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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하는 자의 목소리
[320호 스무 살의 인문학]
[320호] 2017년 06월 28일 (수) 14:58:27 김희림 철학을 좋아하는 20대 인문학도 goscon@goscon.co.kr
   
▲ 사진: www.CGPGrey.com

태초에 욕망이 계시니라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말은 오직 살아있는 자들의 것이지요. 살아있는 자들은 말할 수 있다는 특권을 누리며 죽은 자들의 삶을 기록하고 해석하며 또한 왜곡합니다. 말할 수 없는 자는 말하는 자에게 이끌려 다니며 말하는 자의 언어에 포섭됩니다. 그래서 죽은 자가 말이 없는 만큼 말이 없는 자는 죽었습니다. 말은 곧 권력이고 말하기는 곧 창조 행위니까요. 히브리 신화에서 최초로 말을 한 존재는 신입니다. 그는 말을 통해 기존의 세계와 인간을 자신을 중심으로 재구성합니다. 그는 말을 통해 창조한 그의 세상을 보면서 무척 만족하지요.

만족하던 신은 선악과 섭취를 금하는 규범(Nomos)을 부여하면서 창조를 마치는 듯하지만, 이내 ‘남자’를 보고는 이상한 말을 합니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창 2:18) 남자가 잠들었을 때 갈빗대를 빼내어 여자를 창조한 신은 여자를 남자에게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도록 하게 합니다.(창 2:24)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남자의 외로움’과 ‘신의 중매’뿐입니다. 여자의 목소리는 없습니다. 여자가 모르는 남자와 섹스하는 것에 동의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갓 창조한 신의 권위 있는 말에 여자가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만 추론할 수 있을 뿐이지요.

신은 여자를 남자의 외로움을 달랠 ‘알맞은 짝’으로 창조합니다. 여성이 오직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 환원되는 최초의 가부장제 서사가 막을 올리는 순간입니다. 욕망을 갖는 남성과 그 욕망이 투영되고 그것을 내면화한 여성, 그리고 그 과정을 감독하는 권력자. 욕망의 주체와 객체, 그리고 생산자로 요약되는 이 삼각 구도를 보면서 무언가 떠오르지 않으시는지요? 이것은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 이하 포르노)가 제작되는 방식입니다. 오직 섹스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여성과 그 대상성을 철저하게 규명하는 남성,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하는 감독이자 동시에 시청자인 누군가가 모여 포르노를 완성하지요.

어둠이 있으라 하시매
근대의 미학적 인식론은 빛의 해석학적 전환으로 시작됩니다. 구멍을 낸 암실에 빛을 쪼이면 구멍 바깥의 사물이 뒤집혀 반대편 벽에 생긴다―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이지요―는 것은 고대부터 있었던 상식이지만, 근대의 사상가들은 그러한 광학기구를 직접 제작할 수 있는 시대에 사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암실에 비친 이미지의 존재성은 기술복제 시대에 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재현(Representation)이 등장한 것입니다. 세계를 가득 메운 존재의 무게가 모조리 소거된 채 질적으로 동일한 기호들이 뚜렷한 현실성을 떠안은 채 암실 안에 나열된 것은 모방예술을 절하한 플라톤의 낯을 뜨겁게 했지요.

그와 함께 꽃을 피운 것이 원근법(Perspective)입니다. 원근법은 사물들 간의 거리와 관찰자와 사물 간의 거리를 수학적으로 아름답게 계산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사물들은 객관성을 확보하지요. 원근법을 사용하면서 근대의 작가들은 단순히 실물을 닮은 차원에서 만족하지 않고, 작품 안의 세계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호의 기계적 평등은 차후 등장한 자본주의와 결탁해 주체의 비인간화, 곧 물화(Verdinglichung)를 야기합니다. 상품 가치라는 암실에 갇힌 우리는 모두 돈으로 환원되는 텅 빈 기표들이지요.

빛에 대한 새삼스러운 발견 이후 사람들은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에서 역설한, 쇠사슬에 묶여 벽의 한쪽 면에 비친 그림자만 보는 게으르고 무력한 죄수가 되어갑니다. 재현과 원근법이 선사하는 완벽하게 닫힌 암실에서 눈을 뗄 필요가 없게 되었지요.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빛에 눈을 비빌 필요 없이 그림자는 완결된 세계를 보여주니까요. 허상이 진상을 대체하고 잔상이 현상을 압도합니다. 이러한 낭만적 거짓 앞에서 소설적 진실은 빛을 고스란히 잃습니다.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아름다운 빛을 발견했지만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어두운 암실에 고개를 처박고 그 어둠 속에서 표절의 카타르시스에 취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소리를 잃고 다리를 얻은 인어 공주
이렇듯 빛―혹은 어둠―의 재발견과 함께 발생한 영상(Image)은 가상의(Imaginary)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이러한 영상을 관람하는 이들이 느끼는 쾌감은 이중으로 얽혀있습니다. ‘진짜’와 같은 것을 본다는 흥분과, 진짜와 ‘같은’ 것을 본다는 안도. 이러한 이중적 쾌락은 포르노를 시청할 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포르노에 등장하는 것은 내 욕망의 분신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내 욕망을 닮은 포르노를 찾아내어 그에 욕망을 동화시키고 그것을 관람하지요. 나의 금지된 욕망이 재현된 ‘진짜’를 보며 쾌감을 느끼고 흥분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며 무의식적인 안도를 느낍니다. 금지된 욕망의 해방을 온전히 누리기에 초자아는 아직 충분히 강하니까요. 폭력성을 뚜렷이 목도하면서, 그리고 그 낭만적 거짓을 즐기면서 문득 찾아오는 형용할 수 없는 양심의 불편함을 마주합니다. 그럴 때 포르노가 그저 암실에서 촬영된 시뮬라크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 역설을 해결할 수 있지요. 포르노는 진짜가 아니고, 진짜와 ‘같은’ 것이니까 여기 등장하는 폭력성은 크게 고려할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볼 일입니다. 정말로 그러한가요? 포르노가 드러내는 ‘진짜’와 같은, 그리고 진짜와 ‘같은’ 것 사이에 잊은 것이 없나요?

그 뒤에는 ‘진짜와 같은 것’을 연기하고 있는, 목소리를 빼앗긴 여성이 존재합니다. 죽은 자처럼 말이 없는 모습으로 욕망의 객체로, 아니 비체(abject)로 전락한 여성 말입니다. 주체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포르노를 감독하는 사람과 포르노를 시청하는 이의 욕망을 따르지요. 인어공주가 왕자의 관심을 얻기 위해 마녀에게 목소리를 지불하고 다리를 얻었던 안데르센 동화의 서사는 유효합니다. 진짜가 아닌 ‘진짜와 같은’ 존재로 기록되고 해석되며 또한 왜곡되는 욕망의 대상에게 목소리는 무의미합니다. 그에게는 그저 살덩이(σάρξ)만 필요할 뿐이지요.

영상에 피상성은 없습니다. 아우라가 몰락한 복제품의 시대라고 원본이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포르노를 시청하는 행위는 그저 암실의 한쪽 벽에 나타난 복제된 이미지를 감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뒤편에는 신적인 권위에 의해 목소리를 빼앗겨 살덩이로 해석된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압도적인 수의 일본 포르노가 배우들의 계약서를 위조하거나 그들을 협박해서 꾸준히 제작되고 있고, 한국에서 생산된 포르노의 대부분은 몰래카메라거나 동의 없는 동영상 유출입니다. 명백한 범죄이고 폭력입니다. 기호는 실재를 지시합니다. 포르노의 기호들은 무엇을 지시합니까? 그것은 여성을 말없는 살덩이로 만들고 욕망의 모방을 강제로 덧씌우는 폭력과 그것이 욕망을 견인하는 주체의 모순을 동시에 지시합니다.

말 못하는 자의 목소리
그리하여 ‘본다는 일’은 근대의 사상가들이 생각했듯 질적으로 균등한 기호들을 초월적으로(supernatural) 감상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모든 시선(regard)은 메두사의 그것처럼 그 대상을 얼어붙게 만듭니다. 사르트르는 타자를 ‘나를 바라보는 자’로 규정하고 타자의 등장은 나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열쇠구멍을 통해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 나는 그 불특정한 타인의 시선에 사로잡히지요.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수많은 공포 영화들이 나는 볼 수 없지만 나를 보고 있는 존재를 설정하고 그를 드러내지 않음으로 우리의 오금을 저리게 하듯, 왕이 백성들에게 그 용안을 함부로 보이지 않으면서 위엄을 유지하듯, 신이 신탁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드러내듯 말입니다.

그래서 일방적인 시선은 물질성(materiality)을 띱니다. 반사되지 않고 머무르는 시선은 그 자체로 상대의 주체성을 앗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일찍이 예수는 “‘간음하지 말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마 5:27-28)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영상에 피상성이 없듯 시선에도 경직성이 없습니다. 샤프츠베리가 칸트에게 영향을 주어 발전시킨 근대미학의 토대인 미적 무관심성(Aesthetical Disinterestedness)은 허구입니다. 시선은 관심, 즉 욕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선은 역동적입니다. 나아가 욕망은 시선을 통해 마침내 드러납니다.

진품보다 복제품이 더 많은 우리네 세상에서 영상의 그림자에 감추어진 폭력성은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고미술품 전문가를 둘러싼 추리극, 영화 <베스트 오퍼>(2013)의 유명한 대사처럼 ‘모든 복제품에는 언제나 진품의 무언가가 숨겨져 있’습니다(There’s always something authentic concealed in every forgery). 성폭력으로 얼룩진 포르노가, 보고 싶지 않아도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눈앞으로 배달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광고와 방송과 음악이 은밀하게 드러내는 포르노를 마냥 감상할 수밖에요.

일차원적인 성 엄숙주의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포르노와 그에 가까운 것들에 등장하여 소비되는 사람들이 그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소거된 채 자본과 문화와 정치의 권력자들이 감독하에 소비자들의 욕망의 비체가 되는 과정을 주목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콘텐츠들은 감각적인 선정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포르노와 똑같은 방식으로 분석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영역에서 사람들을 살덩이로만 인식하고 있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시끄럽다는 이유로 아파트 외벽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매달린 밧줄을 끊는 사회에서,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무엇인지도 생각합니다. 말은 오직 살아있는 자들의 것이었지요. 그럼에도 저는 힘 있는 자들의 목소리에 파묻히지 않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를 위해 입을 열 수 있는(잠 31:8) 목소리를 꿈꿉니다. 말하지 못한 자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까지 고스란히 기록되는 상상을 하면서 말입니다.

 


김희림
장차 전문성과 대중성, 다양성을 겸비한 인문학자를 꿈꾸는 스무살 인문학도. 머리 아픈 철학책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시끄러운 베이스 기타 연주를 즐기며, 비폭력·반전·반핵을 지지하면서 삼류 무협영화 ‘덕후’를 자처한다. 아버지인 김기현 목사와 함께 ‘로고스서원’을 꾸려나간다. 경희대 철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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