 어울리는 표현이기에 맥락에 맞추어 히브리어 본문을 개정했거나 원 마소라 본문이 H 없는 MGL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마소라만이 70인역의 원본이라는 미신은 쿰란 동굴 사본 발견 이후 현대 사본학계에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이상, 원문이 ‘두루마리’였는지 ‘낫’이었는지는 난감한 문제로 남게 되었다.

두루마리인가 낫인가? 70인역의 존재 사실이 어느 하나로 국한하지 못하게 한다. 둘 다 가능성이 있다. 어느 하나를 결정하고픈 욕심이 발동하겠지만, 요한은 오히려 둘 다를 이용해 인자의 무기로 쓰기로 결정했다. 계시록이 마소라 본문을 선호한다는 풍문은 최소한 여기선 기각된다. 물론 요엘서(3:13)도 낫의 추수를 말하고 있으나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하늘을 나는 낫은 스가랴서가 더 어울린다. 어린양은 하늘 두루마리 책의 주인이다. 그 의미는 결정적 심판의 내용으로 가득한 ‘낫’이 직접 내리꽂히는 것과 다름없는 무서운 것이다. 어린양의 하늘 두루마리는 인자 같은 이가 14장에서 쥔 ‘심판의 낫’을 묘하게 닮았다.

고레스와 ‘인자 같은 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마틴 카러 교수가 ‘인자 같은 이’를 가지고 나를 괴롭힌 시간들은 잊지 못한다. 내가 제출한 소고들이 “나는 구약 교수가 아니다. 다른 교수에게 지도를 받아라” “네가 옳지만 나는 그 이론이 싫다” 등등의 코멘트와 함께 거부당했다. ‘계시록 인자 같은 이의 전승사적 기원’을 ‘고레스’로부터 찾으려 했던 내 학문적 고집 때문이었다. 부퍼탈 신학교의 구약 교수 지스프리드 크로이처(Siegfried Kreuzer) 교수의 지원과 헬게 스타이나 크반빅(Helge Steinar Kvanvig) 교수의 박사 논문을 찾아냈을 때, 나의 ‘고레스 인자론’은 완벽하게 증명된 것 같았다. 그러나 “네가 옳지만 나는 그 이론이 싫다”라는 카러의 답변에 나는 혼절하듯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예레미야의 편지’와 ‘계시록’의 인자 같은 이 비교〉라는 전혀 새로운 이론으로 인정을 받으며 새로운 글을 쓰게 된 결론은 아름답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정신이 얼얼하다. 그렇게 고생하며 설계한 ‘고레스 이론’은 내 공부의 중요한 기둥으로 남아 있다. 먼저 아래의 표를 보자.

   
▲ '고레스 이론'. 세 본문 사이에 한 가지 일치점을 찾아보라.


위 세 본문 사이에 한 가지 일치점이 있다. ‘모든 백성’(다니엘-인자 같은 이)과 ‘세상 만국’(역대하-고레스) 그리고 ‘모든 피조물’(계시록-어린양)의 ‘독점’이라는 특징이 서로를 연결한다. 다니엘서 10장에서 고레스에 대한 언급(1절)과 인자 같은 이에 대한 언급(16절)이 함께 등장해 방해를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 다니엘 7:14의 예언이 역대하 36:23에서 실현되었다고 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5

더욱 놀라운 것은 이토록 제국주의적 왕국의 독점적 권세를, 오지에서 나고 강도로 누명 쓰고 죽은 유대의 한 젊은이인 예수에게 귀속시킨 요한의 기개와 신학이다.

일곱 개의 봉인과 가상칠언
요한의 신학적 문학적 문헌학적 수사 속에서 ‘인자 같은 이’와 ‘어린양’의 교류는 증폭되고 확장된다. 계시록 5장은 1장과 유사하다. 차이점은 1장의 인자 같은 이가 두루마리 책의 발신인이었다면 5장의 어린양은 수신인의 역할을 감당한다. 이 차이 외에 또 하나 발견되는 두 두루마리 책의 상관관계는 ‘이김’이 주제라는 것이다. 일곱 교회의 서신은 각각의 교회가 ‘이길 것’을 지속적으로 주문했고, 하늘 두루마리 책의 봉인을 떼는 순간은 이긴 어린양이 그 자리에 섰을 때 가능했다.

‘어린양이 이긴 자’라는 증거는 ‘죽임당한 그의 형상’이었다. 어린양이 승리를 확정 짓던 순간은 가상칠언(架上七言)의 마지막 외마디가 끝남과 겹친다. 곧이어 벌어진 종말적 현상의 예표(“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_마 27:51)는 계시록 8장 일곱째 인이 떼어질 때 실현된다. 그것은 일곱 나팔의 재앙을 연쇄적으로 터뜨리는 뇌관이다. 어린양이 떼어낸 봉인들이 가져올 환란은 마가복음 13장에서 예수가 예언한 대로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막 13:24-26)

탄핵 선고 전 2017년 3월 10일 0시, 나는 우리 시대의 이세벨이 하야를 선언할 것이라 추측했다. 최소한의 남은 예우를 얻기 위해 선고 직전 최후의 항복을 선언하리라 예측했던 것이다.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모든 신하가 탄핵 기각(또는 각하)을 그녀에게 확신시켰기 때문이다. 웃음이 나왔다. ‘민심은 천심’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하늘을 읽었더라면, 민심을 살폈더라면! 결국 “시간은 걸리겠지만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는 말로 항전의 깃발을 들었다. 그 때문인지 우려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말씀 하나가 떠올라 정체불명의 봉인인 듯 두렵고 거슬린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계 20:1-3)

한국교회는 너무 늦기 전에 제발 민심을 보라. 하늘을 읽어라! 지금이 몇 시인가?


각주_____
1) 황도대의 첫 번째 점성술의 별자리로 황도 좌표계의 맨 처음 30도에 걸쳐 있다. 태양이 이 구간을 지나는 기간은 매년 평균적으로 3월 21부터 4월 20일까지다. - 위키백과
2) Bruce J. Malina, 《Die Offenbarung des Johannes : Sternvisionen und Himmelsreisen》(2002), 67. 
3) 브루스 말리나의 천문 신학이 헛되지 않을 것은 필자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AD 4세기경 로마 황실의 천문행정관 율리우스 마테르누스의 개종과 그의 책 《이방 종교의 허구성에 대하여》(De Errore rofanarum Religionum)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방의 헛된 신들의 비진리를 드러낸 참 신이며 그리스 로마의 모든 신적 요소들을 다 언급하며 그것들의 허구성을 책 전체에서 밝히고 있다.(이 책은 그의 간증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 천문 신학에 의거해 다음 글에서 ‘144,000’과 ‘666’의 관계를 설명할 것이다. 
4) 다음을 참조. 《Septuaginta Deutsch》, M. Karrer/W. Kraus 편저 1218, 슥 난하주 5,ɪ a 계 14:14 ff 날아가는 낫.
5) 클라우스 코크(Klaus Koch) 교수 아래서 박사 논문을 쓴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구약 교수 헬게 스타이나 크반빅 교수는 그의 논문〈(묵)계시문학의 뿌리〉(Roots of Apocalyptic: The Mesopotamian Background of the Enoch Figure and of the Son of Man.)에서 〈The Vision of the Nether World〉라는 주전 6세기경 바빌론 민중문학을 소개하고 다니엘서의 인자는 민중의 소망을 담은 인물로 언급한다. 이미 메시아 인자의 상이 (민중에서 시작해 왕에 오른) 고레스의 왕위에서 실현되었다고 본 것이다.

정재훈
대한신학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 독일 뷔르츠부르크와 튀빙겐 대학교를 거쳐 부퍼탈 신학교를 졸업(Mag.Th)했다. 1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한신대 신대원을 졸업(M.Div)하고 현재 용인 덕성교회에서 청년학생부를 지도하고 있다. 토요일 밤마다 대치교회 성서학당을 통해 요한문서들을 강해하고 탁상담화를 진행한다. 전공 논문은 〈요한계시록 인자 기독론〉이며, 현재는 ‘요한계시록’ ‘지혜’ ‘기독론’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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