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호 표지]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 다음에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

JTBC 뉴스룸에서 소개된, 미국 국회의사당 채플 목사 리처드 핼버슨의 말입니다. 한국으로 온 교회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다큐영화 <쿼바디스>의 김재환 감독은 “대기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규모가 커져갈 때, 평판과 신뢰도 그만큼 올라갔을까요?

언젠가부터 기독교는 ‘개독교’가 되었지요. 이는 기실 세간의 적대와 혐오가 담긴 이름일 터입니다. 적대와 혐오가 불편한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적대와 혐오를 가장 빈번하게 표출하는 종교계가 어디일까요?

적대와 혐오는 때로 두려움과 공포의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슬람과 동성애, 그리고 진보 세력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커서일까요? 한국교회만큼 사랑보다 적대를, 용납보다 혐오를 두드러지게 표출하는 종교계가 또 있을지요. 예수께서 “네 ‘마음에 드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라도 했던 걸까요? 혐오와 적대는 더러 내부 위기를 타개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외부의 적을 설정하고 그를 위협 세력으로 몰아가면서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하는 거지요. 내부 위기에 대한 시선과 문제의식을 외부로 환기함으로써 내부 결속을 다지는 방식이지요.

교세가 위축되고 사회적 평판이 하락하며 세상의 비난거리로 전락한 한국 개신교는, 극단적 보수주의로 무장하고 온라인 미디어를 이용해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대안 우파’의 대표집단처럼 되어갑니다.(“한국교회가 ‘미혹의 어둠’을 택하는 이유”, 60쪽) 카카오톡은 외부의 적을 만들고 혐오와 적대를 생산·유포하는 한국교회의 기지국이 되었습니다. 교회 성도들이나 기독교 모임의 ‘단톡방’ 가운데는 가짜 뉴스와 거짓 정보가 넘쳐나는 곳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이제 기독교는 ‘카톡교’로 불리는 형편이 되었습니다.(“한국교회의 가짜 뉴스 패턴은 ‘혐오’입니다”, 35쪽)

이런 노력이 차츰 가라앉아 가는 ‘한국 개신교’호를 다시 떠오르게 할 수 있을까요? 외부의 적을 찾아 혐오와 적대에 골몰하기보다 내부의 죄, ‘우리 눈의 들보’를 찾고 성찰하는 것. 이야말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면서 해야 할 일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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