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호 반디마을 한몸살이]

   
▲ "이건 '우리' 차야. 그러니까 누구는 타지 마라고 하면 안 되는 거야." (사진: 정동철 제공)

어느 부잣집 풍경?
퇴근하여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TV를 시청하고 있다. 우리 아이는 셋인데, 대충 눈에 들어오는 애들만 대여섯 명이다. 시선을 TV에 고정한 채 옆머리로 인사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TV가 귀하던 시절 부잣집 대청마루에 모여 함께 시청하던 풍경이 그려진다. 그러다 몇몇은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가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가족 간의 저녁식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풍토라 아내는 서둘러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낸다.

‘우린 부자다.’ 공사 현장에서 LCD패드에 줄무늬가 생겼다고 내다버린 32인치 TV가 우리 집을 부자로 만들어준 거다. 자본주의는 부자의 조건을 물질에 둔다. 그 렌즈로 우리를 보면 한없이 초라해진다. 현대인은 개별 가구에 남부럽지 않은 가전으로 가득하다. 소유한 모든 것이 충분한 기능을 다하고 있음에도 빈곤감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다. 내가 소유한 것의 수명이 충분하지만, 신제품이 계속 출시되고, 이웃에서 누가 그것을 구입하기 때문이다.

상대적 박탈감을 이기는 비결
사실 우린 최상의 상품들을 소유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미 물질과 기술은 우리의 만족감과 이해를 넘어서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소비자들이 더 많은 발전을 기대하기도 전에 기업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기술 개발의 가속패달을 힘차게 밟는다. 하지만 다수의 현대인은 최고의 기술보다 적절한 기능이 구현되는 저렴한 기술에 만족한다. 중고시장의 급격한 성장, 1000원 몰의 인기, 중국산 저가 전자제품이 전 세계를 강타하는 것이 그 증거다. 그야말로 ‘적정기술’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본래 적정기술은 선진국에서 후진국을 지원하기 위해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 적정기술 분야에서 과학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 우리 교회 손문탁 박사님의 말을 빌리자면, 적정기술은 가성비와 관련된 것이란다. 사용자가 원하는 가격에 사용자를 만족시키는 기술, 그것이 적정기술이라는 거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상대적 개념의 비교 의식은 허세를 조장한다.

물질 풍요의 시대에서 가장 좋은 것과 빈곤의 상태가 공존하며, 둘 사이의 골이 깊은 상태를 양극화라 부른다. 과거에는 사회 전반에 인프라가 부족했으므로 이웃 간에 심한 박탈감은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그 격차가 심각하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절대적 빈곤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상대적 박탈감은 가중되어 가고 행복감은 추락했다. 여기에 힌트가 있다. 이것은 상대적이며 감정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설정한 비교 대상에 따라서, 또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감정은 박탈감과 행복감을 넘나들게 된다. 그렇게 감정을 넘나들게 만드는 대상을 준거집단[準據集團]이라고 부른다. 준거집단은 개인이 자기의 신념이나 태도, 가치, 행동 방향을 결정하는 데 표준으로 삼는 집단이다. 생각해보면 개인이 표준으로 삼는 집단은 멀리 있지 않다. 비교할 만한 사람들을 자의로 설정하여 그들과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에 간 것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대기업 사장이 최신형 신차를 구입해도 관심 없다. 오히려 옆집 아저씨의 최신 휴대폰에 새로 장착된 기능에 침을 흘린다. 이웃집 아이들의 값진 장난감에 눈이 돌아가는 우리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린다. 페이스북에 올라 온 친구들의 여름휴가 사진을 보면서 초라함을 느낀다. 자매들은 결혼식을 갈 때마다 교복 같은 단벌 정장만 입는 것에 마음이 무너지고, 친인척의 경조사에 얇은 봉투로 동참하는 데 미안함을 느낀다. 이것이 준거집단이다. 공동체로 모여 산다는 것, 그걸로 모자라서 올인 공동체까지 도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라 불렸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만의 준거집단을 확고히 형성했다. 세상은 특이한 그들만의 삶의 형태를 조롱하다가 시기하게 되었고, 시기하다가 추종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동체성이 무너진 한국교회는 세상을 감당치 못하는 조직이 되었다. 세상을 사랑하니 세상의 경영방식과 물질주의와 계급주의가 교회의 문턱을 넘었고, 세상이 준거집단이되어 그들이 겪는 어려움들을 고스란히 함께 겪고 있다. 양극화, 가족붕괴, 교육붕괴, 농촌붕괴, 청년실업, 세대갈등과 같은 사회문제가 교회에서 전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공동체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지를 충분히 나누고 우리 삶의 형태를 결정한다. 결정된 삶의 형태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외부의 풍토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준거집단이 되어 우리의 모든 열악함을 자랑하고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훈련한다. 특히 물질과 관련해서는 검소한 삶을 추구한다. 우리의 적정상태를 찾아가는 것이다. 공동체 차량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이를 잘 반영한다.

구독안내

이 기사는 유료회원만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 온라인구독 회원은 로그인을 해주시고 인증 절차를 거치면 유료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월 1만 원 이상), 온라인구독(1년 5만 원) 회원이 아니시면 이번 기회에 〈복음과상황〉을 후원, 구독 해보세요.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