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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의 공공성’ 회복 없이 교회개혁 없다
[324호 연중기획] 공적 헌금과 교회 개혁
[324호] 2017년 10월 27일 (금) 15:07:37 박득훈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goscon@goscon.co.kr

“거룩은 지배수단이 아니라 저항수단이다.”(본지 323호, 94쪽) 한국교회의 폐부를 찌르는 진리다. 한국교회가 이 진리 하나만 제대로 깨닫고 진실로 회개할 수 있다면 천지개벽에 준하는 새 역사의 장을 열어갈 수 있지 않을까? 깊고 깊은 내용을 짧은 글에 담아내 읽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흥을 불러일으켜주는 김근수 선생에게 늘 고맙다. 또한 ‘나는 성전 항쟁에서 예수의 거룩이 가장 신학적으로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는(323호, 97쪽) 그의 의견 표명에 온 마음으로 공감했다. 한국교회개혁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교회부패상을 익히 알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차마 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부탁드리는 기도에 머물거나, 혼자 속앓이하다 교회를 조용히 떠난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하지 않으셨는가? 그 말씀은 “내가 거룩을 지배수단으로 삼은 세력에 항쟁했듯이, 너희도 그렇게 항쟁하라”는 뜻이 아닌가? 이 말씀에 용감하게 순종하는 이들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그 날을 간절히 열망한다.

이번 글의 주제는 교회개혁과 헌금이다. 마침 지난 9월 중순 교회개혁실천연대에서 주최한 ‘헌금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포럼’ 때 같은 주제로 발제했다. 편집자의 제안도 있고 해서 개혁연대의 양해를 얻어 그때 발표한 글을 축약하고 수정해서 여기에 싣기로 했다. 이미 내 발제문을 접했던 독자들께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고맙겠다. 

돈 문제를 건드려야 교회 진상이 드러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헌금 문제를 반드시 다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더러운 진상을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 교회개혁의 물꼬가 트일 수 있다. 병원에서도 환자를 다룰 때 제일 중요시 여기는 것은 정확한 진단이다. 어디가, 왜 아픈지 정확히 가려내야 비로소 치료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헌금 문제를 예리하게 다루다보면 교회의 어디가 왜 아픈지 드러나게 된다.

중세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마르틴 루터가 중세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이유가 뭔가? 중세교회의 아킬레스건이었던 돈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는 95개 논제를 통해 면죄부 판매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신학적 토론을 제의했다. 당시 면죄부 판매는 교회의 돈에 대한 욕망 즉 맘몬숭배를 감추는 데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면죄부 판매의 취지가 얼마나 경건해 보이는가? 사랑하는 친지들을 연옥에서 해방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하고 싶은 마음은 얼마나 갸륵하고 신앙적인가? 면죄부를 판매한 돈으로 성당 건축을 완수하겠다니 그 또한 얼마나 경건한 일인가? 그러나 당시 교계지도자들은 순진한 성도들의 주머니를 털어 자기 배를 채우는 사기꾼이요 강도들이었다. 95개조 논제 중 27조와 86조에 주목해보자.

27조: 돈이 연보궤에 짤랑 하고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으로부터 풀려난다고 말하는 이들은 단지 인간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86조: 또 오늘날 최고부자보다 더 큰 부를 갖고 있는 교황이 가난한 신자들의 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돈으로 이 성 베드로 성당을 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돈 문제를 건드리니 중세교회의 신학적 오류와 왜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믿음과 은혜의 도를 왜곡한 공로사상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성경을 뒤틀고, 사제주의를 극으로 몰고 간 모든 신학적 오류의 밑바닥엔 ‘돈 사랑’이 있었음이 명확해진 것이다. 거기서부터 교회개혁운동의 물꼬가 터져 마침내 거대한 파도를 이루어 유럽 전체를 휩쓸었다.

한국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돈 문제를 파고 들어가야 그 진상이 드러난다. 이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이다. 한 부자청년 관원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의 길을 물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켜온 반듯한 신앙인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지도자였을 터이다. 그런데 자신의 몸과 마음에 배어 있는 경건한 언어와 행동 때문에 자신의 깊은 곳에 숨어있는 치명적 문제를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의 눈을 뜨게 해주기 위해 예수님은 사랑의 마음으로 그의 재산 문제를 건드렸다.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전혀 뜻밖의 제안을 받고 그는 슬퍼하고 근심하다 예수님 곁을 떠나갔다(막 10:17-22). 자기기만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을 외면한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한국교회를 바라보신다면 같은 제안을 하실 것이라는 게 내 소신이다. “교회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이것만이 한국교회를 자기기만에서 깨어나게 할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일지는 불투명하다. 내 경험칙으로 보면 안 받아들일 것 같다. 그럼에도 도전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포기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심정으로 나는 한국교회의 헌금 문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한국교회 개혁의 물꼬를 트는 데 일조했으면 한다. 요지는 간결하다. ‘교회는 부를 축적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 교회 헌금을 모두 공적 목적을 위해 쓰라’는 것이다. 즉 ‘헌금의 공공성’을 회복함으로써 사적 헌금이 공적 헌금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면서도 한국교회 개혁의 물꼬가 도무지 트이지 않는 건, 부자청년 관원처럼 돈 문제를 비껴가고 있기 때문이다.

돈 문제를 비껴가는 한국교회

그 뚜렷한 증거를 지난 8월 17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이 개최한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교회미래전략수립을 위한 포럼’에서 볼 수 있다. 주제가 “종교개혁, 다시 시작이다(느 2:18)”였다.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포럼을 사랑의교회에서 열었을 뿐 아니라, 오정현 목사를 마무리 토론의 좌장으로 발언하게 한 것이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위대한 사상가 마샬 맥루한은 ‘매체가 곧 메시지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했다. 종교개혁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유럽의 교회들을 방문해보면, 바라보기에 목이 아플 정도로 설교단상이 무척 높다는 게 눈에 확 들어온다. 당시 개혁교회 교인들은 매 주일 높은 단상을 주목하며,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미사가 아니라 설교다, 그건 성경에 최고의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메시지를 들었다. 높은 단상이라는 매체가 곧 메시지였다.

그런 점에서 ‘사랑의교회’와 ‘오정현 목사’라는 매체에 담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사랑의교회와 오정현 목사야말로 한국에서 종교개혁을 다시 시작해갈 수 있는 중심 주체다’란 것이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비극적인가? 그런 메시지를 용감하게 던지는 게 가능한 건, 오정현 목사와 사랑의교회를 둘러싼 돈 문제를 비껴갔기 때문이다. 오정현 목사와 사랑의교회는 성도들의 피와 눈물이 담긴 3,000억 원이 넘는 헌금으로 초대형 교회건물을 신축했다. 그 와중에 신학적인 오류가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성전 건축”이란 표현을 버젓이 사용하여 헌금을 독려했다.

그러나 합동교단은 그런 문제를 신학적으로 진지하게 다루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니 ‘종교개혁, 다시 시작이다’라는 거창한 주제를 내 걸었지만 거기서 무슨 진실한 논의가 진행될 수 있었겠는가? 교회개혁을 위한 발제자의 다양한 제안들은 대증요법 차원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었다 해도, 오 목사가 마지막 토론 좌장으로서 발언한 내용은 그 모든 것을 허망한 미사여구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에겐 한국교회 개혁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통렬히 회개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한국교회의 자랑거리, 자기 목회의 자랑거리를 늘어놓았다. 그리스도인에겐 ‘생명자본’과 ‘계시자본’이 있으니 4차 산업혁명시대를 두려워할 것 없다, 한국교회엔 열화 같은 ‘성경 사랑’ ‘기도자본’ ‘기쁨자본’이라는 강점이 있으니 이를 잘 살리면 희망이 있다고 강변했다.

도대체 얼마나 자본주의에 사로잡혀 왔기에 생명, 계시, 기도 그리고 기쁨까지 자본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오늘날 맘몬이 자본을 통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고 그 자본이 교회까지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하다. 그는 최근에 자기와 식사를 함께했던 그리스도인 육군중장이 며칠 후 대장으로 승진되는 동시에 육군참모총장으로 발탁된 것을 언급하며 ‘영적 재생산의 힘’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했다. 이는 그가 아직도 한국교회가 세속적인 강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다가 이 지경으로 부패했다는 걸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를 보노라면, 하나님께선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강도의 소굴’이라며 부르짖는데 전혀 딴소리하는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연상된다. 그들은 성전을 열심히 드나들며 ‘우리는 하나님 말씀과 성전을 사랑하며 구원의 기쁨과 확신이 넘친다’고 고백했다(렘 7:1-11).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한 바리새인도 생각난다(눅 18:9-10). 그는 하나님 앞에서 감사 제목과 자랑거리를 늘어놓았으나 정작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가 그토록 경멸했던 세리는 의롭다 인정을 받았는데 말이다.

한국교회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돈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그런 뜻에서 우선 헌금의 공공성이 뜻하는 바부터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헌금의 공공성’이란?

공공성의 사전적 정의는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공공성이라고 할 때는 ‘두루 관련된’을 넘어 ‘두루 이로운’ 성질이라는 적극적 가치판단이 담긴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관점으로 보자면 헌금의 공공성이란 ‘단지 특정 교인이나 특정 교회만이 아닌, 개교회 구성원 전체, 교회들 전체, 한 걸음 더 나아가선 교회가 속해 있는 사회 전체에 두루 이로운 헌금의 성격’이라 할 수 있겠다. 공공성을 지닌 헌금이란 ‘모두를 위한 헌금’ 즉 ‘공적 헌금’이라 명명할 수 있다. 이제 공적 헌금의 정체성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야훼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
공적 헌금은 가장 근원적 차원에서 우상이 아닌 야훼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을 뜻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 즉 야훼가 있는 제단에 바쳐진 봉헌물만을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로 인정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이 실질적으로 배제된 곳에 바쳐진 헌물은 아무리 표면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것처럼 보여도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건 인간이 자기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에 바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은 그런 헌금이 하나님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 헛된 것인가를 맹렬하게 비판한다(사 1:11-13; 암 5:21-24; 미 6:6-8).

야훼 하나님께 드린 헌금은 공공성을 갖지만 우상에게 바친 헌금은 절대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모세와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해방자 하나님이시다. 해방자란 억압과 착취를 당해 가난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압제자와 억압체제로부터 해방하시는 분이다. 그분께 드려진 헌금은 당연히 해방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야 하기에 모두를 위해 사용될 수밖에 없다.

이는 구약의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백해진다. 레위기 27:30-33에 등장하는 십일조에는 용도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기록된 내용을 볼 때, ‘먼저 거룩한 삶이 요구되는 십일조’로 명명하는 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레위기에서 거룩한 삶이란 참된 제사와 진실한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렘 19:18). 여기서 이웃에는 유대인 동포뿐 아니라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도 포함된다(레 19:33-34). 그러니 레위기의 십일조는 당연히 참된 제사와 진실한 이웃 사랑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민수기에 언급된 십일조 역사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한 성막제사를 위해 헌신하기에 자기 토지와 가축이 없는 레위인들에게 주는 기본 식량이니(민 18:21, 24) 역시 공공성이 뚜렷하다. 신명기에서 첫 번째 언급되는 십일조는 매년 하나님의 백성이 성소에 와서 예배드린 후 레위인과 남종·여종을 포함한 가족단위의 공동식사를 위한 식량이다(신 12:5-12, 17-19; 14:22-26). 이 역시 공공성이 뚜렷하다. 신명기에서 두 번째 언급되는 십일조는 7년 단위로 계산해 3년 째 되는 해 드리는 십일조인데, 이는 레위인, 고아, 과부 그리고 떠돌이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제공되어야 한다(신 14:27-29; 26:12). 이보다 더 공공성이 분명할 수 없는 노릇이다.

말라기가 강조하는 십일조도(말 3:7-12) 지금까지 언급한 공공성의 전통을 담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경고하는 십일조 관련 말씀 바로 앞부분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면(말 3:3-5) 분명해진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을 제물은 ‘올바른’ 즉 ‘정의로운(쩨다카)’ 제물이다. 정의로운 제물이란 점·간음·거짓증언을 버리고 일꾼의 품삯을 제대로 주고, 과부·고아·나그네의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하나님을 참되게 경외하는 삶을 살면서 드리는 헌물이다. 삶의 공공성이 철저히 반영된 헌물이요 그렇기 때문에 야훼 하나님께 드려진 헌물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한 다음에 말라기는 현재 그들이 드리는 십일조에 대해 맹렬하게 비판한다. 십일조와 헌물의 공공성에 아무런 관심도 열정도 없었기에 그들은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지 않았을 터이다. 게다가 타락한 제사장들은 그나마 백성들로부터 받은 십일조를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상당 부분을 사적으로 착복했다. 이런 행위들이 바로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다. 말라기 선지자는 십일조와 헌물의 공공성을 회복하라고 외친 셈이다. 그리고 공공성을 회복한 일에 따르는 하나님의 축복은 특정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경제적 회복을 영속적으로 보장해주시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한국교회에서 십일조에 대한 말라기 및 구약 전체의 가르침은 교회와 교단 특히 교회 담임목사들의 사적 욕망 충족을 위해 철저히 왜곡되고 악용되어 왔다. 십일조를 안 내거나 모든 소득의 10분의 1 이하로 내면 하나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무섭게 책망하며 십일조를 강요한다. 다른 한편 소득의 10분의 1 이상을 내면 더 풍성한 경제적 축복을 누리게 된다며 십일조 이상을 내도록 유도한다. 그 결과 십일조에 담긴 공공성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정확한 계산의 필요성과 사적이고 이기적인 탐욕만 남게 되었다. 야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이런 잘못된 십일조와 결별해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일조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 점(마 5:17) 또한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답게 십일조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해 더욱 풍성하게 공적 헌금을 드릴 수 있어야 마땅하다.

이렇게 야훼께 드린 헌금은 자연스럽게 공공성을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우상에게 드려진 헌금은 그럴 수 없다. 구약의 우상에 상응하는 오늘의 존재는 맘몬이다. 맘몬은 헌금으로 자기 하수인들의 배만 실컷 불려줌으로써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더욱 견고히 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래서 맘몬이 지배하는 교회일수록 담임목사가 교회 재정으로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가족을 마음껏 배불릴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를 들 수 있겠다. 그는 지난 5월 17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 50억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힌 배임죄로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 형을 확정 선고받았다. 이는 그가 당회장으로 시무하던 2002년 자기 아들이 이사장으로 있던 영산기독문화원이 위기에 처하자, 교회 재정으로 그 주식을 고가에 매입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회장인 그가 교회 재정을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주무를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2008년 당회장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고액의 교회 재정으로 세워진 다양한 기관들을 그 가족이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는 주지하다시피 3박자 구원, 3중 축복 등의 논리로 한국교회에 기복신앙을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다. 기복신앙과 자본주의가 맥을 같이 하는 건 조금만 깊이 성찰해보면 알아차릴 수 있다. 맘몬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손에 부와 교회재정 운영권을 넘긴다. 그로 하여금 맘몬이 지배하는 교회를 존속·강화한다. 그런 교회에 바쳐진 헌금이 공공성을 지닐 리 만무하다.

그러니 자신이 드린 헌금이 공적 헌금이 되길 진실로 바란다면 헌금을 드리는 교회가 맘몬을 숭배하는 교회인지, 아니면 야훼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인지부터 진지하게 살펴볼 일이다. 표면적인 증거들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컨대 공인받은 교단에 가입되어 있다고, 담임목사가 교육부 인가를 받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해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더 나아가 유명한 해외 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아름답고 규모 있는 교회건물을 가지고 있다고, 예배가 뜨겁고 설교가 감동적이라고, 그 교회가 야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다는 보장이 결코 없음을 꼭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런 교회여도 얼마든지 맘몬을 숭배하는 교회일 수 있다. 오직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는 교회에 바쳐진 헌금만이 공적 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닐 수 있다.

2. 하나님 나라와 그의 정의를 위해 쓰이는 헌금
공공성을 확보한 헌금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정의를 추구하는 데 쓰이는 헌금이다. 사실 이는 첫 번째 정체성과 불가분 관계에 있다. 헌금이 맘몬이 아닌 야훼 하나님께 드려졌는가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조건을 신학적·신앙적으로 잘 이해하려면 교회의 존재 목적 즉 사명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정의를 실현해가는 데 있음을 명확하게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라’고 명하셨다(마 6:33).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고백하는 그의 몸이다. 그렇다면 이 명령을 교회에 주는 존재 목적으로 엄중히 받들어야할 것이다. 하워드 스나이더가 이 점을 《참으로 해방된 교회》에서 잘 입증해주었다. 정확히 마태복음 6:33에 주목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끊임없이 기대하는 자세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즉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마 6:10) 기도해야 한다.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다. … 하나님 나라의 표지는 하나님의 정의와 의다.

그는 마태복음 6:33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정의와 의’라고 풀어서 설명한다. ‘하나님의 의(디카이오수네)’는 죄인을 의롭게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뜻한다. ‘하나님의 정의(크리시스)’는 의롭게 된 사람이 교회와 세상 속에서 행하는 정의로운 행동을 뜻한다. 스나이더는 마태복음 6:33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의가 사실은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고 본 것인데, 성경의 전체적 가르침에 잘 들어맞는 해석이다. 그러니까 교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고, 그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이들이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행하게 하는 데 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어둡고 슬픈 이 땅에서도 아름답고 힘차게 펼쳐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종종 착각에 빠진다. 교세확장 자체를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오판하는 것이다. 이를 간파한 스나이더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대신 교회 자체를 세우는 존재로 자신을 규정짓게 되면 언제나 문제가 생긴다”고 경고하면서 그의 책을 시작한다. 교세확장에 몰두하는 교회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일까를 고민한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와 의를 구하는 교회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세상으로 내 보낼지 씨름한다. 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는 전자를 비본질적 교회인 ‘크리스텐덤 교회’로, 후자를 본질적 교회인 ‘선교적 교회’로 명명한다.

‘선교적 교회’란 첫째, 예수님의 성육신 정신을 이어받아 세상 속으로 깊이 스며드는 교회다. 둘째, 영혼과 교회는 소중히 여기고 몸과 세상은 경시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배격하고, 그 둘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메시아적 영성을 지닌 교회다. 셋째, 성직자와 평신도를 상하관계로 보는 계급적 리더십 구조를 청산하고, 교회 내 다양한 은사를 자유롭게 인정하는 수평적 리더십 구조를 갖춘 공동체이다. 이같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정의를 실현하는 선교적 교회가 되려면 크리스텐덤 교회로 머물고자하는 욕망과 안이함에서 스스로를 해방하려는 결단을 해야 한다. 이는 제2의 종교개혁에 버금가는 혁명적 각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 헌금의 공공성 즉 공적 헌금의 정체성은 교회 헌금이 크리스텐덤 교회를 확장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선교적 교회의 전반적인 사역에 쓰이는 데서 드러난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통해 허락하신 헌금을 사용할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깊이 성찰해야 한다. 과연 헌금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정의를 실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이를 위해 개교회는 최우선적으로 교회 헌금이 교회의 특정 인물에게 사적으로 이로운 쪽으로 쓰이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감독해야 한다. 목회자 특히 소위 담임목회자의 월급 수준을 지나치게 높여선 안 되며, 최소한의 목회활동비 외에 목회자가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재정을 허락해선 안 된다. 그가 아무리 선교와 구제를 위해 재정을 지출한다 할지라도 그로 말미암아 그가 권력과 권위를 획득하게 되기 때문에 사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헌금의 공적 성격을 지켜내려면 목회자가 아닌 교회가 지출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자기 교회만의 교세확장을 위해 헌금을 사용하는 일을 철저히 자제해야 한다. 예컨대 화려한 대형교회당 건축을 성전건축이라며 막대한 헌금을 쏟아붓는다면 교회 헌금의 공공성을 철저히 훼손하는 일이 된다. 작은 교회가 진정으로 건강한 교회로 성숙해갈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임을 깨닫고 교회운영비를 최소화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 교회 확장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위한 경비지출에 힘을 써야 한다. 예컨대 예루살렘 초대교회처럼 교회 내 경제적 약자들을 위한 지출을 강화해야 한다(행 2:44-45; 4:32-37). 또한 바울이 간절히 권면한 것처럼 연약하고 가난한 이웃 교회를 위한 지출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해야 한다(고전 8-9장). 눈과 마음을 넓혀 일반 사회의 사회적 약자들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연만물을 직접 돌보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 재정을 지출해야 한다(롬 8:19-22). 나아가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증진하는 데 헌신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단체를 지원해야 한다. 물론 개교회의 규모에 따라 지출에 대한 현실적 균형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지향점은 같아야 한다.

그럼 마지막으로 헌금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길을 모색해보자.

헌금의 공공성 회복을 위하여

헌금이 공공성을 회복하려면 교회가 네 가지 방향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돈 문제를 건드려야 비로소 교회가 개혁될 수 있다.

1. 맘몬숭배에서 야훼신앙으로
맘몬숭배에서 벗어나 야훼신앙으로 돌이켜야만 헌금을 야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그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 현실을 볼 때 맘몬숭배에서 야훼신앙으로의 전향은 지난한 과제다. 맘몬숭배가 강력하게 퍼뜨려온 기복신앙이 아주 교묘하기 때문이다. 야훼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명백히 기복신앙인데 맘몬은 절대로 기복신앙이 아니라고 우긴다. 기복신앙이란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으면 부의 축복을 받아 자신과 가족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신앙으로, 이 땅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신앙이다.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그런 신앙을 따라갈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맘몬은 자기가 추천하는 신앙은 그런 기복신앙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어 부의 축복을 넘치게 받아야 교회와 이웃 그리고 세상을 위해 많이 베풀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이라고 말한다. 대다수 한국교회가 이 버전의 기복신앙에 매료되어 있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전자는 아주 저차원적인 기복신앙이고 후자는 업그레이드된 교묘한 기복신앙이다. 왜냐면 후자는 구제와 나눔을 부에 대한 탐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예컨대 김미진은 《왕의 재정》에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한다.

우리에게 가장 도전되는 삶은 90퍼센트 기부하고, 나머지 10퍼센트도 넉넉하여 모든 것에 넘치는 삶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런 삶을 살도록 도전한다. 그런 삶을 살도록 목표를 세우고 도전하라!

기부하고 남은 10퍼센트 소득만으로도 모든 것에 넘치도록 풍족한 삶을 살려면 그야말로 큰 부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김미진은 그렇게 큰 부자가 되는 걸 신앙인의 목표로 세우라고 권한다. ‘90% 기부’라는 미명하에 부자 되고 싶은 욕망을 정당화하고 부추길 뿐 아니라, 나머지 10%를 마음 편안하게 누리라고 유혹한다. 10%조차도 자신의 기본적 필요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웃에게 돌아가야 하는 몫임을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야훼 하나님은 당신 백성을 결코 이런 식으로 가르치시지 않는다. 앞서 간략하게 언급했듯이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이시다. 야훼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르쳐주신 자신의 이름, 즉 YHWH를 일컫는다. 하나님은 야훼라는 이름에 해방자란 정체성을 담기 원하셨다(출 6:2-9). 즉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제국 바로 체제 하에서 노예로 억압과 착취를 당할 때, 그들의 탄식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노예살이 고통을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신 하나님이다(출 2:23-25; 3:7, 6:5). 그래서 그들을 지배세력의 손아귀에서 확실히 해방하지 않으면, 나아가 새로운 나라로 옮겨주지 않으면 그들이 고통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다.

그러니 사회적 약자를 사랑한다면서 자선과 구제의 차원에만 만족하면 그는 아직 야훼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이 아니다. 또한 야훼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오늘로 말하자면 겨우 수천 원에 불과한 작은 액수를 드린 가난한 과부가 어떤 부자보다도 더 많이 드렸다고 칭찬하셨다. 그 과부에게는 수천 원이 생활비 전부였기 때문이다(막 12:41-44). 이웃 사랑의 깊이는 내어준 액수의 규모가 얼마나 큰가로 판정되지 않고, 주고 남은 액수의 규모가 얼마나 작은가로 판정된다. 큰 나눔을 위해 먼저 큰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맘몬과 자본주의의 논리이지 결코 하나님 나라의 논리가 아니다. 그런 논리에 근거해서 드린 헌금이라면 아무리 큰 액수의 헌금이라도 거기엔 공공성이 없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헌금의 공공성을 회복하려면 기복신앙 즉 맘몬숭배에서 벗어나 야훼신앙으로 돌이켜야 한다.

2. 대형교회 신화에서 벗어나 작은 교회로
대형교회 신화를 대중화하는 이들의 배후세력은 맘몬이다. 그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효과적으로 사역하려면 일단 강하고 커져야 한다고 꼬드겼다(마 4:1-11). 대다수 한국교회는 너무 쉽게 이런 맘몬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대형교회 신화’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대형교회로 성장해야 축적된 인적·물적 자원으로 하나님 나라 일을 효과적으로, 크게 할 수 있다는 신화 말이다.

대형교회 신화에 미혹되면 결국 헌금을 강요하게 되고, 거두어들인 막대한 헌금으로 대형건물을 건축하고 대기업 CEO와 별 차이 없는 담임목사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준다. 헌금은 매우 빠르게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될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에서 벗어나려면 대형교회 신화에서 벗어나 작은 교회를 추구해야 한다.

작은 교회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부탁에 충실한 교회다. 예수님은 맘몬의 유혹에 맞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전적인 신뢰, 하나님만 섬기는 삶을 붙드셨다. 그런 확신을 공생애 기간 동안 철저히 고수하자, 따르던 무리들도 예수님 곁을 떠나갔다. 예수님께서 맥없이 로마군병과 성전경비대로 구성된 체포조에 순순히 끌려가자, 심지어 제자들마저 그를 배반하고 도망쳤다. 예수님은 홀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 더 작아질 수 없을 정도로 작아지셨다.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은 크고 강한 것을 추구하지 않으시고 작음을 견지하셨다. 다시 갈릴리로 가셨고, 거기서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며 하나님 나라 일에 관해 말씀해주셨다. 그들에게 땅끝까지 나아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주시면서도 그들이 의지할 힘은 오직 성령이 부여하는 권능뿐이라고 분명히 못박아 말씀하셨다(행 1:3-9). 베드로에겐 대형교회를 세우라 하지 않고 그저 자기를 따라 죽음의 길을 가라 하셨다(요 21:18-19).

세상을 구원하는 가장 큰 힘은 사랑인데 사랑의 본질은 바로 작아짐과 맞닿아 있다. 사랑은 상대를 위해 자기를 끊임없이 내어주는 힘이다. 주고 또 주어서 더 이상 내어줄 것이 없을 때까지 자기를 내어주는 게 사랑의 속성이다. 사랑의 끝은 자기의 죽음이다. 그러니 사랑한다면서 스스로 작아지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이 사랑 때문에 작아지신 것처럼 작아질 줄 아는 교회, 그런 교회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진실하게 선언할 수 있는 교회는 실제로 작은 교회뿐이다(행 3:6). 그럼에도 대형교회의 역할이 따로 있다고 변호하는 이들이 있다. 그건 핑계일 뿐이다. 작은 교회들이 연합하면 대형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함께 감당할 수 있다. 물론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좁은 길이기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교회의 작음 자체가 아름다움과 건강성을 보장해준다는 얘기는 아니다. 큰 교회가 되고 싶어 발버둥 쳐 왔는데 여전히 작다면, 그 교회는 그저 실패한 교회일 뿐이다. 사랑은 작음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는 신앙적·신학적 의미를 알고, 기꺼이 커짐을 포기하고 작음을 지향할 때 진정으로 아름답고 건강한 작은 교회가 될 수 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작은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 톰 라이트가 잘 표현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부터 힘을 받은 교회가, 연약한 상태로, 고난 받으며, 찬양하며, 기도하며, 오해받으며, 오판 받으며, 정당성을 입증 받으며, 축하하며 이 세상으로 나아갈 때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은 교회를 흠모하며 지향할 때, 교회 헌금은 비로소 그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 부자 교회에서 가난한 교회로
대형교회의 신화에서 벗어나 작은 교회를 지향한다는 건, 부자 교회가 되고 싶은 탐욕을 버리고 기꺼이 가난한 교회가 되고자 결심하는 것이다. 대형교회와 부자 교회, 작은 교회와 가난한 교회는 각각 동전의 양면과 같다. 부자 교회가 되고자 하면 헌금의 공공성을 확보할 길은 사라진다. 반면에 가난한 교회가 되기로 작심하면 헌금의 공공성이 확보될 수 있다.

부자 교회가 되고 싶은 열망에는 맘몬의 간교한 유혹이 깃들어 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일단 부자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속삭임이다.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여기에 무서운 함정이 있다. 부자 교회가 되면 교회에 그 부를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세력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 중심에 담임목사가 서게 된다. 그런 교회들이 담임목사에게 엄청난 사례비를 지급하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뿐 아니라 적지 않은 대형교회들이 담임목사에게 전체 교회 예산의 일정 부분을 목회활동비로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도 한다. 교회 헌금을 사사화하는 한편 공공성은 증발해버리는 셈이다. 이런 점이 종교인과세 실행을 2년 더 유예하자고 강력히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교회는 그렇지 않다. 가난한 교회란 엘살바도르의 해방신학자 소브리노가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라고 부른 교회다.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 전체의 중심’으로 간주한다. 하여 그들의 눈과 마음으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역사·사랑·죄·복음 그리고 교회가 무엇인지를 다시 묻고 답을 찾는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는 실제로 가난한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설사 부가 생긴다 해도 교회 안에 쌓아둘 수 없다. 교회의 운영을 위해선 꼭 필요한 최소한의 재정으로 만족한다. 그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이 중심이 되는 하나님 나라 사역에 바친다. 화려한 대형 건물 건축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언제나 교회 전체의 가난을 지향한다. 가난 자체가 거룩하거나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동참하여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다.

문제는 이렇게 가난한 교회를 지향하다보면 목회자 가정의 생계비조차 마련하기 힘든 교회들도 생겨난다는 점이다. 다양한 대책이 있겠지만 가장 바람직한 건 가난한 교회들의 연대다.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은 교회가 더 어려운 교회들을 지원함으로써 교회 간 평등을 실현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후 8:13-15). 이렇게 가난한 교회를 지향할 때 헌금은 자연스럽게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다.

4. 세속화된 교회에서 저항하는 교회로
맘몬숭배로 말미암아 대형교회 신화를 환영하고 부자 교회가 되고자 하면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에 물들어 세속화되고 만다. 세속화된 교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강도의 소굴”이다. 맘몬숭배에 빠져 교회의 대형화와 부의 축적을 추구하다보면 최대한 빠르게 교회 확장을 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속적 강자를 대환영하고 재빨리 교회 지도자로 세운다. 이를 통해 불의하게 부와 권력을 축적해온 세상의 강도들이 가뿐히 신분세탁의 특혜를 누린다. 강도들의 지지를 받는 목회자가 왕으로 군림한다. 그런 교회가 거두어 사용하는 헌금이 공공성을 지니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강도들과 그 두목에 해당하는 담임목사의 탐욕에 따라 사용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맘몬숭배에 맞서 야훼신앙을 회복하고, 작은 교회, 가난한 교회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적 병폐에 저항하는 교회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저항에는 여러 차원이 있다. 첫째, 신앙공동체 형성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인 정의와 평화를 중심으로 뭉친 저항적 신앙공동체는 자본주의 체제에 친화적인 다양한 사회적 그룹들, 그리고 그것의 교회적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대형교회 내 소그룹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요 위협이다. 거기서 그람시가 말한 ‘진지전’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마을생태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다양한 작은교회운동은 작지만 강한 저항운동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런 신앙공동체의 헌금은 자연스럽게 공공성을 확보하게 된다.   

둘째,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부추기는 소비주의와 성공주의에 저항하는 삶의 방식을 몸에 익혀 나가는 일이다. 소비주의란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신념이다. 저항하는 교회는 이에 대항하여 ‘나는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주장한다. 성공주의란 ‘나는 성공했다, 고로 존재한다’는 신념이다. 저항하는 교회는 이에 맞서 ‘나는 사랑했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선언한다. 이렇게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삶의 방식을 익혀가는 사람들의 교회 헌금은 자연스럽게 공공성을 확보해나갈 수 있다.

셋째, 자본주의에 분노하고 저항하며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최대한 실현될 수 있는 대안적 경제체제를 추구하는 일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분노해야 하는 이유는 실로 다양하다. 가장 치명적 병폐 하나만 들자면 자본의 노동착취에 의한 경제적 불평등 심화다. 물론 대안적 경제체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는 한 모두 신앙의 동지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할 국면도 있겠지만, 서로 아군으로 여기면 된다. 저항전선의 지점이 약간 다를 뿐, 저항의 방향은 같다는 점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가 이렇게 저항의 길을 가다보면 헌금에 자연스럽게 공공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진실로 갈망하고 기도한다. 어느 시대나 교회의 건강성은 헌금의 공공성 여부로 진단할 수 있다. 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진지한 이의를 던진 이유도 거기에 있다. 95개 논제 중 45조에서 “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지나치면서 면죄부 매입에 돈을 쓴다면 교황의 사죄는커녕 하나님의 분노를 사는 것”이라 경고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교회개혁을 부르짖으면서 헌금의 공공성을 훼손하는 일을 자행한다면 하나님의 분노를 받아 마땅하다. 한국교회가 부디 헌금의 공공성 회복에 총력을 기울임으로 그런 슬픈 지경에 처하지 않게 되길, 그래서 교회개혁의 길을 활짝 열어가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박득훈
한국 개신교의 교회개혁운동을 대표하는 실천적 지성인이자 목회자. 한국사회의 빈부격차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지니고 연세대 경제학과에 진학했으나, 선교단체를 통해 예수와의 깊은 인격적 만남 이후 경제학보다는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에 몰두했다. 영국 런던바이블칼리지(현 런던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국제장로교회(IPC)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이후 영국 더럼대학교에서 ‘경제정의’를 주제로 기독교사회윤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로 섬기면서 한국 사회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길을 깊이 고민하며 삶으로 씨름하고 있다. 《돈에서 해방된 교회》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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