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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배움터: 홈스쿨의 그림자
[323호 반디마을 한몸살이 08]
[323호] 2017년 09월 22일 (금) 16:38:34 정동철 ‘반디마을’ 올인 멤버, 몸된교회 전도사 goscon@goscon.co.kr

열네 살 진이의 눈물
이른 저녁을 먹고 일본 애니메이션 한 편을 시청했다. TV 시청 제약을 많이 받는 아이들이라 이 시간은 모두에게 만족감이 크다. 애니메이션 내용은 학교에서 일어난 왕따와 이를 극복해가는 친구들의 노력이 담긴 가슴 뭉클한 성장 영화였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운이 길게 남아서인지 아내와 큰딸 진이는 한참을 얘기하는 듯했고, 나는 거실 바닥과 일체가 되어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내가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둘째와 셋째는 이미 잠이 들었는지 보이지 않았고, 아내와 큰딸 진이만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뿌연 두 사람의 얼굴에 초점을 맞춰 또렷이 보니 이제야 상황이 파악되었다.

진이는 빨간 눈으로 훌쩍이고 있었고, 아내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상을 들어보니 영화에서 본 따돌림의 문제가 진이에게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진이는 홈스쿨을 하지만 우리가 해결 못 하는 몇 가지에 대해선 학원에 다니기도 한다. 피아노와 수영 같은 예체능부터 평생대학원의 제빵 과정까지 외부 배움의 과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중 피아노학원은 꽤 오랫동안 다녔고, 이는 또래 친구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포함된 아주 기대되는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친구들과 사이가 서운해졌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하나둘 학원을 떠났다. 나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미래의 선택이 갈리면서 멀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달랐다.

저녁에 함께 시청한 영화가 진이의 과거 어떤 순간을 강하게 자극했던 것 같다. ‘별거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어떤 때의 사건들이 사실은 따돌림과 무시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진이가 학교와 관련된 얘기를 할 때 빨리 반응하지 못하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자주 끊기게 되었다고 한다. 카톡으로 휴일에 놀자는 약속할 때도 엄마 아이디로 입장하는 진이가 불편했을 것이다. 엄마 아이디로 들어온 진이가 말을 걸면 아이들은 답이 없었다. 그렇게 진이는 은근히 아이들의 틈에서 떠밀렸던 것 같다. 당혹스러운 일이다. 공교육의 병폐가 싫어 시작한 홈스쿨인데 피아노학원에서 왕따를 당할 줄이야…. 심한 왕따가 아니라 은근히 따돌린 거라 별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진이의 고립감은 생각보다 골이 깊었다. 어떤 말로 위로한들 또래 친구 없는 결핍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을까. 나는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학교 안 다니면 “바보”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어느 날 아이들이 공동체 어른들의 회의에 정식으로 제안을 했다. 학교의 이름을 바꿔달라는 거였다. ‘반디배움터’라는 이름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였다.

사실 좀 어이없는 제안이다. 우린 일반적인 학교를 꿈꾸는 게 아니니 마땅히 반디배움터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수영장이나 피아노 학원에서 만난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을 소개하려면 부연 설명이 너무나 길다는 것이다. 조리 있게 답변하기가 어려워 입을 다물고 있다가도 “넌 학교가 어디야?”라는 질문에 학교를 안 다닌다고 하면 그때부터 거북스러운 질문이 줄을 잇는단다. 학교 안 다니면 “바보”라고 막말을 하는 애들도 있었다. 아이들의 고충 토로는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를 수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이런 식의 문제는 생길 것이라고 각오했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지 스스로 확신하고, 바꿀 수 없는 부분은 아이들에게 충분히 설명해야만 했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갈등이 좋다.

이는 우리가 교육의 주체임을 자각하는 것이며 해결의 노력을 통해 모두가 성장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제의 발견과 갈등과 해결 과정의 모든 시간에 낭비는 없다. 간혹 주위의 학부모들을 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충을 겪는다고 토로한다. 학교에서 생긴 일에 대해 부모가 나설 수도 안 나설 수도 없는 일들이 있다고 한다. 또 간혹 선생님이 부당한 처신을 할 때도 아이에게 선생님의 잘못을 지적해야 할지 안 해야 할지를 고민한다. 심지어 아이의 윤리적 잣대를 흐리게 만드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어른을 불신하고, 부조리를 덮어주는 무기력한 부모에게서 기대감을 버린다. 또래의 결속은 이로 인해 더욱 강력해진다. 사춘기 아이들은 이유 없이 반항하고 좌충우돌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이유 있으나 미숙한 항거일 따름이다.

어른들은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아이들이 세상의 이런 부조리에 잘 적응해가길 막연히 바라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어른들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아이들이 극복해야 할 것은 직면해서 노력하게 하며, 세상에 대해 맞서야 할 것에는 함께 행동하는 역동적인 삶의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적극적 갈등이란, 이런 행동이 뒤따를 때이다. 아이들의 고충에 대응이 명백하면 그 소리도 더 커지기 마련이다. 부조리에 대해 수동적 수용도 없고, 이유 없는 반항도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우리가 대안적 교육 시스템을 선택한 기저엔 능동적 대응이라는 안도감이 깔려있다.

통곡의 벽
하지만 우리가 능동적으로 대응한다고 세상이 우리의 편에 서주는 것은 아니다. 대학만 해도 그렇다. 공교육의 문제를 너나없이 꼬집어 말하지만, 실제로 이를 일탈하여 대안적 교육을 실험하는 경우는 3% 미만에 불과하다. 그 존재감은 미미하기 그지없어 교육정책이 3%를 고려하여 바뀌진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학 입시전형은 일반인이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고 난해하다. 충분한 소양이 있어도 정확한 정보 분석과 발 빠른 준비 없이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바른 인성과 사고력에 중점을 두었던 초기 홈스쿨러들에게는 이런 입시전형의 장벽이 통곡의 벽이 되었고, 결국 아이들의 소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환경이 나쁜 대학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한국인인데 한국 대학에 가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말할 정도다.

그 뒤를 따라가던 홈스쿨 2세대의 부모는 그런 고백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근 내가 아는 몇몇 홈스쿨러들도 급히 고등학교로 선회했다. 이것이 2세대 홈스쿨러들의 경향이란다. 나는 이들의 궤도 수정이 대안적 교육을 포기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이들의 선택이 또 어떤 결과를 낳을지 주의 깊게 지켜보게 된다. 시행착오는 계속 일어날 것이다. 우리도 그중 하나가 될 것이며, 이런 실험들이 누적되어 큰 길이 생길 것을 기대한다.

한국은 홈스쿨러들에게도 매우 특수한 상황이다. 실력으로 인정받는 서구와 달리 인구의 80%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은 명문대학 출신들에게만 간신히 열리는 학벌 중심의 사회인지라 바른 인성, 창의적 사고, 능동적 행동 따위가 취업에서 경쟁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을 무시하며 좋은 직장을 기대할 수 없고, 공교육을 무시하며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홈스쿨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사람마다 성향의 차이를 조기에 파악할 수 있고, 적절한 교육과정을 설계하기에 용이하다는 점이다. 인구의 80%가 대학을 가는 상황이면 그중 진짜 공부하기에 적합한 이들은 20%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그것이 취업의 관문인 까닭에 줄을 세워 밀어 넣고 있는 것이라면 조기에 파악한 대로 성향에 맞게 취업에 적합한 기능을 빨리 그리고 다양하게 접하게 해 이에 특성화된 교육기관을 찾으면 될 일이다. 전문학교든, 대학이든, 학원이든 상관없으며 이를 위해 고등학교에 가게 되거나 홈스쿨을 하게 되는 것도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진짜 문제는 아이들이 사회적 고립감을 잘 극복하느냐다. 이미 사회는 90% 이상의 공교육 출신 아이들로 가득하다. 우리 아이들이 그들의 좋은 점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귀한 가치를 지켜내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수시로 어린아이들을 내가 안 가본 길 위에 서게 한 죄로 깊이 고뇌한다.

긴 한숨 끝에
앞이 캄캄하다. 공교육도 홈스쿨도 한계가 분명하다. 그래서 밤을 새워 얘기를 해도 결론 없이 제자리를 맴도는 듯하다. 딸아이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진 걸까? 나는 아이에게 “그럼 중학교에 가고 싶니? 나는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라고 말을 했다. 아이는 잘 모르겠다며 말을 흐렸다. 그 또한 쉬운 결정은 아니다. 확신에 찬 선택이 아니라 그야말로 잘 모르는 것이기에…. 가보지 않은 학교를 어찌 선택한단 말인가?

우린 또 용기를 내야 했다. 흔들리는 아이 앞에서 견고한 부모의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다시 긴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진아, 아빠가 이런 선택을 한 것엔 이유가 있단다. 이런 일들을 겪을 것이라고 전혀 예상 못 한 것도 아니야. 그러나 그런 어려움에 비하면 좋은 점이 많기 때문에 고심 끝에 결정을 한 거란다. 아빠는 네가 또래집단에 속하지 못한 것이 마음이 아프지만,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해.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네 또래의 아이들은 조금의 다름도 용납하지 않는 데다 기다려 주지도 않는단다. 난 그게 우리 사회의 큰 문제라고 생각해. 그래서 내 딸이 또래집단에 예속되어 다름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정말 슬플 것 같아. 엄마 아빠에게 너의 고민을 얘기해 주는 게 다행스럽고 고마워. 그리고 할머니와 친구처럼 지내는 너의 성품에도 감사해. 교회에 가면 아이부터 언니 오빠 이모 삼촌 누구와도 거침없이 대화하는 너의 친화력에 감격한단다. 아빠가 네 나이였을 땐 꿈도 못 꾸었던 거야. 앞으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칠 거야. 그러나 어려운 만큼 좋은 일들도 있을 거야. 우린 늘 그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게 될 텐데 어떤 선택이든 좋은 점 이면엔 어려움도 있는 거란다. 우린 그것을 극복하면서 삶을 살아야 한단다.”

   
▲ 카페 잇다 공간에 마련된 도서관 ⓒ복음과상황

아이가 이 말을 이해했을까? 모르겠다. 다만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메시지만이라도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당장엔 또래 친구, 진학, 취업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긴 호흡에서 보면 그것들이 행복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길어진 수명만큼 직장 생활도 길어지는 건 아니다. 유엔 미래보고서에 따르면, 인간은 길어진 수명으로 대략 다섯 번 정도 직업을 바꾸게 될 것이다. 또 지금의 유망한 직종이 10년 뒤엔 사양 사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국 이 보고서는, 어떤 직업을 가지는가보다 직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제안한다. 어쩌면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이 제안서에 더 적합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드러난 문제,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여전히 어려운 숙제로 남는다. 결국 숙제로 받은 문제의 답을 적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의 교육 실험은 실패하고 아이들은 치열한 경쟁에서 우위를 점령하지 못한 채 승자들의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우리 아이들이 바라던 진리를 좇아 진실하게 살고 건강한 사고로 아름다움을 분별할 줄 아는 인생을 산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다음은 우리의 몫이 아닐까.

우리 공동체는 시작부터 의식주와 관련된 일을 기반 산업으로 생각하고 진행해왔다. 카페와 인테리어를 시작했던 얼마간은 지탱하기 어려울 만큼 어려움을 겪었다. 5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서 해볼 만해졌다. 아이들이 세상으로 나가 결국 주저앉게 될 때 우리는 이것들을 가업으로 넘겨주게 될 것이다. 지금은 카페와 인테리어지만, 이후엔 농사와 의류로도 영역을 넓히게 될 것이다. 그런 일들이 우리의 때엔 초라할 수도 있겠지만 2, 3대(代)를 넘기면서는 상당히 발전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일들은 공동체의 자립을 위한 산업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삶에 기본적인 것들이므로 정직하고 성실할 때 그것만으로도 선한 사역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마지막 안전장치일 뿐 내가 바라는 가장 아름다운 시나리오는 아니다. 내가 꿈꾸는 우리의 미래는 아이들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날개를 달고 세상 끝까지 날아가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과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그곳에서 둥지를 틀어 그의 나라를 꽃피우는 것이다. 아이들이 우리 세대의 공동체를 복제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DNA가 그들의 피에 녹아 있을 것이므로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세대에 그들이 머무는 장소에 임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알려주시는 이상을 붙잡고 새로운 방식으로 공동체를 세워가길 기대한다. 간혹 몇몇은 우리 공동체로 돌아와 함께 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순전히 완전한 자립을 이룬 인격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회귀이기를 기대한다. 원컨대, 세 아이 중 하나는 엄마 아빠가 그리워서 곁에 살고 싶어 하면 좋겠다. 너무 큰 욕심일까?

 

정동철
1971년생으로 울산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뒤 IVF(한국기독학생회) 캠퍼스간사로 14년 동안 섬겼다. 지금은 ‘디자인잇다’ 대표로 일하면서, 몸된교회 전도사로 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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