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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미혹의 어둠’을 택하는 이유
[325호 커버스토리]
[325호] 2017년 11월 28일 (화) 16:03:47 이원석 문화비평가 goscon@goscon.co.kr
   
▲ 가짜 뉴스는 기쁜 소식인 복음의 진리 대신 에고의 욕망을 추구한다. (이미지: Pixabay.com)

뉴스가 아닌 ‘가짜 뉴스’
“정부가 할랄음식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건강식품으로 홍보해주는 것은 문제가 많다. 실제로 할랄음식은 국민건강에 해로운 것이다. … 할랄식 도축은 가장 잔인하게 동물을 도축하는 방법이다. … 동물이 죽어가는 동안 당하는 극도의 고통과 스트레스와 분노 때문에, 몸에서 치명적인 독성이 생성될 수 있다. … 할랄식품만 먹는 이슬람 국가들은 국민소득이 암만 높아도 평균수명이 짧다.”

이런 뉴스를 접하면, 일반적으로 어떻게 반응할까? 아무래도 할랄푸드와 평균수명의 관계에 눈길이 가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먹는 음식을 믿어도 될 것인가, 두려움이 생길 것이다. 또한 나아가 이를 통해서 이슬람 문명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과연 이 정보가 진실일까? 이 뉴스를 믿을 수 있을까? 이 뉴스가 자아내는 두려움이 허구에 근간해서야 곤란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두려움의 근간이 진실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이 뉴스에 대한 중동 전문가이자 아랍 지역 선교사인 김동문 목사의 설명을 살펴보자.

“미국 워싱턴 소재 비영리 인구통계연구소인 인구조회국(PRB)이 조사한 2014년 기준 각 나라 평균 연령 현황을 살펴보면, 평균수명과 종교의 상관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보다 평균수명이 낮다고 주장할 근거도 전혀 없다. 오히려 평균수명 상위권에 있는 북아프리카와 걸프 연안 이슬람 국가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평균수명 하위권 국가들은 중부, 남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종교(할랄식품)와 평균수명의 상관성을 찾더라도, 아랍 이슬람 국가의 평균수명이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지역의 나라들보다 전체적으로 높게 나온다.”

이러한 팩트체크 결과, 할랄음식에 대한 보도가 ‘가짜 뉴스’로 드러났다. 사실 가짜 뉴스라는 용어는 형용 모순이다. 뉴스의 본질은 ‘사실’(fact)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짜 뉴스는 뉴스라고 할 수가 없다. 뉴스 보도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대중이 알면 좋을 진짜 사실, 혹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에 드리워진 무지의 베일을 벗기고, 이를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 목적은 특정한 반응이다. 대중매체를 통해 제공되는 뉴스는 (기쁨이나 분노나 두려움과 같은) 감정을 자아내고, 그에 따른 행동을 촉구한다. 지난 2016년 10월 24일 JTBC는 최순실의 태블릿 PC 보도를 통해서 온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분노라는 감정과 시위라는 행동을 유발했고, 대통령 탄핵의 불씨를 당겼다.

우리는 JTBC를 통해 뉴스 보도의 바른 예를 보게 된다. 현재 많은 시민들이 JTBC를 공영방송의 대체재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할랄음식에 대한 뉴스처럼 우리에게 알리는 내용이 진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이는 잘못된 것이며, 그렇기에 가짜 뉴스의 확산은 막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도처에서 가짜 뉴스가 난무한다. 특히 지금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온갖 가짜 뉴스가 확산되고 있다. 유익하나 재미없는(감각적으로 와닿지 않는) ‘사실’에 대한 소개와 분석은, 사실에 기반하지 않지만 재미있고 자극적이며 정념을 자아내는 왜곡과 피상성으로 점철된 가짜 뉴스를 선택하게 만드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에 묻히고 있다.

탈진실과 뉴미디어
작년(2016년)에 옥스퍼드 사전은 ‘올해 세계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택했다. 옥스퍼드 사전 위원회에 따르면, 탈진실은 “객관적 사실이 공중의 의견을 형성하는 데 개인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보다 영향력을 덜 끼치는 환경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에 의거한 지적 판단보다 감정 자극의 영향력이 큰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대중은 매체를 통해서 진실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 합치하는 의견을 기대한다.

‘2016년 올해 세계의 단어’의 유력한 경쟁 후보 가운데 ‘대안 우파’(alt-right)가 있었다고 한다. 대안 우파의 특징은 “극단적 보수주의적 관점을 지닌 집단으로 주류 정치를 거부하며 온라인 미디어를 통해서 의도적으로 논쟁적 내용을 퍼뜨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운위되는 바, 온라인 미디어를 통해서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논쟁적 내용의 본질이 바로 탈진실일 것이다. 두 가지가 눈길을 모은다. 하나는 온라인 미디어이고, 다른 하나는 의도이다.

가짜 뉴스 자체는 진짜 뉴스와 외형상 동일하다. 여기에 사진이나 동영상까지 덧붙이면 그럴 듯하게 다가온다. 더욱이 비교적 어린 연령대는 트위터를, 청년들은 페이스북을, 중년과 노년들은 카카오톡을 통해서 신속하게 확산된다. 다시 말해서 온라인 미디어의 핵심은 전파 속도에 있다. 예전에도 가짜 뉴스는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신속하게 전파되지 못했다.

또한 온라인 미디어가 확산시키는 가짜 뉴스는 명확하게 정치적 목적(의도)을 가지고 생산되고 유통된다. 또한 그에 따른 특정한 정치적 효과(결과)를 거두고 있다. 대중의 조직 양상과 사회적 역학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의도가 진실을 압도한다. 이는 대중이 사실에 기반하는 뉴스보다 관점이 부각되는 의견을 선호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거짓말을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방법을 우선하는 것이다. 해리 프랭크퍼트의 《개소리에 대하여》(필로소픽)에서 말한 바가 바로 그것이다. 가짜 뉴스 전파의 핵심은 가짜 뉴스 자체가 아니라 뉴스를 왜곡하게 만드는 의도에 있다. 거짓말쟁이는 정직한 사람과 진실에 대한 기준을 공유한다. 하지만 개소리를 떠들어대는 사람들은 목적에 따라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인다.

가령 트럼프의 문제적 발언들이 바로 거짓말이 아니라 개소리(bullshit)이다. 그의 관심과 기준에는 그저 돈과 권력이 존재할 뿐이지, 진실 여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많은 정치가들의 이상한 발언도 본질적으로 그러한 맥락에 따른 것이다. 정치적 맥락에서 유독 그런 것이라고 치부하고 싶지만, 기독교의 경우도 그렇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생산 유통되는 가짜 뉴스는, 특정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유발하고 진실을 분별하는 눈을 가려버린다. (이미지: Pixabay.com)

한국교회의 두려움
온갖 거짓을 확산하는 데 지역 교회 커뮤니티와 기독교인들이 가세한다. 아니,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보수언론인 조갑제가 보수의 보루로 군대와 더불어 교회를 호명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수구 진영이 기독교의 자원에 기대고 있다. 앞서 말한 대안 우파, 즉 “극단적 보수주의적 관점을 지닌 집단으로 주류 정치를 거부하며 온라인 미디어를 통해서 의도적으로 논쟁적 내용을 퍼뜨리는” 대표적 단체가 바로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집단인 셈이다.

진리의 담지자가 되어야 할 교회가 진리의 빛을 멀리하고, 미혹의 어둠을 택하고 있다. 이유는 교회가 두려움의 수렁으로 들어간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개(犬)독교라는 명칭이 잘 보여주듯이 교세가 위축되고, 사회적 평판이 하락하고 있다. 세상의 존경을 얻기는커녕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한 현실이 교회에게 요구하는 것은 뼈아픈 성찰이다.

하지만 교회가 택하는 방식은 변화를 거부하고, 공격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가짜 뉴스는 세상을 힘으로 제압하려는 공격적 방식의 일환이다. 진리와 세상의 요구에 따라서 자신을 비우고, 아집을 내려놓는 방식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바꾸지 않고 타자를 바꾸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교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욕망이 하수처럼 흐르는 시대
가짜 뉴스를 살포하는 한국 기독교를 (이웃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교회 공동체로 보기보다는 (자기의 생존을 우선하는) 권력 집단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가짜 뉴스 확산의 현실적 이유가 그대로 교회에 적용될 것이다. 가짜 뉴스의 생산과 유포는 (돈이나 권력과 같은) 세속적인 것에 대한 욕망에 기반한다. 우리 시대는 이러한 욕망이 하수(河水)처럼 흐르는 시대이다. (기독교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욕망을 가지고 있다면, 언제든 미혹될 준비가 되어 있다.

갑돌이가 돌쇠에게 자문을 구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림 한 폭을 팔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겠냐는 물음이었다. 돌쇠는 열심히 이 그림의 상품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여러 논리와 언어를 만들어주었다. 열심히 듣던 갑돌이가 갑자기 그림을 팔지 않아야겠다고 말했다. 돌쇠가 당황하여 그 이유를 물었다. 갑돌이가 대답하기를, “자네 이야기를 듣다보니 내가 이 그림의 가치를 확신하게 되었거든.”

소비자를 겨냥한 돌쇠의 탁월한 컨설팅이 판매자(갑돌이)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 결과로 갑돌이가 세뇌된 것이다. 적극적으로 세뇌 당한 것이다. 이는 울고 싶은 데 뺨을 때려준 격이다. 듣고 싶은 말을 해주니까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 쓰라린 진실을 원하지 않고, 달콤한 거짓을 들려주길 바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춘다는 이야기나 하고 있다(고래 쇼를 관찰하면, 고래가 제대로 미션을 수행한 후에 항상 먹이를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는 언제나 욕망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종종 만악의 근원으로 치부되기도 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온라인 미디어라는 테크놀로지가 결합하여 이러한 상황을 증폭하고 있다. 욕망을 독려하는 사조(내용)와 욕망을 포장하고 확산시키는 매체(형식)의 결합으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는 것이다.

더 적게 일하고(시간적 여유), 더 많이 벌 수 있다는(경제적 자유) 약속을 내세우는 다단계의 설득 전략이 여전히 먹혀들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식 시장에 뛰어드는 많은 개미 투자자들의 심리도 마찬가지다. ‘주식 빼고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주갤러들(디시인사이드 주식 갤러리 이용자)이라는 농담도 주식 투자에 필요한 정확한 정보를 분별할 수 없게 그들의 눈을 가리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원래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마련이다. 여기서 원래라고 함은 이성과 전통으로 규제되지 않은 욕망의 중력에 이끌리는 상황을 가리킨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쉽사리 진실보다 욕망을 택하게 된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에 편재하시지만, 결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신전(神前, Coram Deo) 의식은 우리의 믿음을 요구한다. 욕망의 중력에 붙잡힌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바에 대한 확증을 구하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에게 팩트는 폭력이다. 오죽하면 “당신이 무심코 던진 팩트, 누군가에겐 폭력일 수 있습니다”라거나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하지 말고 정정당당히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자!”라는 말이 나돌겠는가. 진실(팩트)은 쓰고, 거짓은 달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욕망에 부합하지 않는 진실보다는 차라리 내 입맛에 맞는 거짓을 듣는 것을 택한다.

내가 원치 않는 내용이라면, 진실을 거부한다. 내가 원하는 내용이라면, 거짓이라도 환영한다. 이미 수신자가 준비되어 있으니 그에 맞게 송신자가 전달하는 것이다. 미혹의 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이게 자연스런 것이다. 자연의 상태 그 자체로 옳고 좋다고 보는 것은 착각이다. 그렇기에 은총이 필요하다. 따라서 은총의 공동체인 교회는 달라야 한다.

진리, 사랑, 교회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는 은총의 공동체이기에 팩트 폭력 앞에서 자신을 열어놓을 수 있다. 그렇기에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가 될 수 있다. 언제나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자신의 오류와 실패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용서받아 새롭게 전진하는 것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상)

개독교라는 라벨을 달고 있는 한국의 교회는 사랑 대신에 두려움을 택했다. 사랑이 요구하는 자기 비움의 개방성 대신에 자기 강화의 폐쇄성을 추구하고 있다. 가짜 뉴스(fake news)는 기쁜 소식(good news)인 복음의 진리 대신에 에고의 욕망을 추구한다. 한국의 교회가 유독 거짓말을 사랑하는 집단일 리는 없다. 그저 변화를 거부하는 경화된 보수 집단이 되었을 뿐이다. 자기 안전을 우선하는 정치세력이 되었을 뿐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또한 자기들이 하는 말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눈이 가려졌다. 그 두려움을 넘어서 사랑으로 나아가려면,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자기 존재를 떠받치는 힘(권력)에 대한 사랑 대신에 자기 존재를 비우는 사랑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과연 한국교회는 변화의 도전 앞에서 자기 비움으로 응답할 수 있을까?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타자와 소수자를 공격하고 음해하는 가짜 뉴스를 살포하는 대신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세상을 섬기는 이웃 사랑의 메신저로 거듭날 수 있을까? 솔직히 확신이 없다. 그저 교회와 세상을 운행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할 뿐이다.

 

이원석
한국교회와 사회의 변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양개혁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공부하는 교회와 사회를 세우기 위해 계속 읽고, 쓰고, 외치고 있다. 저서로는 2013년 한국출판평론상 수상작인 《거대한 사기극》을 비롯하여 《공부란 무엇인가》 《인문학 페티시즘》  《공부하는 그리스도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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