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호 스무 살의 인문학]

   
▲ 사진: www.CGPGrey.com

태초에 욕망이 계시니라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말은 오직 살아있는 자들의 것이지요. 살아있는 자들은 말할 수 있다는 특권을 누리며 죽은 자들의 삶을 기록하고 해석하며 또한 왜곡합니다. 말할 수 없는 자는 말하는 자에게 이끌려 다니며 말하는 자의 언어에 포섭됩니다. 그래서 죽은 자가 말이 없는 만큼 말이 없는 자는 죽었습니다. 말은 곧 권력이고 말하기는 곧 창조 행위니까요. 히브리 신화에서 최초로 말을 한 존재는 신입니다. 그는 말을 통해 기존의 세계와 인간을 자신을 중심으로 재구성합니다. 그는 말을 통해 창조한 그의 세상을 보면서 무척 만족하지요.

만족하던 신은 선악과 섭취를 금하는 규범(Nomos)을 부여하면서 창조를 마치는 듯하지만, 이내 ‘남자’를 보고는 이상한 말을 합니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창 2:18) 남자가 잠들었을 때 갈빗대를 빼내어 여자를 창조한 신은 여자를 남자에게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도록 하게 합니다.(창 2:24)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남자의 외로움’과 ‘신의 중매’뿐입니다. 여자의 목소리는 없습니다. 여자가 모르는 남자와 섹스하는 것에 동의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갓 창조한 신의 권위 있는 말에 여자가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만 추론할 수 있을 뿐이지요.

신은 여자를 남자의 외로움을 달랠 ‘알맞은 짝’으로 창조합니다. 여성이 오직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 환원되는 최초의 가부장제 서사가 막을 올리는 순간입니다. 욕망을 갖는 남성과 그 욕망이 투영되고 그것을 내면화한 여성, 그리고 그 과정을 감독하는 권력자. 욕망의 주체와 객체, 그리고 생산자로 요약되는 이 삼각 구도를 보면서 무언가 떠오르지 않으시는지요? 이것은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 이하 포르노)가 제작되는 방식입니다. 오직 섹스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여성과 그 대상성을 철저하게 규명하는 남성,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하는 감독이자 동시에 시청자인 누군가가 모여 포르노를 완성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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