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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의 끝
[324호 스무 살의 인문학]
[324호] 2017년 10월 27일 (금) 15:42:25 김희림 철학을 좋아하는 20대 인문학도 goscon@goscon.co.kr
   
▲ 장 앙투안 테오도르 지루스트가 그린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1788)

호모사피엔스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 다양한 감각에서 오는 즐거움이 그 증표인데, 사람들은 필요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감각을 즐기고 다른 감각보다 특히 눈을 통한 감각을 즐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아무 행동의도가 없을 때도 ― 사람들 말대로 ― 만사를 제쳐두고 보기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감각들 가운데 시각이 우리가 사물을 아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고 많은 차이점들을 밝혀준다는 데 있다.”

철학과에 입학하고 첫 철학 수업에서 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1권의 첫 구절입니다. 앎에 대한 보편적인 열정을 선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언에 새내기 철학도인 저는 크게 매료되었습니다. 나중에 고대 그리스어를 처음 익힐 때 이 구절을 해석하려고 밤새 씨름하기도 했지요. ‘강단 인문학의 위기’와 ‘대중 인문학의 열풍’이 공존하는 시기에 철학과에 뛰어든 제게 이 구절은 매우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면 앎에 대한 전문적인 탐구가 무척 훌륭한 일이라 느꼈고, 나아가 그 앎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나 듣기 전까지 말입니다.

발이 부어 슬픈 아이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하리라는 예언과 함께 태어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차마 그런 아이를 키울 수 없었던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는 아이의 발목을 묶고 양치기를 시켜 아이를 버리도록 지시합니다. 마음 약한 양치기는 아이를 버리지 못하고 이웃 나라 코린토스의 양치기에게 아이를 넘기고, 코린토스의 양치기는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와 왕비 메로페에게 아이를 바칩니다. 폴리보스와 메로페는 아이를 발견했을 때 아이의 발이 묶여서 부어있었기에 그의 이름을 부은(οἰδέω) 발(πούς)이라는 뜻의 오이디푸스라 짓습니다.

장성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듣기 위해 찾아간 델포이 신전에서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하리라는 예언을 듣고 충격에 휩싸여 코린토스를 떠납니다. 친부모라 생각한 폴리보스와 메로페를 배신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이웃 나라 테베로 떠나는 여정에서 오이디푸스는 좁은 길목을 두고 한 무리와 다투고, 이내 상대방을 죽이게 됩니다. 그가 죽인 사람이 친아버지 라이오스임을 모른 채 말입니다. 테베에 거의 도착해 그는 라이오스가 실종된 후 테베를 휘두르던 괴수 스핑크스를 만납니다. 스핑크스는 여행자들에게 문제를 내고 맞히지 못하는 자들은 죽였습니다. 오이디푸스도 스핑크스의 문제로부터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아침에는 다리가 넷, 점심에는 다리가 둘, 그리고 저녁에는 다리가 셋인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여행자들을 좌절시킨 스핑크스의 질문을 오이디푸스는 가볍게 맞힙니다. 그 답은 인간, 네 다리로 기어 다니다가 두 다리로 일어서서 이내 지팡이를 짚고 걷는 인간이 문제의 답이었습니다. 스핑크스는 굴욕감에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물리친 테베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테베의 왕비와 혼인하게 되지요. 그 왕비가 젊음을 유지하는 목걸이를 한 친어머니, 이오카스테라는 사실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테베에 전염병과 기근이 퍼집니다. 라이오스의 죽음을 해명해야만 전염병과 기근의 저주가 멎는다는 신탁에 따라 시작한 조사는 충격적인 결과를 내보였습니다.

라이오스를 죽인 것은 오이디푸스였던 것입니다.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으나 아직 놀라기는 일렀습니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에 대한 또 다른 신탁이 떨어진 것입니다.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하는 자. 최초의 예언에 따라 오이디푸스가 친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친어머니 이오카스테와 혼인한 사실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이오카스테는 목을 매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옷핀으로 스스로 두 눈을 멀게 해 방랑길을 떠납니다. 이오카스테와 낳은 딸, 안티고네의 부축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숨바꼭질의 끝
오이디푸스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이 이야기는 오랜 기간 다양한 해석을 낳았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해석은 프로이트가 제안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입니다. 남아(男兒)가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와 동일화해 그를 극복하고(친부살해라고도 하지요) 어머니를 독점하려는 유아기의 근본적인 욕망이 있다는 정신분석적 이론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와 일견 맞아떨어집니다. 반면 지라르는 프로이트의 해석을 전면 부정합니다. 친부살해 욕망은 아들을 경쟁자로 여기는 아버지의 해석적 허구에 불과하다고요. 라이오스가 신탁에 따라 왕위와 아내를 빼앗길 것이 두려워 오이디푸스를 내버린 것에서 드러나듯이 말이지요. 설령 아들이 친부살해 욕망을 갖더라도 이는 아버지의 해석을 내면화한 것입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비판하면서 지라르는 사회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 추방당할 ‘필요가 있는’ 희생양이 있다는 전제를 놓습니다. 사회에 떠도는 폭력의 잠재성을 한데 모아 해소할 희생양 말입니다. 희생양의 자격 요건은 소수자 정체성입니다. 유럽에서 흑사병이 돌았을 때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이 강에 독을 탔다는 소문이 나돌아서 유대인과 조선인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임진왜란 때 관아가, 한국전쟁 때 지주네 집이 가장 먼저 불탔던 것을 생각하면, 저주의 책임을 지는 소수자는 꼭 약자여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라르는 오이디푸스가 ‘장애인’이며 ‘왕’이라는 지점에 주목합니다. 장애인이기에 테베에서 쫓겨났고, 왕이기에 전염병과 기근의 책임을 졌다는 것이지요. 그가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했다는 문학적 장치는 소수자 박해를 합리화하는 기제라고 지라르는 역설합니다.

프로이트와 지라르의 견고한 해석을 좇으며 저는 세계관의 입체적인 확장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오이디푸스 신화를 공부하던 어느 날 제게 큰 영향을 주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다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앎을 추구하고, 시각을 통한 감각의 즐거움을 누린다는 《형이상학》의 첫 구절과 오이디푸스 신화를 함께 되새기며 저는 좁힐 수 없는 모순을 느꼈습니다. 과연 인간은 본성적으로 앎을 추구하나요? 정말로 인간은 감각을 통해 깨닫는 사실들을 초연히 즐기나요? 오이디푸스라면 이 질문에 무어라 대답할까요. 비극적 욕망의 투사적 존재로 태어나 희생양으로 추방당할 그는 그의 삶의 비밀을 알게 되어 즐거웠을까요.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앎이 한없이 고통스럽고 회피하고픈 것이라 역설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즐거운 앎은 오직 자기 배타적인 앎입니다. 세계에 대한 은폐된 진리를 파헤치는 탈은폐적 쾌감은 나에 대한 앎을 비껴갈 때 해당이 됩니다. 스핑크스의 문제를 맞히는 것은 즐거운 앎이지만, 본인이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해 저주를 몰고 왔다는 앎은 결코 즐거울 수 없지요. 앎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앎을 향한 본성적 욕망이 꿈틀대지만, 그 결과를 마주하고서는 그 허무함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 이러한 탐구는 숨바꼭질 놀이와 그 결을 같이 합니다. 아이는 술래를 맡으면 골목을 헤집으며 과감하게 숨은 아이들을 찾아내지만, 자기가 그 발견의 대상이 되면 자기도 스스로를 볼 수 없는 곳에 몸을 웅크린 채 꼭꼭 숨지요.

운명을 걸으며
앎의 희열과 그 끝에 도사린 앎으로부터의 위협은 사실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궤적을 따라 흩뿌려져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델포이 신전에서 받은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하는’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를 통해 무의식의 문제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기실 그의 삶을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서술은 스핑크스가 그에게 낸 문제입니다. 아침에는 다리가 넷, 점심에는 다리가 둘, 그리고 저녁에는 다리가 셋인 존재. 오이디푸스는 그 문제의 답을 인간이라고 제시하고 그 답을 맞혔습니다. 오이디푸스의 삶에서 절정을 달리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스핑크스의 문제의 답은 동시에 오이디푸스, 곧 부은 발 그 자신이기도 합니다. 저주와 함께 태어나 발이 묶인 채 쫓겨나고 정착한 곳에서도 살 수 없었던 그는 부은 발 때문에 손을 쓰지 않으면 걸을 수 없는 다리가 넷인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스핑크스를 물리치고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해 그를 추방한 부모에게 복수하며 왕위에 올라 부은 발을 극복하며 두 다리의 독립성으로 우뚝 섰습니다. 그러나 부은 발이 스스로에 대한 앎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딸이며 동생인 안티고네를 지팡이 삼아 세 개의 다리로 방랑하다 죽는 오이디푸스.

포이어바흐는 신학은 곧 인간학이라는 말로 기독교의 본질을 해부했습니다. 신은 인간의 투사이며 인간 보편의 유적 대상이기에 신에 대한 서술과 지식은 역으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낸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읽으며 포이어바흐의 말을 뒤집어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학은 곧 신학이라고 말입니다. 인간 스스로에 대한 인간의 앎은 신적인 영역으로 치부되는 금기이며 지혜에 대한 사랑은 초월에 대한 도전이니까요. 신적 앎에 접근한 인간은 오이디푸스처럼 부은 발을 움켜쥐고 지팡이를 짚은 채 세 다리로 걷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하고, 두 눈을 통한 앎의 즐거움을 누릴까요?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삶의 궤적은 앎을 향한 투쟁이 결코 아니었고, 그에게 앎이 던져졌을 때 그가 취한 행동은 스스로 두 눈을 찔러 멀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을 알지 못했다면 그의 삶은 참 행복했을 것입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우리는 발은 부었으나 눈은 늘 뜨고 있어 만사를 제쳐두고 보기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눈은 눈을 볼 수 없습니다. 처절하게 자기 배타적인 앎을 추구하는 인간은 골목 어딘가에 숨어 있는 친구들을 다 발견한 아이와 같습니다. 타자에 대한 지식을 찾아내 즐겼으나 이다음 숨바꼭질에서 스스로가 앎의 대상이 되어 마음을 졸이며 숨어 있는 아이. 앎에 대한 거만한 도전은 인간의 본성을 이렇게 이중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리를 마주했을 때 인간의 거만한 본성은 무너진 채, 오이디푸스처럼 발을 절고 눈을 감은 채 세 다리로 방랑할 것입니다.

 

김희림
장차 전문성과 대중성, 다양성을 겸비한 인문학자를 꿈꾸는 스무살 인문학도. 머리 아픈 철학책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시끄러운 베이스 기타 연주를 즐기며, 비폭력·반전·반핵을 지지하면서 삼류 무협영화 ‘덕후’를 자처한다. 아버지인 김기현 목사와 함께 ‘로고스서원’을 꾸려나간다. 경희대 철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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