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호 커버스토리]

여론전에 매몰된 대선정국
나라를 걱정하는 말들이 홍수를 이루니, 바야흐로 대선정국이다. 뻔한 흠집내기를 논외로 한다면 각 당 후보자들의 입에서 더 할 수 없이 듣기 좋고 풍요로운 말들이 연일 쏟아진다. 그러나 정치인의 말은 상투적이고 반듯해 보이는 말일수록 (한때 유행했으나 지금은 소리 없이 사라진 ‘제3의 길’ 담론처럼 꽤 그럴듯한 포장을 했을 때조차) 막상 현장의 실천성과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다. 현실정치는 가치와 정책을 둘러싼 엄정한 선택의 연속이거니와, 대안을 위한 수많은 논의들이 종종 풍성한 말잔치로 끝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가령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주창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대안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가방 속엔 고양이가 없었고, 모자 안엔 토끼가 없었으며, 머리 속에는 뇌(腦)가 없었다.” 1933년 대공황의 혹독한 여진 속에서 치러진 세계경제대회가 무기한 정회에 들어갔을 때, 성과 없이 끝난 그 요란한 회의를 비난하면서 케인스가 한 말이다. 언젠가 평론가 황현산은 영화 <시>를 감상한 한 칼럼에서 시작법(詩作法)에 관한 강의가 막상 시 입문자의 시 쓰기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맥락을 전하며 “가장 신실한 말이 가장 허망한 말”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날선 지적이 오늘 더 각별하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겠다고 큰소리치며 출범한 정권이었다. 섬뜩하고 불길했으되 세월이 말해주려니 했었다. 만천하에 드러났듯이, 그 정상과 비정상은 터무니없이 전도된 것이어서, 전직 대통령이 막무가내 편견과 외길만을 줄기차게 고집하는 사이에 정치는 저 혼자 배회했고 민주주의는 제멋대로 표류했다. 마름도 좋고 홍위병도 마다치 않던 저 검고 두꺼운 얼굴들 부류가 청와대건 청문회건 권력 주변 어디서나 서성였던 일이 그래서 우연일 리 없다.

촛불과 특검과 헌법재판소는 걷잡을 수 없이 빗나갔던 한국정치를 간신히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 그 ‘본전치기’조차 얼마나 노심초사의 힘든 여정인지를 뼈저리게 보여주었다. 각자의 속셈이야 어떠하든, 그 홍역을 겪고도 청산돼야 마땅할 인물들마저 대선정국을 농락하는 모습을 보면 한국 정치가 더는 내려갈 수 없는 지점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 정책이 여론보다 선행해야 순서일 터인데, 여론의 바람-돌풍과 뒤집기 따위-이 정당과 후보자의 행태를 규정하는 기이한 전도(顚倒)가 거듭되는 와중에,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버터 한 조각을 터무니없이 큰 빵에 무작정 얇게 펼쳐 바르는 셈이랄까. 언론의 습관적 조명을 받는 대선주자들은 여론전에 온통 정신이 팔려서 실체보다는 소극적이며 잡다한 외연을 넓히는 일에 사력을 다한다.

부동층이나 중범위 유권자 포섭도, 가치와 기준을 공들여 정립한 이후에 좌우로 정밀하게 움직이는 전략적 선택의 결과여야 할 것이다. 진영의 내용은 비었는데 진영 논리만 있으니 미래를 위한 큰 그림은 어디에도 없고 사안에 따른 느닷없는 중구난방과 막무가내의 치고받기만 요란하다. 비민주적 선거제도나 거기 맞물린 후진적 정당체제 같은 절박한 제도적 사안은 아예 뒷전인 채, 죄 없는 정부 형태를 두고 한국 정치의 사활이 걸린 양 한바탕 소동을 피우더니 지금은 그마저도 잠잠하다. 정치적 역정과 정책 역량에 대해 변변히 검증할 새도 없이 색깔론 혹은 지역감정을 은근히 선동하거나 비민주적 정당조직에 간신히 얹혀 마침내 대선후보를 꿰찼으니 대선정국의 혼란스런 이모저모를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소위 민주화 이후 정확히 한 세대가 지났지만, 국민들의 삶은 더 피폐해졌고, 한국 사회의 질은 더 나빠졌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관찰이다. 이른바 “민주주의의 민주화” “민주주의의 심화”가 거론되는 이유이다. 사실 한국 민주주의는 실질적 혹은 사회경제적 차원 이전에 절차와 형식 수준에서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거니와, 선거법, 정당체제, 언론관계법, 노조관련법, 비정규법, 기업법 등 허다한 분야에서 우리 민주주의의 ‘절차’는 불완전하며 아슬아슬하다.

정치의 본령은 약자의 목소리가 수렴·표출되는 제도적 장치, 곧 계급 간 권력적 길항의 제도화를 마련하는 데 있다. 빈곤과 불평등이 심화되고 시장 안팎에서 소외된 노동이 늘어나는 작금의 상황은 한국 민주주의의 명실상부한 회생을 위한 호기여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정치가 당면한 몇몇 시급한 개혁 과제들을 사회경제적 영역에 주목하여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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