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호 교회 언니, '종교와 여성'을 말하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인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보니 보수 개신교 내에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 있다. 그리고 관심이 늘어난 만큼 혼란도 있어 보인다. 어떤 사람은 (특히 여성의 경우) 교회 안에서 답답해하던 것에 대한 해답이 좀 보이는 것 같아서 후련해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교회가 공격을 받는다 느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페미니즘에 매력을 느끼지만 자신의 신앙과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지 몰라 고민할 수 있다. 이 잡지를 구독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마지막 경우에 해당하는 분들이 많지 않을까 한다.

17년 전 처음 여성학을 접했을 때 나는 숨통이 트이는 동시에 겁도 났다. 이 지식이 앞으로 나를 데려갈 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책을 낼 무렵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쓸 수 있었고, 대신에 나를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정체화할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남겨두게 되었다. 내가 배운 여성학에 의하면, 신학을 완전히 바꾸지 않고서는 내가 아는 그리스도교와 화해할 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부를 마치고 난 지금 나는 나를 페미니스트로 보기보다는 페미니스트 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 학자로 본다. 남자의 인생과 마찬가지로 여자의 인생도 페미니스트 정치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주 복잡한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울 것도 없는 이 사실의 예는 내 주변에도 많았다. 내가 페미니즘으로부터 배운 것들이 다른 여성들에게는 해법이 되지 못하는 경우들을 본 것이다. 여성의 문제에 대한 페미니즘의 설명력은 기독교세계관이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가지는 설명력만큼 강력해서 처음 그것을 배울 때는 정말 손에 무기가 쥐어지는 기분이었다. 공격하는 무기라기보다는 나를 방어하는 무기인데, 수세적인 방어가 아닌 아주 능동적인 방어와 심지어는 반격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힘을 받는 경험을 몇 번 하다 보면 그다음에는 이 ‘복음’에 설득되는 여성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보게 되고 그것을 의아하게 여기게 된다. 페미니스트 정치학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면 여자들이 훨씬 더 살기 좋은 세상이 올 텐데 왜 동조자를 모으기가 그렇게 힘든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이것을 ‘허위 의식’ 혹은 ‘가부장제의 내면화’ 같은 말로 설명하려 했다. 나아가서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게 대처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에 대해 ‘가부장제의 공모자’라는 말까지 썼다. 이쯤 되면 이 운동에 참여하거나 동조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기 검열의 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지금 내가 하는 것은 충분히 페미니스트적인가, 혹은 이렇게 하면 페미니즘으로부터 어떤 비판을 받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되고, 다른 여성들에 대해서도 그 사람은 충분히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이런 것이 한계야 하는 식의 평가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페미니즘과 결별하는 여성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박완서 선생의 경우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는 페미니즘의 의제에 상당히 동조하다가 그 후로는 페미니즘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휴머니스트라 했고, 공지영 선생은 처음부터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페미니스트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썼음에도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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