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호 잠깐 독서]

현실에서
광야를 만난 이들에게

광야와 하나님 나라
손희영 지음 
성서유니온 펴냄 / 8,000원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의 성경묵상 지도자 훈련 프로그램 LTC(Leadership Training Course) 주제 강연 시리즈 첫 책이다. 책은 ‘광야’를 키워드로 크게 ‘회개-광야로 나아가다’ ‘믿음-광야를 살아내다’ ‘고난-광야에서 충만하게 피어나다’로 나뉜다. 저자는 예수님이 시험 받으신 광야야말로 우리가 살아갈 하나님 나라이자 영생을 위한 훈련장임을, 치열하게 묵상한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겪는 광야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죽음이었습니다. 광야는 죽음의 땅입니다. 하루하루를 죽고 살아나는 체험의 연속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나는 힘들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심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고부간의 갈등이나 남편의 무관심과 냉대, 경제적인 어려움과 질병 등 많은 것이 나에겐 죽음과 같이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죽음에 넘겨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 믿으면 ‘할렐루야’ 하며 순풍에 돛 단 듯 살 줄 알았겠지만 아닙니다. 날마다 죽음에 넘겨져야 합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죽는다는 말입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통해 내 약함과 무가치함과 내게 아무 자원이 없음을 통감할 때, 어느덧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와 있습니다. (200-201쪽)

 

 

 

비극의 절정,
좋은 소식

이것이 복음이다
톰 라이트 지음 / 백지윤 옮김
IVP 펴냄 / 13,000원

‘죽은 뒤 천국 가는 복음’보다 훨씬 더 풍성한 복음을 알려주는 책. 저자는 예수가 선포한 복음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이면서 훨씬 더 ‘좋은 소식’이었다고 주장한다. 거짓 복음, 편협한 복음을 하나씩 제거해가며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에 다가가는 그의 논증 방식은 늘 그렇듯 박진감이 넘친다. 

그분이 말씀하신 창조적이고 재창조적인 사랑이 하는 일은, 오직 창조에 반하는 세상의 모든 세력, 모든 증오와 두려움, 부패와 죽음의 공격을 그분 자신의 몸으로 다 받아 내고 그것을 소진시킴으로써만 가능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또 초기 교회에게 좋은 소식의 핵심이었다. 이는 또한 오늘날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이들에게도 여전히 핵심이다. 예수님의 좋은 소식은 그분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이고 끔찍하게도 나쁜 소식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절정에 이를 준비가 된 것이다. (211쪽)

 

 

 

 

몸과 병듦에 관하여
성찰하다

아픔에 대하여
헤르베르트 플뤼게 지음 / 김희상 옮김
돌베개 펴냄 / 16,000원

독일 의사가 몸과 병듦에 관하여 인간학적 의미를 도출한 책이다. 그가 말하는 ‘아픔’은 몸이 느끼는 통증인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존재론적 고통도 포함한다. 인간은 누구나 병들고 아프다는 사실에 천착하여, 삶의 궁극적 의미를 드러낸다. 의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유가 교통하며 몸의 세계를 해석해낸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인간이 처한 상태와 그 무수한 변형이라는, 자연과학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사태를 현상학의 방법론으로 접근해보려는 시도다. 나는 개별적인 질병 사례를 거듭 처음부터 되짚어 살피면서 현상, 곧 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연구가 인생 이해에 어떤 기여를 해줄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내과의이면서 임상의학자인 나는 현상학 연구에 요구되는 방법을 독학으로 깨우쳤다. 그래서 나는 늘 모범으로 여겨온 인물, 곧 볼노브, 보이텐디크, 겝자텔, 메를로-퐁티, 사르트르와 실라지의 연구를 참고해가며 방향을 잡았다. (서문)

 

 

 

 

 

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용서에 대하여
강남순 지음
동녘 펴냄 / 14,000원

현대사회에서 심각하게 논의되는 주제인 ‘용서와 화해’의 의미를 정치적·철학적·종교적으로 예리하게 탐색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 나치의 유대인 학살,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는 위안부 문제 등 폭력과 살상으로 점철된 어두운 역사 속 용서의 의미를 논의한다. 여기서 저자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응어리로 남아 있는 위안부 문제를 보자. 위안부 문제는 위안부로 피해를 입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위안부 문제에서 용서란 어떤 의미인가. 누가, 누구를, 무엇을 용서할 수 있는가. 과연 용서가 가능한가.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용서는 매우 ‘낭만적’일 때가 있다. 여기서 낭만적이라는 말은 용서가 지닌 복잡한 딜레마나 그 과정에서의 어두운 측면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낭만적 용서’는 종종 용서가 지닌 사회정치적 함의를 놓칠 때가 있다. “좋은 게 좋으니 그저 용서하라”라든지, “용서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용서라는 행위가 지극히 개인의 품성과 결단에 달린 문제라는 반쪽짜리 이해를 불러온다. (22쪽)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