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호 스무 살의 인문학]

   
▲ Markus Maurer가 그린 <동굴의 비유>. (출처: 위키피디아)

‘그녀’가 싫은 이유
그저 질문 하나를 던졌을 뿐이었습니다. 한창 이야기하다가 던진 짧은 질문 하나가 열띤 대화를 차갑게 식힐 줄은 저도 몰랐지요. 친구끼리 정치 얘기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저도 알지만, 그와 저는 적잖은 시간을 같이 공부하며 보냈고, 정치 이야기를 한두 번 나눈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니, 사실 그와의 대화 대부분은 정치 이야기였습니다. 소위 정치색이라는 부분도 잘 맞았고 여러 쟁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서로를 도발하는 날카로운 질문도 자주 던졌지만, 그 질문들은 토론을 긴장감 넘치고 건강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제가 던진 질문만큼은 우리의 대화를 중단시켰습니다.

저는 그저 “너는 박근혜가 왜 싫어?”라고 물었을 뿐입니다. 그의 말문이 막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말문이 막힌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반쯤 비틀고 눈을 치켜뜨고 반문했습니다. 저는 질문을 조금 더 자세하게 풀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하면서 박근혜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적이 없잖아. 이 대화를 누가 듣는대도 우리가 박근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 수 있을 텐데, 박근혜를 왜 좋아하지 않는지는 얘기해본 적이 없단 말이지. 너는 박근혜가 왜 싫어?” 그러나 그의 막힌 말문은 뚫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 질문에 무척 언짢다는 표정으로 “그럼 너는 박근혜가 좋냐?”라고 되물었습니다. 박근혜가 왜 싫은지 묻는 것이 박근혜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대화를 중단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저는 친구가 박근혜를 왜 싫어하는지 듣지 못했지요. 무언가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이후 저는 박근혜를 비판하는 것에 열중하는 몇몇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깔끔한 대답을 듣기는 힘들었습니다. 흥미가 오기로 변한 저는 스스로도 같은 질문에 대답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박근혜가 왜 싫은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 예상을 완전히 빗겨난 대답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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