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호 반디마을 한몸살이 10]

▲ 공동체 기반 사업인 인테리어 업체 '디자인 잇다'는 천천히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사진 속 인물은 필자. (사진: 정동철 제공)

‘만나’가 끊어진 땅에서 ‘생계’를 모색하다
2012년, 열세 해 동안 사역자로 살았던 한국기독학생회(IVF)를 떠났다. 1999년 의욕적으로 시작한 사역은 많은 아쉬움과 한계를 드러냈지만 대체로 즐겁고 감격적이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도요 전적인 도우심의 결과지만, 나는 헌신적으로 재정의 일부를 꾸준히 기부해주신 후원자들을 기억하고 싶다.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내겐 날마다 내려오는 만나와 같았다. 누구의 벌이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단순히 필요를 채우는 것 이상의 에너지원이었다.

13년 간의 사역을 마무리 했을때 ‘만나’도 끊겼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한 후 만나가 끊어졌듯이 내게도 그런 시기가 온 것이다. 이제는 매월 가시적인 노동의 결과에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 시기에 나는 나의 피와 땀과 눈물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데 익숙지 않았다. 그저 매월 200만 원만 벌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온갖 일들을 닥치는 대로 했다. 돌이켜보면 목표액에 도달하지 못한 적은 거의 없었고 그 이상 벌기도 했다. 그런데도 항상 불안했다. 다음 달에도 수입이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돈을 번 일터는 울산에서 시작한 ‘카페 잇다’였다. 첫 사업이라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만 신기할 정도로 따박따박 손님들이 찾아왔다. 카페 인테리어를 맡길 돈이 없어서 스스로 망치를 들고, 아버지와 일했던 기억을 더듬어 직접 시공을 했다. 아버지는 목수였는데 공사 현장에서 추락 사고로 돌아가셨다. 만약 살아계신다면 나의 이런 발버둥을 멀리서 보고만 계시지 않았을 거다. 이제 아버지는 너무 멀리 계시고 유품이 된 아버지의 연장만이 나를 열심히 도왔다.

그렇게 뚝딱뚝딱 내 손으로 지은 카페는 새로운 손님들을 불러들였다. 인테리어 시공 의뢰가 자꾸만 생겨나는 것이었다. 이 일은 곧 나의 다음 직업이 되었다. ‘디자인 잇다’라는 인테리어 업체를 만들게 되었고 지난 5년간 일거리는 꾸준히 들어왔다. 홍보를 한 적이 전혀 없는데도 일이 끊이지 않은 것은 기적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엔 불러줘서 감사한 마음과 부족한 경험 탓에 염가로 시공을 많이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기술은 자리를 잡았고 자신감도 상승했다.

그렇게 인테리어를 하다 보니 폐목재가 마당에 쌓이기 일쑤였다. 폐목재를 물끄러미 쳐다보니 또 할 만한 일들이 떠올랐다. 폐목재를 연료로 가마솥에 곰탕과 육개장을 끓여 내놓는 일이었다. 한동안 ‘진국남자’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곰탕을 택배로 배송하기도 했다. 좌충우돌. 이는 그간의 도전을 가장 잘 표현한 사자성어다. 왜 그리 많은 일들을 해보고 싶었을까? 원래 나란 존재가 그렇기도 했지만, 공동체를 염두해 둔 도전이기도 했다.

공동체는 다양한 사람이 모이게 될 터였다. 그중엔 사회적 약자도 있을 것이다.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하려면 공동체는 적절한 기반 사업이 필요하다. 나의 잦은 전업은 공동체의 기반 사업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다. 실제로 현재 우리 공동체의 주 수입원은 카페 잇다와 디자인 잇다 두 사업체다. 아직은 그리 큰 돈을 만져 보지 못했고, 함께 일하려고 모인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려웠던 적도 있었지만 두 사업은 아주 천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꿈
나는 빨리 수익이 늘어서 처음 기획했던 대로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는 꿈을 꾸지만, 주변에서 나를 지켜본 이들은 사역자였던 사람이 빚을 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견하다고 격려해준다. 그들의 격려 속 전제처럼 나는 아직 사역과 사업의 경계를 모르겠다. 확실히 사업을 생각하면 내 꿈은 분배에 가까운 것 같다. 우리 재화를 능력이 아닌 존재의 가치로 분배하자는 게 이 사업의 정신인데 문제는 나눌 재화가 충분치 않으면, 즉 수익을 많이 내지 못하면 불가능한 생각이다.

어떤 분은 우리를 공산주의 아니냐고 몰아세운다. 분배의 방법만 보자면 일부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수익을 창출하는 활동에선 자유시장 경제원리를 따르고 있다. 이 모호한 줄타기 기법은 어디서 배운 걸까? 우리는 양극단의 사상과 경제원리에만 익숙한 나머지 다른 사상의 도전에는 무지하고 둔감하다. 그것이 설사 성경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때가 많다. 마치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 폐지에 반대한 남군도 기독교인이었던 것처럼, (단지) 익숙한 사회문화를 필요악이라고 정해 두고 성경적 가르침을 어기기도 한다. 이는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은 따를 만하지만 희생과 순종은 거부하는 격이다. 희생과 순종 없이는 용서와 사랑이 불가능한데도 말이다.
특히 한국적 상황 속에서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시스템이 아니라 사회주의와 대치된, 민주주의의 하부 경제원리로 이해된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시장은 그 누구도 누려본 적인 없는 자유를 누렸다. 그 결과 심한 양극화, 자본축적에 의한 갑질 문화, 과도한 경쟁 등 심각한 병폐들이 드러났다. 이렇게 제대로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대안은 없는가? 나는 성경이 이미 바람직한 대안을 제시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충분한 재원과 인원이 있음에도 성경의 가르침대로 자본주의를 수정할 의지를 가지지 못했다. 하기야 성경의 1차 독자였던 이스라엘조차 그들에게 지시한 하나님 나라의 경제 원리를 제대로 지킨 적이 없다. 그러나 성경적 대안은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동안 절대 피해갈 수 없는 것들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 사는 동안은 각자가 속한 국가의 운영시스템에 충실히 예속되고 그 기반인 경제시스템에 순응하다가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간 후에 하나님의 경제 원리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와 있다고 선포하셨다. 그래서 교회는 이 땅에서 발을 붙이고 사는 동안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원리를 살라고 지시받는다. 그중엔 경제 원리도 포함된다. 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는 교회는 직무유기다. 우리가 성실히 벌어서 헌금한 돈의 일부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축적된 자본, 즉 도적질한 것이 포함되었겠지만 교회는 그것을 묵인하고 무차별로 헌납 받고 있다. 또한 이를 재분배하는 최소한의 노력도 희박하다. 교회는 선교지에 돈을 보내고 일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정도가 아니라 분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으로 자본주의의 병폐를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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